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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면] Y형의 시론(詩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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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얼굴들이 자주 떠오른다. 추울수록 온기가 그리워서일까.

내겐 Y형이 그런 사람이다. 원래 형은 단아하고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북에서 내려온 할머니가 독자로 태어난 귀한 손주 오래 살아야 한다고 이름에 '거북 구(龜)'를 넣어 개명을 했다.

'구'가 들어가는 이름 때문에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났지만 왠지 골목 친구 같은 느낌을 주었다. Y형은 스무 살에 서울에 있는 한 대학 문예창작과에 합격했지만 가지 않았다. 어린 그는 자신의 무언가가 사무치게 수치스러웠다고 했다. 그러다 집 가까운 대학 국문과에 들어간 형은 곧바로 군대에 갔고, 어느 날 예비역이 되어 야전잠바를 입고 나타났다.

인품으로 알아줬던 Y형은 늘 열 살은 많은 선배들을 모시고 다녔다. 우리 학교엔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된 몇몇 선배가 재입학을 해서 다니고 있었다. 그 선배들의 졸병이자 그들을 까마득한 후배들과 이어주는 가교가 바로 Y형이었다.

Y형은 역마살이 있었다.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나 한 달씩 종적이 묘연했다. 시인으로 등단한 소식도 강원도 구절리에 있는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다가 식당에 걸려온 전화로 알았다고 했다. 시를 잘 썼던 그는 눈썹이 반달형이었다. 눈두덩이가 약간 부풀어서 눈동자를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래서 나이가 좀 들어 보였지만 말끝에 살짝 배어 무는 미소가 지적이고 인상적이었다.

한 번은 Y형이 비구가 되겠다고 절에 들어간 사건이 있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선배였기에 한편으로 놀라기도 했지만, 우리는 '이 형이 드디어 자기 길을 찾았구나' 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듣기로는 따라다니던 여자 후배와 헤어지려는 마음에 그랬다고도 했다. 아무튼 형은 몇 달 버티지 못하고 하산했고 결국 그 형수와 결혼해서 살았다.


나는 Y형에게 시를 배웠다. 이 형의 시 철학은 확고했다. 시는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라고. 나는 그 말이 정확히 뭘 함의하는지 몰랐지만 왠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다. 시를 쓰려면 착해야 한다고. 어떻게 보면 참으로 동양철학에서나 나오는 말이라 할 수 있다. 서양 전통에서는 착하다든지, 엄격해야 한다든지 하는 수행적 언어와 시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일이 드물 것이다. 그러나 동양의 작은 나라 지방 소도시에서 시를 붙잡고 끙끙 앓던 한 청춘이 낸 결론은 바로 그것이었다.

시는 단순할수록 사람을 잡아끈다. 짧은 시를 잘 쓰기는 무척 어렵다. 언젠가 Y형이 토론회에 시를 한 편 들고 왔다. 본인의 시가 아니라 본드 공장에서 일하다가 냄새를 너무 들이마셔서 뇌를 다친 한 선배가 쓴 시였다. 그 시는 낯설고 기발한 표현에 몰두하던 우리가 보기에 맹숭맹숭한 일기 같은 것이었다. Y형은 시를 읽어주더니 여기에 담긴 마음을 한 번씩 생각해보기를 바란다고 했다.

한때 엄청 유명했던 시인이 근황을 묻는 말에 "시는 젊을 때나 쓰는 것 아닌가요"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젊은 시절 이후 우리는 시와 멀어졌지만,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흘러가도 도처에 시로 들어가는 문이 나타난다. 신이 자연을 만들었다면, 시에 그 자연의 일부를 미리 담아놓기라도 한 것처럼 시는 우리를 잡아당기는 끈질긴 힘이 있다.


시는 말이지만 말의 오염으로부터 가장 멀다. 그것은 굳이 진솔하지도 않고 비루한 삶을 슬퍼하지도 않는다. 감정의 오용만큼 시를 남루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시는 그저 생의 진실로 오롯이 선 겨울나무의 가지들이다. 헐벗었지만 군더더기가 없으며, 죽은 것 같지만 날렵하게 가리키는 곳이 있다. 그런 시를 쓴다는 건 마음에 방이 하나 생기는 것이다. 매일 그곳에 들어가 죽음과도 같은 잠을 잘 수 있는.

Y형은 시와 얼마나 멀어졌을까. 그와 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힘겹게 오르막을 오르다 멈춘 우리는 땀을 씻으며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Y형이 말했다. 하늘이 모자이크다. 거기엔 푸릇푸릇한 활엽수 잎들이 하늘 위로 점점이 찍혀 있었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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