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그것이 알고 싶다' 갈무리) |
(서울=뉴스1) 신초롱 기자 = 2008년 9월 10일 오전 7시 50분쯤 인천 남동구 만수동의 만월산 8부 능선에서 50대 주부 남 모 씨가 쓰러진 채 발견됐다. 여러 차례 흉기에 찔려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최초 신고자는 부부 등산객이었다. 부부는 밤새 내린 이슬비로 축축하게 젖은 등산로를 따라 걷고 있었다. 산 중턱쯤 올랐을 때 여성의 비명을 들은 부부는 얼마 뒤 급하게 산에서 내려오는 한 중년 남성과 마주쳤다.
부부 진술에 따르면 남성은 흰색 천이 둘둘 말린 약 30㎝ 정도 되는 가느다란 막대 같은 물건을 쥐고 있었다. 부부와 마주친 남성은 미소를 머금은 채 등산로가 아닌 다른 산길로 사라졌다.
◇유일한 증거 '장미' 담배…경찰, 1054명 DNA 수집 후 일일이 대조 수사
등산로 입구를 비추는 CCTV에는 남 씨가 이날 오전 7시쯤 만월산에 올라가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영상에는 그가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발견됐을 당시에는 가방과 휴대전화가 모두 사라졌었다.
경찰은 남 씨가 혼자 산을 오르다 강도를 만나서 소지품을 빼앗기고 흉기에 찔려 살해당한 것으로 봤다. 이에 당일 만월산을 찾은 등산객들을 용의선상에 올렸다.
하지만 만월산은 만수동, 간석동, 부평동과 인접해 있는 데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등산로도 10개였다. 주민들이 오가는 샛길까지 포함하면 입구는 수십 개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등산객 모두를 파악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현장에서 발견된 유일한 증거는 '장미'라는 담배 브랜드의 꽁초 2개뿐이었다. 목격자는 없었다. 담배꽁초에서는 피해자의 타액과 신원미상의 남성 타액이 검출됐다.
피해자 가족의 증언에 따르면 남 씨는 흡연자이긴 하지만 해당 브랜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는 용의자일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경찰은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나눠 피웠다고 보고 면식 관계일 수도 있다고 판단, 주변 인물들의 DNA를 일일이 대조하며 추적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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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 조사 대상자는 1054명이었다. 단일 수사로 DNA를 최다 수집한 이례적인 수사였지만 일치자는 없었다.
◇빈집 털다 구속된 50대 권 씨와 DNA 일치 정보 입수…사건 발생 4년 만
사건 발생 17일이 지난 9월 27일 한 통의 제보가 들어왔다. 범행 현장에서 약 500m 떨어진 만월산 터널 옆 배수로에서 칼끝이 부러진 다이어리 캘린더 속지에 둘둘 말려 노란색 테이프로 고정된 칼집과 과도가 발견됐다.
과도에서는 소량의 혈흔까지 검출됐다. 하지만 DNA를 검출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어서 직접 증거가 되진 못했다. 범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증거들이 발견됐음에도 수사는 4년째 해결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12년 9월, 전주에서 빈집 털이를 하다 구속된 50대 권 모 씨의 DNA가 만월산 살인 현장에 남은 담배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한다는 정보가 입수됐다.
권 씨는 특수강도, 강간, 빈집 털이를 비롯해 친딸 성폭행 등 전과 8범이었다. 그에게는 과거 여성 등산객을 강간한 전과도 있었다. 사건이 벌어진 해에는 인천 도화동에 거주하며 일용직으로 근무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권 씨는 범행을 완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강도는 해도 내가 사람 죽일 그런 위인은 못 된다. 그럴 배짱도 없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검출된 DNA를 증거로 제시했음에도 증거가 조작된 것 아니냐며 반박했다. 급기야 사건 발생 당일 인천이 아닌 천안에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대기도 했다.
경찰은 인천에 연고가 있는 권 씨 딸과 친형을 만났다. 딸은 경찰 조사에서 "우리 아버지는 짐승"이라고 말했다. 친아빠에게 성폭행당한 조카를 15년간 돌봤던 권 씨의 친형도 "친동생이지만 나쁜 놈"이라고 진술했다.
두 사람의 진술은 권 씨를 더욱 범인으로 확신하게 했다. 하지만 국과수는 발견된 과도가 여성을 살해한 범행 도구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결과를 내놨다. 부검 결과 피해자의 몸에서 과도가 부러질 만한 상처가 없었다는 게 이유였다.
수사팀은 발견된 증거들을 다시 뒤졌고 탐문을 추가로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사건 전날 권 씨가 고등학생 딸과 다툰 후 다음 날 가출한 딸을 찾아 나섰고, 당시 딸의 다이어리를 갖고 나갔다는 행적을 입수했다.
이후 권 씨의 딸은 경찰이 현장에서 찾은 칼집 종이를 펼쳐 보이자 자신의 다이어리 속지가 맞다고 답했다. 다이어리는 학원에서 나눠준 것이어서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직접 증거 없이 정황 증거만으로 유죄 판결…1심 뒤집고 징역 20년 확정
사건은 검찰로 넘겨졌고, 검찰은 권 씨가 등산로에서 금품을 노리고 피해자를 살해한 것으로 보고 강도살인죄로 기소했다.
2014년 진행된 1심 재판에서 권 씨에게 무죄가 내려졌다. 국과수 분석 결과를 비롯해 권 씨의 타액이 묻은 담배꽁초가 범행과는 무관하게 현장에 떨어져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또 딸의 진술이 증거 능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등산객 부부가 마주했던 범인으로 의심되는 남성의 사진을 보고 이보다 살집이 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답한 것도 판결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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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수사팀은 더욱 객관적인 증거를 찾아 나섰다. 사건 일주일 전부터 당일까지 이슬비가 내려 등산로가 다 젖어 있던 것과 달리 현장에서 발견된 담배꽁초가 물기 없이 마른 상태였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담배꽁초는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 버려졌을 것이라 분석했다.
또 딸의 다이어리에서 12월 속지가 찢겨 나간 것을 확인한 수사팀은 칼집으로 사용된 다이어리 속지가 12월이었다는 점 등을 증거로 제시했다.
딸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의심되는 과도에 대해 "원래 우리 집에서 쓰던 건데 예전부터 끝이 부러져 있었다"라며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동네의 한 마트 관계자로부터 권 씨가 평소 장미 담배를 즐겨 피웠다는 증언까지 확보한 수사팀은 권 씨를 압박해 자백을 끌어냈다.
2014년 9월 진행된 항소심 재판부는 범인이 현장에서 피해자와 함께 담배를 피웠다고 보고 수집된 증거를 모두 인정, 1심 판결을 뒤엎고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2015년 2월 대법원은 권 씨에게 징역 20년을 확정했다.
rong@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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