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47년 연말 특집 '회오의 송년'(1) "너 때문에 독립 안 돼!"라고 서로 남 탓만 하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새해에는 "나 때문에 독립이 안 된다"고 스스로 성찰하자고 권고하는 기사다. /조선일보 |
“산타클로스 할아버님은 세계의 구석구석에 아름다운 선물을 안고 찾아온다고 하거니와 우리에게는 어떠한 선물을 베풀려는가? 자주독립 그것 외에는 아무런 민족의 소망도 없으니, 새해야말로 우리들의 소망이 달성되도록 굳은 약속을 선물로 받고 싶을 뿐이다.”(‘중앙신문’ 1947.12.25)
1947년 세모(歲暮)에는 때아닌 겨울비가 내렸다. 장맛비처럼 쏟아붓는 겨울비에 가뜩이나 쪼들리고 어지럽던 연말 분위기는 더욱 스산했다. 보건후생부에서는 의료기관의 도시 편중을 시정하기 위해 도시 지역에 병·의원 신규 개업을 허가하지 않아 의료인들의 반발을 샀다. 과도입법의원은 과도정부 정무회의에서 작성한 ‘시국 대책 요강’에서 “주둔군 사령관이 주권을 갖는다” “우리 3000만 조선인은 미군정을 정부로 인정했다” 등의 문구가 사실에 어긋날뿐더러 민족정신에도 배치된다는 이유에서 안재홍 민정장관에 대한 ‘불신임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부결되었다.
1947년 세모, 한국인들을 가장 고통스럽게 한 것은 날마다 치솟는 물가였다. “세계 각국의 최근 물가지수는 1937년을 100으로 하면 미국이 171, 영국이 178, 일본이 2141임에 반해 중국이 ‘191만’으로 1위, 남조선이 6만8641로 2위를 차지했다. (…) 임금지수는 미국이 210, 영국이 166, 일본이 2600, 중국이 ‘320만’으로 올랐는데, 남조선은 1만6730으로 물가지수의 4분의 1밖에 안 되는 파행적 현상을 보였다. 이로 보면 남조선의 경제 상태가 세계 최악이며 봉급생활자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는가를 알 수 있다.”(‘경향신문’ 1947.12.10)
그해 ‘조선일보’ 연말 특집 기사 ‘회오(悔悟)의 송년’은 이렇듯 살인적인 물가고를 ‘사는 것이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정리했다. “지금 우리들이 한 달을 살아가려면은 한 사람에게 3000원은 있어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는 일이다. 한 집에 세 식구면은 9000원, 네 식구면 1만2000원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수입은 과연 얼마나 되는 것일까? 남조선과도정부 즉 군정청 관리들의 월급은 부장급이 6000원이라고 하고 보통 관리들은 3000원 내외라고 한다. 또한 민간 회사도 만원을 넘는 월급은 과장 이상에도 드물다고 하는데 세 가족 이상이면 만원은 있어야 하는 우리들의 생활은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 귀신을 울게 할 기적은 월급쟁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품을 파는 노동자,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 곡식을 심는 농사꾼… 누구를 물론하고 빚어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수지가 맞지 않은 생활은 옷을 팔고, 집을 팔고, 땅과 온갖 것을 팔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40년 동안 일본 놈에게 피와 땀까지 빼앗기고 해방이라고 찾아온 뒤 나라가 허리로부터 두 동강으로 나뉘어져서 3년이 되는 오늘까지 우리에게 무엇이 남아 있어서 팔 수가 있는지 자못 의문이라 하겠다.”(1947.12.30)
1947년 세모, 석탄이 부족해 여객열차와 화물열차의 운휴(運休)가 속출했고, ‘해방자호’ 같은 급행열차는 전면 운행을 중지했다. 난방용 석탄 공급이 안 돼 초‧중등학교 겨울방학이 2주 연장되었다. 북한이 송전을 절반으로 줄인 바람에 제한 송전에 들어간 세모 서울 거리는 암흑천지였다. 어둠을 틈타 절도와 폭행 사건이 격증했다. 밤거리에서 가방을 빼앗아 달아나고,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외투를 벗겨가는 도둑까지 나타났다. 램프용 등유와 양초 가격이 폭등했고, 그 대체재로 여름철 ‘파리약’을 등잔 기름으로 사용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전기 공급이 끊겨 영화관은 기약 없는 휴관에 들어갔고,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려면 아침에 머리를 말아놓고 언제 들어올지 모를 전기를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제2차 미소공위에 참여를 신청한 남한 425개 정당·사회단체 회원이 전 인구의 3배가 넘는 6200만명이었음을 풍자한 '회오의 송년'(2). /조선일보 |
사는 것이 팍팍해지자 마주치는 사람 사이 오가는 말이 사나워졌다. “전찻간에서 좀 떠민 것이 말썽이 된 두 젊은 사나이가 옥신각신하던 끝에 서로 냅다 지른 말이 “저런 게 있으니까 조선 독립이 안 된단 말이야” “이 자식아, 너 같은 놈 때문에 안 되는 거야…” 하고 눈을 흘겼다. (…) 실상 거리에서나 집안에서 무슨 말썽 끝에 “조선 놈은 이래서 안 돼”라든가, “민족성이 이렇게 열(劣)해서야 독립이 되긴 뭐 돼”라고 자포자기적 언사를 듣기 예사이다.”(‘조선일보’ 1947.12.20)
기성세대의 눈에 1920~30년대생 ‘철부지 청년들’은 한없이 한심해 보였다. “낮에는 학생인 듯 사각모를 쓰고 다니다가 황혼이 서산을 넘게 되자 박쥐와 같이 수만 원짜리 수입품 양복에 백만장자 부럽지 않게 단장하고 ‘카페’ ‘댄스홀’을 이웃집같이 드나들며 늙은 부모 등골 빼는 불량 대학생이 있는가 하면, 민주 교육 시대라 하여 머리를 ‘소 도둑놈’같이 산발을 하고 백주에 양담배를 물고 다니는 중학생들!”(‘조선일보’ 1947.12.24)
35년 동안 참정권을 박탈당했던 한국인들은 해방 이후 정치 참여 욕망이 폭발했고 “갓난아기부터 여든 노인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세 사람어치’ 정치가 행세를 하는 요술쟁이와 같은 정치적 천재성”을 발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나도 한목 낍시다” 하고 정당 사회단체의 간판을 내걸어, 가는 곳마다 당(黨)이요, 셋만 모아도 회(會)를 조직하려고 덤벼들더니 2000만도 될지 의심스러운 남조선에서 공동위원회에 관계를 맺으려고 제출한 명부에 오른 사람의 수효는 7000만이었다.”(‘조선일보’ 1947.12.21) 그해 6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여 신청서를 제출한 남한 425개 정당‧사회단체의 회원 명부에 기재된 회원 숫자가 6200만명이었음을 풍자한 것이었다.
젊은이들의 사치와 퇴폐, 교사 권위 상실을 풍자한 '회오의 송년'(4). /조선일보 |
이렇듯 어수선한 세모였지만, 그해에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는 등장했고, 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5원짜리라도 찾아 마음을 나누는 행렬은 이어졌다. 추위에 떠는 전재민(戰災民)을 돕기 위한 의류 수집 행사에는 3만여 점의 소중한 정성이 모였다. 국내 문제가 산적한 시기였지만, 과도정부와 민간은 만주에서 귀국을 기다리는 2만여 명의 재만 동포 구호를 위해 머리를 맞댔다. 그해 12월 말로 창씨개명은 전부 말소되었고 남한 인구의 80%가 넘는 1647만명이 원래 자기 이름을 되찾았다.
정치‧경제‧사회 어느 면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세모였지만, 다음 달 8일이면 UN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할 것이었다. 그들의 감독하에 민주적 총선거가 치러지고 명실상부한 독립국가가 출범할 예정이었다. 다만, 새로 출범할 국가가 남한 단독정부일지,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정부일지는 그때까지는 불확실했다. ‘사는 것이 기적’일 만큼 하루하루가 고단했지만, 한국인들은 가족의 생계와 ‘새 나라’ 건설을 위해 좌고우면하지 않고 뚜벅뚜벅 앞만 보고 걸어갔다.
<참고 문헌>
양동안, ‘대한민국 건국사’, 건국대통령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1998
이연식, ‘다시 조선으로’, 역사비평사, 2024
‘회오의 송년 1~9’, 조선일보 1947.12.20~30
‘세모 풍경 1~6’, 중앙신문 1947.12.24.~31
‘서울의 세모 풍경 1~3’, 대동신문 1947.12.27~29
[전봉관 KAIST 디지털인문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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