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선 HD현대 부회장(가운데)이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에게 HD현대중공업 특수선 야드와 건조 중인 함정을 소개하고 있다. (HD현대 제공) ⓒ News1 최동현 기자 |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 "미국 조선업이 한국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미국 제47대 대통령에 재선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7일 윤석열 대통령에게 '조선 협력'을 첫손으로 요청하면서 국내 조선업계의 기대감이 훌쩍 커졌다. 연간 20조 원 규모의 미국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사업은 물론, 씨가 말랐던 '미 상선 시장' 문이 열릴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7일 대통령실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오전 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이 한국의 도움과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며 "한국의 세계적인 군함·선박 건조 능력을 잘 알고 있으며, 선박 수출뿐 아니라 보수·수리·정비 분야에서도 한국과 긴밀하게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 협력' 요청한 트럼프…'20조' 美 MRO 시장 열린다
차기 미국 대통령이 한국 정상과의 첫 통화에서 '조선 협력'을 가장 먼저 요청하면서 국내 조선업계가 들썩였다. 이미 '특수선 양강'인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지난 8월 미국 함정 MRO 사업 입찰 자격인 함정정비협약(MSRA)을 체결하고 시장에 뛰어든 상황이라 추가 MRO 수주에도 밀물이 들어올 전망이다.
업계는 미국의 함정 MRO 시장 규모가 연간 20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미국은 조선업의 쇠퇴로 함정의 건조보다 퇴역이 더 빠른 실정인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란-이스라엘 전쟁, 중국의 군사력 증강 등 대외적 요인으로 기존 함정의 MRO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이에 카를로스 델 토로 미 해군성 장관이 올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을 번갈아 찾으며 MRO 사업을 논의했다.
HD현대중공업(329180)과 한화오션(042660)은 이미 수년간 미 함정 시장 진출을 위해 공들 들여왔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 2022년 국내 기업 최초로 해외 MRO 사업을 시작했고, 한화오션은 지난 6월 한화시스템과 총 1억 달러를 투자해 미국 필라델피아주 필리조선소 지분 100%를 인수하기로 했다. 필리조선소는 글로벌 MRO 사업 전초기지 역할을 맡을 전망이다.
한화오션은 지난 8월 미 해군이 발주한 함정 MRO 사업을 국내 최초로 수주하며 첫 거래를 텄다. HD현대중공업도 트럼프 2기 체제가 들어서는 내년부터 미 함정 MRO 사업 입찰에 참여할 예정이다. 업계 관계자는 "매년 쏟아지는 미 함정 보수 수요는 현지 조선소로 감당이 불가능한 물량"이라며 "트럼프 당선인이 한국 조선을 콕 짚어 요청한 만큼 (국내 조선소가 수주하는) 물량이 크게 증가할 수 있다"고 했다.
'K-조선 기술력'이 입증된다면 지금은 막혀있는 미 전투함 MRO와 군함 건조 수주도 꿈은 아니다.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지난 6월 공개한 '초국가적 위협 프로젝트' 보고서에서 중국이 운영하는 전함이 234척으로 미 해군의 219척(군수·지원함 제외)을 추월했다고 진단하면서 한국과 미국 등 우방국과의 조선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고 제언한 바 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획득한 MSRA 자격은 현재 미 해군 특수선 중에서도 지원함 MRO에만 한정돼 있다"며 "미 해군의 군함 수요와 국내 조선업의 기술력이 맞물린다면 향후 법 개정을 통해 한국 조선소가 미 해군 전투함까지 MRO 수주를 한다든지, 나아가 함정 건조 계약을 따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했다.
미 해군성 차관을 지낸 세스 크롭시(Seth Cropsey) 요크타운연구소 설립자도 최근 칼럼에서 미 해군력의 급격한 쇠퇴를 지적하면서 "미국은 동맹국의 지원을 받아 조선업을 재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크롭시는 "한국은 중소형 함정을 건조하는 수준 높은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고, 예산 내에 납기를 준수해 함정을 조달할 수 있다"고도 제언했다.
미국 필리 조선소 전경. (한화오션 제공) 2024.8.27/뉴스1 |
'발주 제로' 美 상선 시장도 기대…"LNG선 수요 100척 이상"
트럼프 당선인이 미국 제조업 활성화를 위한 '화석 연료 중심 에너지 정책'의 추진을 예고한 점도 호재다. 화석 연료와 친환경 에너지의 중간 단계인 '브릿지 에너지'인 액화천연가스(LNG) 및 액화석유가스(LPG) 수요와 수출이 크게 증가할 전망인데, 슈퍼사이클(초호황기)에 올라탄 국내 조선업계로선 그간 건조 발주가 '제로'(0) 였던 미국으로부터 고부가가치 선종인 LNG선 수주를 따낼 기회다.
고부가선종인 LNG·LPG 운반선은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한국이 '싹쓸이'를 하는 대표 선종이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1분기 기준 전 세계에서 발주된 LNG운반선은 29척, 암모니아 운반선은 20척이다. 이들 물량은 전부 국내 조선 3사가 수주했다. 국내 조선업계는 아예 고부가선종 중심의 '선별 수주' 전략을 펴고 있다.
클락슨리서치의 지난 9월 보고서를 보면 미국의 LNG·LPG 내년 수출량은 각각 102만 톤, 65만 톤에 달할 전망이다. 특히 현재 미국에서 2028년까지 허가 승인이 필요한 LNG 프로젝트는 6800만 톤에 육박한다. 업계에선 트럼프 행정부가 LNG 프로젝트 개발을 재개할 경우 100척 이상의 LNG선 신규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은 제조업 기반이 붕괴하면서 조선소도 크게 쇠락한 상황"이라며 "글로벌 조선 시장에서 LNG·LPG선 건조를 국내 업계가 이미 잡고 있는 데다 미국이 중국에 사업을 맡길 가능성도 없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고부가선인 LNG·LPG선을 미국으로부터 발주받게 된다면 사실상 신규 시장을 뚫는 것"이라고 말했다.
dongchoi8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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