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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레터] 느긋한 충청어

조선일보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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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베드로가 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까요?”

충청도의 한 교회. 전도사의 질문을 받은 학생이 이렇게 답했답니다. “의사 표현 확실히 할라구 한 거 아녀유. 세 번은 말혀야지, 세 번은 물어줘야 되는 것이고.”

청주 출신 소설가 나연만이 ‘충청의 말들’(유유)에 적은 어린 시절 에피소드를 읽다가 웃음을 참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대답을 들은 전도사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타지에서 오신 전도사님은 잘 몰랐다. 아닌 게 아니라, 충청도인에게는 적어도 세 번은 물어봐야 의중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건 학계 정설이다.”

‘충청의 말들’은 유유출판사가 각 지역 토박이말을 통해 우리 언어 문화의 다양성을 살피는 걸 목표로 기획한 시리즈인 ‘사투리의 말들’ 중 한 권. 부제가 ‘그릏게 바쁘믄 어제 오지 그랬슈’네요. 특유의 느긋한 말투와 화법이 빚어내는 충청도 사투리의 ‘감칠맛’을 영화 대사, 문학 작품 속 대화 등을 바탕으로 풀어냅니다.

한용운 시인의 대표작 ‘님의 침묵’은 사실 시인의 고향인 충남 홍성 방언으로 쓰였답니다. 그러나 이후 시의 표현을 현대 맞춤법에 맞게 고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아주 단정한 서울말로 쓰인 시’가 되었다네요. 한국인이면 다 아는 시의 핵심 구절 원문은 이렇습니다. “날카로은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너노코 뒷거름처서 사러젓슴니다.” ‘사러졌다’는 말은 ‘사라지다’의 홍성 방언이라고요.

“출격!” “이런 걸 탈 수 있을 리 없어요!” “탈 거면 빨리 타라.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 이는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대사. 영화 대사를 충청어로 번역(?)해보는 습관이 있다는 저자는 이렇게 옮겨봅니다. “어여 가 봐.” “되것슈?” “내비둬 그럼, 총알받이루나 쓰게.” 절체절명의 순간도 충청어를 적용하면 정말 느긋해지지 않나요? 한 템포 쉬어가며 느긋한 주말 보내시길 빕니다. 곽아람 Books 팀장

[곽아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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