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반도체 업계 위기와 맞물려 한국 첨단산업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 노동시장 유연화가 시급하다는 주장이 힘을 받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처럼 근로 유연성을 보장해 우수 인재들이 몰두하고 일하되 그에 맞는 충분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일률적인 근로시간 제도가 R&D 생산성과 의욕을 저하한다는 우려가 있다”며 “차세대 반도체 기술 확보의 필요조건인 R&D에 올인하기 위해서는 인재들이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근로 환경 조성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생산직과 달리 근로시간보다 성과가 중요한 직무는 규제를 완화해 줘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 지속성장이니셔티브(SGI)는 지난 8월 ‘수출기업의 노동생산성 둔화 원인과 시사점’ 보고서에서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신속하게 대응하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유연한 인력 운용이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노동법제의 고용친화적 정비 ▶근로시간 획일적인 규제 개선 ▶직무·성과 중심으로 임금체계 개편 등을 제언했다.
엄상민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현행 근로시간 제도는 장시간 근로를 줄이기 위해 도입한 건데 다양한 형태의 근로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제약이 될 수도 있다”며 “필요한 부문에 유연한 적용을 하되, 일한 만큼 보상하고 건강권 등을 보호할 추가 조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업은 시간과의 싸움인데 52시간제는 위험하다”며 “우리가 경쟁하는 미국과 대만, 우리를 추격하는 중국엔 이런 제한이 없고 일을 많이 하면 보상한다. 52시간제를 몇 년간 유예하든, 관리 단위를 1년 단위로 하든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는 시간 싸움, 52시간제 개선 필요”
현행 근로기준법은 일주일간 법정 근로시간 40시간과 연장근로시간 12시간을 더해 최대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제한한다. 정부에 특별연장근로를 인가받으면 1년에 90일까지 12시간을 추가로 연장할 수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반도체(DS) 부문 연구개발직 등에 한해 필요한 시기에 64시간 특별연장근로를 시행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그러나 이 제도에 대해 “회사가 필요하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엄격한 조건하에서 직원들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며 “절실한 상황에 제한적으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김영희 디자이너 |
미국은 주 40시간 법정 근로시간을 운영 중이지만, 연장근로시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일주일에 40시간을 넘겨 일할 경우 추가근로시간에 대해 정규 임금의 최소 1.5배를 지급한다. 블룸버그통신은 지난 8월 글로벌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 전현직 직원 10명을 인터뷰해 이들이 종종 주말을 포함해 매일 오전 1~2시까지 일하는 등 고강도 업무 환경 속에서도 주식 등 금전적 보상 때문에 이를 감내하고 있으며 이직률이 업계 평균보다 낮다고 보도했다.
업계는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 제도를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업무 성과를 평가하는 게 부적합한 전문직·관리직·고소득자에게는 근로시간 규율을 적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처럼 고소득자에 대한 초과근무 수당을 효율화할 수 있다면 근로자 간 임금 격차를 줄이고 기업 인건비 부담을 낮춰 추가 채용과 근로조건 개선 등의 여력도 증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은 주당 법정 근무시간을 40시간으로 하고 이 외 연장근로에 대해선 360시간(대기업 기준)으로 정하고 있다. 미국과 비슷한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를 둬 R&D 등에 종사하는 근로자 가운데 고소득자는 근로시간 등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
일각 “야근만 늘고 보상 없을 수도” 우려
국회에서는 반도체특별법에 반도체 R&D 인력 등을 근로시간 규제에서 제외하는 조항을 두자는 목소리가 있다. 삼성전자 사장 출신인 고동진 국민의힘 의원은 근로시간 등 예외 규정을 명시한 근로기준법 제63조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주 52시간 적용을 받지 않는다며 반도체·디스플레이·바이오·2차전지 등 첨단전략산업 업무를 추가하자고 주장한다.
다만 이런 움직임에 현장에서는 회의적 반응도 나온다. 반도체 업계에 종사하는 40대 A씨는 “시간을 늘려 일한다고 창의성과 생산성이 꼭 올라가는 건 아니다”며 “회사가 보상은 제대로 하지 않고 야근만 합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업계 관계자는 “근로시간의 유연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지만, 임직원이 필요성을 공감하고 흔쾌히 동의하는지가 중요하다”며 “사회적 공감대도 풀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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