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미국 워싱턴 DC 국립 대성당에서 설교한 마리앤 애드거 버드(65) 성공회 워싱턴 교구 주교/AP 연합뉴스 |
“대통령님, 하느님의 이름으로 간청드립니다. 지금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 국민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21일 미국 워싱턴 DC 국립 대성당에서 열린 ‘국가기도회’에서 설교를 맡은 매리앤 애드거 버드(65) 성공회 워싱턴 교구 주교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게이·레즈비언·트랜스젠더 자녀를 두고 있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민주당원·공화당원·무당파 국민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전날 트럼프가 주관적인 성정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생물학적 성별만 인정하겠다는 취지로 내린 행정명령의 부당함을 호소한 것이다. 버드 주교는 이어 “농작물을 수확하고 건물을 청소하고 양계장과 정육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식당에서 설거지하고 병원에서 밤 근무 서는 사람들” 등 서민 노동자들의 직종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들 중에는 외국인이나 합법적 체류 서류가 없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이민자 대부분은 세금을 내는 선량한 이웃”이라며 “또한 교회·모스크·시나고그(유대교 회당)·구르드와라(힌두교 사원)·절에 다니는 신실한 신앙인들”이라고 말했다.
“불법 이주자들이 미국 치안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전례 없는 규모의 추방 작전을 펼치겠다는 트럼프 이민 정책의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이주자들이 미국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원 역할을 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조금은 떨렸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는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트럼프와 배우자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 며느리 라라 트럼프, 아들 트럼프 주니어, 딸 티파니 트럼프 등 직계가족 및 J D 밴스 부통령의 얼굴까지 잔뜩 굳었고 시시때때로 조금씩 일그러졌다. 트럼프는 불쾌한 듯 여러 차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했다.
국가기도회는 1933년 시작된 전통 있는 미국 대통령 취임 행사다. 기독교와 유대교·이슬람교·불교·시크교·모르몬교 등 10여 개 종파 지도자가 참석하는 범국가적 행사다.
전날 취임식에서 ‘미국의 황금시대가 시작됐다’고 자신만만하게 외친 트럼프가 주요 방송사들이 생중계하는 국가기도회에서 설교라는 형식으로 ‘성소수자와 불법이주자 정책을 재고하라’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21일 미국 워싱턴 DC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국가기도회에 참석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는 이날 설교에서 자신의 정책에 쓴소리한 메리앤 에드거 버드 주교를 맹비난했다. /AP 연합뉴스 |
버드 주교는 “(불법 체류자 단속으로) 부모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우리 지역사회의 자녀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전쟁 지역과 박해를 피해 고국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연민과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로 설교를 마쳤다. 트럼프는 이날 트루스소셜에 “설교를 한 소위 주교는 급진 좌파이자 강경 트럼프 혐오자였다”며 “그와 그 교회는 사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갓 취임한 미국 대통령을 축복하는 자리에서 성직자가 핵심 정책의 재고·폐기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장면이 생중계되면서, 트럼프의 강경한 성소수자·이민 정책에 대한 회의론이 커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특히 트럼프가 내각에 남성 동성애자 두 명(스콧 베센트 재무 장관, 리처드 그리넬 대북특사)를 기용하고, 동성애 코드가 강한 가수·노래인 빌리지 피플의 ‘Y.M.C.A.’에 열광했다는 점에서도 정책 변경 요구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트럼프에게 당혹감을 안겨준 버드 주교는 성공회가 1992년 여성에게도 사제직을 허용한 뒤 워싱턴 교구에서 배출된 첫 여성 주교다. 로체스터대 역사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2011년 11월부터 워싱턴 교구를 이끌고 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둔 아내이자 어머니이기도 하다.
워싱턴 교구는 버드 주교를 “일하지 않을 때 자전거를 즐겨 타고 저녁에는 요리를 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소개한다. 버드 주교는 정치·사회적 소신은 뚜렷하게 밝히는 성직자로 평가받는다. 특히 트럼프에 대해서는 1기 때부터 줄곧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2020년 5월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질식사하면서 촉발된 대규모 인종차별 반대 시위(BLM·흑인 목숨은 소중하다)가 일어났을 때 트럼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버드 주교는 트럼프의 취임사를 유심히 듣고 당초 준비했던 설교 내용을 여러 차례 고쳤다고 한다. 그는 이날 뉴욕타임스에 “내가 대통령에게 하고 싶었던 말은 ‘이 나라는 당신에게 맡겨졌다는 것’이었다”면서 “지도자의 자질 중 하나는 자비”라고 했다.
[뉴욕=윤주헌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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