연극 '붉은 낙엽'(2025). /라이브러리 컴퍼니 |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과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지금 각각 공연 중인 인기 상한가의 연극 두 편은 전혀 다른 색깔이다. 가족 드라마라 할 ‘바닷마을 다이어리’(15일 개막)가 부드럽고 달달한 밀크티 같다면, ‘붉은 낙엽’(8일 개막)은 관객의 심장을 조이는 듯한 무대 위 서스펜스에 놀라게 되는 매운맛 심리 스릴러.<그래픽>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올해 딱 마흔이 된 이준우 연출가의 작품이다.
‘국가대표 극장’ 두 곳에서 동시 공연은 어쩌면 젊은 연출가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훈장’ 같은 기회. 게다가 이번 한국뮤지컬어워즈 작품상(400석 미만)을 받은 뮤지컬 ‘홍련’도 그의 연출작이었고, 오는 3월엔 1인극 ‘지킬 앤 하이드’ 개막도 앞두고 있다. 배우도 아니고 연출가 스케줄이 이렇게 살인적이라니. 30일 전화로 ‘그러다 쓰러지겠다’고 했더니 그는 “이렇게 될 일은 아니었는데…”하며 웃었다. “‘바닷마을’이 ‘지킬’이라면 ‘붉은 낙엽’은 ‘하이드 같은 느낌일까요. 제 안에 무언가 있었던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하하.”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는 네 자매가 진짜 가족이 돼 가는 과정을 그리는 부드럽고 달달한 드라마. 소년과 소녀가 벚꽃비 아래 자전거를 달리면 관객의 마음도 함께 환해진다.(왼쪽) 의심과 불신으로 무너져가는 가족을 다루는 ‘붉은 낙엽’(국립극장 달오름극장)은 연극적 서스펜스의 극한을 보여준다. 두 작품 모두 연출가 이준우(40) 연출작이다./라이브러리 컴퍼니 |
◇日영화 원작 연극은 달달하고 부드럽게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일본 영화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동명 영화(2015)가 원작. 매진 행렬이 이어진 2023년 초연에 이어 두 번째 공연이다.
첫째 사치(홍은희·한혜진·박하선), 둘째 요시노(유이·임수향·서예화), 셋째 치카(강해진·류이재·소주연)까지, 세 자매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가족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떠났다. 엄마까지 ‘더 못 견디겠다’며 자매를 버리고 떠난 뒤, 첫째 사치는 맏딸의 책임감으로 두 동생을 키웠다. 뒤늦게 부고를 받고 도착한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세 자매는 배다른 동생 스즈(설가은·신예서·유나)를 만난다. 어쩌면 가족을 망친 미운 여자의 자식. 하지만 자매는 천애고아가 된 스즈를 집으로 데려와 함께 살기로 한다. 네 자매는 서로를 감싸안으며, 또 각자 자기 몫의 시련을 통과하면서 더 단단한 가족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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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사랑스러운 네 자매의 티격태격 일상을 눈앞에서 보는 친밀감이다. 관객은 무대 위 반짝이는 일상의 순간에 저마다 추억을 겹쳐 떠올리게 된다. 막내 스즈가 객석을 향해 조근조근 털어놓는 속엣말은 영화엔 없는 독백.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무대와 조명도 영리하다. 무대는 단차를 둬 오르내리며 자매가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도 되고, 밥 먹고 이야기 나누는 툇마루집이나, 파도 소리가 밀려오는 바닷가도 된다. 벚꽃 터널을 달리는 자전거 위로 꽃비가 내리고, 마당의 매화나무 그림자가 무대를 가득 채울 때의 조명 사용도 인상 깊다.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소리, 물수제비 돌을 던질 때 관객 머리 뒤에서 들리는 ‘퐁당’ 소리처럼 음향 설계도 입체적이다.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원작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가운데 회색 상의 남자)은 2023년 10월 13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을 찾아 연극을 직접 관람했다. 이날 공연 뒤 출연 배우들과 찍은 기념 사진. /라이브러리 컴퍼니 |
연극 '바닷마을 다이어리' 무대 위에 함께 선 원작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오른쪽)와 이준우 연출. /라이브러리 컴퍼니 |
최고의 가마쿠라 특산 잔멸치 덮밥(しらす丼)을 해주던 바닷가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난치병에 걸리자, 둘째 요시노는 “신이 있다면 그놈한테 너무 화가 난다”고 불평한다. 그 말을 들어주던 회사 상사는 대꾸한다. “그러게. 신이라는 놈, 우리를 생각해주지 않으니까, 우리가 우리를 생각해주는 수밖에.”
사람은 실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결함투성이. 그래도 서로 기대고 손잡아줄 수 있어 살아갈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무대 위 이야기를 지켜보는 동안 이 단순한 깨달음으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준우 연출은 “고레에다 감독 영화의 열혈 팬이라, 사실 처음엔 ‘영화가 있는데 굳이 연극을…’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감독이 직접 보러 올 거라는 제작 피디 말에 ‘감독님을 진짜 볼 수 있다면 꼭 하겠다’고 했다”며 웃었다.
그래픽=이진영 |
◇美추리소설 원작 연극은 ‘빨간 맛’ 스릴러
‘붉은 낙엽’은 2021년 초연 때 “공연의 창의성과 완성도,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 무대 및 조명 효과의 기술적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과 함께 한국연극협회 ‘대한민국 연극대상’을 받았다. 미국 추리소설가 토머스 H. 쿡의 동명 소설이 원작. 연극이 줄 수 있는 스릴과 서스펜스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연극은 “처음 내가 이 집을 살 때 간절히 원했던 것은 절대로 금이 가지 않는 집, 바위처럼 단단하고 튼튼한 집이었다”는 주인공 ‘에릭’(김강우·박완규·지현준)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연극 '붉은 낙엽'(2025). /라이브러리 컴퍼니 |
평화로운 마을, 사진관을 운영하는 에릭의 가족은 자신만만한 대학 강사 아내 바네사와 소심한 고등학생 외아들 지미. 늦가을 어느날 이웃 카렌의 여덟 살 딸 에이미가 실종되고, 그 밤 카렌의 부탁으로 에이미의 베이비시터를 맡았던 아들 지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불리한 정황 증거들이 이어지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사소한 의심과 잘못된 확신이 긴장으로 쌓이고 쌓이다 한꺼번에 폭발하는 클라이맥스의 순간, 극장의 모든 관객이 한 호흡으로 ‘헉’ 하고 숨을 몰아쉬는 게 느껴진다.
이준우 연출은 “쌓아놓고 읽을 만큼 추리소설을 좋아한다. 장르극을 정말 해보고 싶었다”며 “순수한 서사의 힘으로 끝까지 밀도 있는 궁금증과 긴장감을 밀어붙일 수 있는 연극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붉은 낙엽’은 전혀 색깔이 다른 연극이지만, 화자 격인 배우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걸 듯 발화하는 독백, 한정된 무대 공간 안에 자주 중첩되는 다른 시공간, 배우의 감정 과잉을 극도로 절제함으로써 관객을 더욱 몰입시키는 연출 방식 등 연출가 이준우의 개성이 드러나는 것이 공통점이다.
[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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