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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철강 ‘선박 후판 전쟁’, 올해에 유독 치열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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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방산업의 부진과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침공으로 철강업계는 고전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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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을 만들 때 사용하는 두꺼운 철판, 후판(厚板) 가격을 두고 조선업계와 철강업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다. 조선업계와 철강업계는 1년에 두 번 후판 가격 협상을 한다. 2024년에는 이례적으로 가격 협상에 난항을 겪었고 상반기 협상이 기한을 넘겨 7월 말이 돼서야 소폭 인상하는 쪽으로 마무리가 됐다. 하반기 후판 가격 협상도 2024년 안에 마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조선사 입장에서 후판은 원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이른다. 1t당 90만원 내외인 후판 가격이 10만원 내려가면 약 4천억원의 원가 절감 효과가 있다. 철강사 입장에서도 후판 가격은 물러서기 힘든 주제다. 전체 매출에서 후판이 차지하는 비중은 15%나 된다. 전체 후판 생산의 80%를 조선이 사용하기 때문에 조선사와의 협상이 너무나 중요하다.





철강업계는 힘든데…





경기 상황만 보면 후판 가격은 내리는 게 맞다. 글로벌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철강의 주요 원료인 철광석, 석탄 가격은 하락하고 있다. 수요가 줄면 가격은 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2024년 유독 가격 협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우선, 철강업계가 힘들다. 포스코홀딩스의 2024년 2분기 영업이익은 7520억원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43% 감소했다. 현대제철의 2분기 영업이익은 79% 급감했다. 철강업의 주요 수요처는 건설, 자동차, 조선 등이다. 건설업은 상황이 좋지 않다. 건설산업연구원이 집계하는 8월 건설기업 경기실사지수는 전월 대비 3포인트 하락한 69.2를 기록했다. 100을 밑돌면 건설 경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기업이 많다는 의미인데, 69.2는 100을 한참 밑도는 수치다. 자동차 산업도 안 좋다. 상반기 자동차 판매량은 67만 대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1% 감소했다.



전방산업의 고전보다 철강업계를 힘들게 하는 건 중국산 저가 철강재의 침공이다. 중국은 전세계 철강의 절반 이상을 생산한다. 보통은 중국 내수 시장에서 상당 부분 소화되는데, 중국 경기가 부진하다보니 어마어마한 규모의 철강재가 해외로 수출되고 있다. 중국 자문업체 마이스틸은 2024년 중국 철강 수출량이 1억t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2016년 이후 8년 만에 최대 규모가 될 전망이며, 2020년 5천만t에 비해 두 배나 많다.



중국산 철강, 특히 중국산 저가 후판이 국내로 대거 유입되고 있다. 2021년 31만2천t 수준이던 중국산 후판 수입은 2023년 112만t으로 늘었다. 중국산 후판 가격은 국산보다 1t당 10만~20만원 저렴하다. 조선업계 입장에서는 국내 철강사가 생산하는 후판 말고도 매력적인 선택지가 있는 셈이다. 중국산 후판의 공세가 거세다보니 급기야 현대제철은 중국 업체의 저가 후판 수출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정부에 반덤핑 제소를 했다.



조선업은 상황이 좋다. HD한국조선해양은 2024년 총 122척을 수주했다. 연간 수주 목표가 135억달러인데, 목표의 96%에 이르는 129억5천만달러를 이미 달성했다. 삼성중공업은 2분기 1307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영업이익이 1천억원을 넘어선 건 10년 만에 처음이다.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신조선가 지수는 187.78로 2024년에 최고점을 경신했다. 역대 최대 호황기였던 2008년 9월의 191에 근접했다. 수주 물량도 많고 선박 가격도 오르고 조선업은 상황이 좋다. 조선사마다 3~4년치 일감을 일찌감치 확보하고 수익성 좋은 발주만 선별적으로 수주한다. 지금 주문하면 2028년은 돼야 배를 인도받을 수 있을 정도다.





조선업은 훨훨 날고





이런 가운데 중국산 후판이 낮은 가격에 유입되니 더할 나위 없이 좋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중국산 철강재의 투입 비중을 기존 20%에서 25% 이상으로 늘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후판 가격 협상의 칼자루는 조선업계가 쥐고 있다.



전반적으로 경기가 좋지 않은데 유독 조선업만 호황이니 철강업체 입장에서는 협상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여유가 있는 조선사들이 양보를 좀 해줬으면 좋을 텐데’ 하는 은근한 감정싸움도 읽힌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하반기, 철강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 펼쳐졌다. 중국과 오스트레일리아(호주)가 무역 갈등을 빚으며 전세계적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다. 또한 중국 정부는 탄소 배출 감축을 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많은 철강 생산을 통제했다. 중국 내부에서도 철강 공급이 부족하다보니 세금을 매겨 수출을 제한해야 할 정도였다.



국내 철강사들은 생산에 문제가 없는데 가격이 급등하니 대호황을 맞았다. 2021년 포스코는 연간 9조2천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다. 전년보다 무려 283% 증가했고, 역대 최고 수준이었다. 현대제철도 영업이익 2조4475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조선사들은 후판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조선사들은 코로나19로 전세계적인 불황이 닥칠 것을 염려해 가격을 불문하고 주문을 받았다. 수익성이 좋은 주문은 아니지만 일감이 없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후판 가격마저 오르니 조선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조선사는 수주할 때 선박 가격을 확정한다. 원자재 가격이 올라도 배 값을 올려달라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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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 물량도 많고 선박 가격도 오르는데다 중국산 저가 후판 선택지까지 있어 조선업은 철강업계와의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에 있다. 조선업 불황 등으로 2017년 7월 군산조선소가 가동을 중단한 지 5년여 만인 2022년 10월 재가동을 준비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주 계약에 따라 배를 만들긴 해야 하는데, 후판 가격이 오르니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를 봤다. 2021년 HD한국조선해양은 1조3848억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삼성중공업은 2571억원, 한화오션은 1조7547억원의 적자를 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철강회사들은 사상 최고의 이익을 내고 조선사는 적자에 허덕이고 있을 때 철강사가 후판 가격을 깎아준 적도 없지 않냐”고 말했다.



철강업과 조선업은 오랜 공생관계다. 1970년대 포항제철(포스코)은 종합제철소를 완공하기 전에 현대중공업이 수주한 선박을 생산할 수 있도록 후판 공장부터 만들어 제품을 공급했다. 2000년대 들어 한국 조선업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로 도약했다. 늘어난 수주를 소화하려면 많은 후판이 필요했다. 철강사들은 조선사들이 선박을 제작하는 데 차질을 빚지 않도록 대규모 투자를 통해 공장을 증설하고 양질의 후판을 공급했다. 긴밀한 협업은 조선, 후판 산업 모두 세계 1위로 도약하는 자양분이 됐다.



힘든 시기도 함께 견뎌냈다. 2010년대 이후 글로벌 조선업은 장기 불황을 겪었고, 후판 수요도 급감했다. 이런 조선사에 중국산 저가 후판은 꽤나 매력적인 선택지였다. 한국 철강사들은 저가 중국산에 대응하기 위해 ‘수입 대응 제품’을 출시했고, 조선사들은 기꺼이 국산 제품을 선택해줬다.





단기적 문제인가, 구조적 문제인가





현재 상황을 단기적 문제로 보는지, 구조적 문제로 보는지에 따라 대응 방법이 달라진다. 단기적 문제라면 조선과 철강 기업들이 협상을 통해 대응할 수 있다. 철강업계는 현재 중국 철강사들이 원가 이하로 밀어내기를 하는 덤핑 상황으로 판단하고 조선업계를 설득한다. 이전에도 단기적으로 중국 철강회사들이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가격을 올리는 일이 반복됐다는 것이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중국산이 싸다고 계속 쓰다가 국내 후판 산업이 붕괴되면 나중에 중국 철강회사들이 가격을 올릴 때 대응할 수 없다”며 “이럴 때일수록 상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적 문제라면 정부 차원의 대응도 필요하다. 중국산 저가 후판 유입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칠레 철강업체 CAP(Compania de Acero del Pacifico)그룹은 우아치파토 제철소를 폐쇄하기로 했다. 칠레 정부는 제철소 폐쇄를 막기 위해 최고 33.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는데, CAP그룹은 관세를 부과해도 중국산 철강에 비해 가격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해 폐쇄를 강행했다. 이에 수천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미국은 멕시코를 거쳐 우회 수입되는 중국산 철강에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인도 철강부는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철강 수입관세를 현재 7.5%에서 10~12%로 인상해줄 것을 요청했다. 친중 노선을 걷는 브라질조차 일정 규모(쿼터) 이상의 중국산 철강에 대해 25%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유럽연합, 캐나다, 베트남 등도 중국산 철강에 관세를 부과하거나 부과를 검토하고 있다.



중국의 덤핑으로 인해 후판 산업이 엘시디(LCD), 태양광 패널처럼 아예 중국에 잠식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산업은 한번 붕괴되면 다시 생겨나기 힘들다. 2024년 후판 가격을 둘러싼 조선업과 철강업의 갈등을 연례행사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권순우 삼프로TV 취재팀장 soon@3prot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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