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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의 책과 미래] 작은 환대, 별것 아니지만 도움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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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는 단편소설로 이름 높다. 그의 단편은 인생에 깊은 깨달음을 주는 극적 반전이 특징이다. 대표적 소설집 '대성당'(문학동네 펴냄)에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이란 작품이 있다. 단편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이 작품은 여덟 살 생일을 맞은 아이 스코티가 등굣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시작된다. 운전자는 뺑소니를 치고 아이는 의식을 잃는다.

소설은 아이가 깨어나길 기다리는 부모 이야기를 다룬다. 어머니 앤은 생일 기념 케이크를 주문했으나 경황 속에 그 사실을 잊었다. 아버지 하워드가 잠시 집에 들르자 빵집 주인이 케이크를 찾아가라고 전화한다. 앤이 집에 들렀을 때도 전화가 온다. 그러나 아이 걱정 탓에 둘은 케이크를 아예 떠올리지도 못한다. 케이크는 희망의 증거이자 기쁨의 상징이다. 그러나 비극은 갑자기 다가와 삶에서 그것을 송두리째 도려낸다.

기대대로 이루어지는 삶은 없다. "한 사람을 꺾어버리고 내팽개치는 어떤 힘 같은 게 이 세상엔 존재한다." 그러나 어린 스코티가 그 작디작은 달콤함조차 누리지 못하는 건 세계의 끔찍한 부조리를 보여준다. 예약된 축복의 완연한 상실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든다. 닥쳐온 비극은 순탄한 하워드 삶을 망치고, 앤의 행복한 삶을 어그러뜨린다.

탄생의 기쁨이 죽음의 공포로 바뀐 시간 속에서 사건이 흘러간다. 소년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앤과 하워드는 마음을 졸이며 기도한다. 기다림이란 무엇인가. 미래의 시간을 희망의 기호로 바꾸어 읽으려는 인간의 안간힘이다. 그러나 세계는 가혹할 만큼 무정하다. 인간의 기다림 따윈 상관없이, 스코티는 세상을 떠난다. 기다림이 무력함으로 바뀔 때 인간은 고통과 좌절에 빠져든다. 그 순간 다시 전화가 온다.

앤과 하워드는 자신들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는 주인 처사에 분노해 가게로 쳐들어간다. 빵집 주인은 두 사람 항의를 가만히 들어준 후 권한다. "갓 만든 따뜻한 빵을 좀 드시지요. 이럴 땐 뭘 좀 먹는 일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그런 다음 세 사람은 빵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창으로 희미한 햇살이 높게 비칠 때까지."

이것이 구원이다. 타자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고, 그들에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 되는 작은 친절을 베풀며 애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이야기하는 동안 앤과 하워드는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전적인 슬픔에서 놓여난다. 경청과 환대는 절망의 밤을 햇살이 높게 비치는 아침으로 만든다. 지금 세계엔 우리의 별것 아니지만 도움 되는 행위가 필요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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