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지난 글에서, 히틀러의 나치당은 '유대인=볼셰비키'와 '유대인=배신자' 프레임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렸다고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진 것을 유대인 탓으로 선전하면서 반유대 감정을 자극했다. 유대인은 유럽 백인들에게 1000년 넘게 미운 털이 박혔기에 희생양으로 삼기는 어렵지 않았다. 나치당의 그런 전략은 1932년 총선거 승리와 1933년 히틀러가 총리에 오르는 데 큰 몫을 했다. 여기에 덧붙여 중요한 사실 하나. 나치당의 지지율을 극적으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끌어 올렸던 것은 지구촌을 휩쓴 대공황이었다.
히틀러를 살린 경제위기
1929년 세계대공황은 많은 어두운 이야기들을 남겼다. 뉴욕 증시가 붕괴되자 절망한 투자자들은 월가의 고층 빌딩에서 창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승전국들이 (특히 프랑스가 악착같이) 강요한 전쟁배상금을 갚느라 독일(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독일은 총 1320억 마르크(310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받았다. 당장은 1921년부터 해마다 40억 마르크씩 500억 마르크(125억 달러)를 내놓아야 했다. 패전국 독일의 경제규모에 비춰 엄청난 부담이었다.
국제사회에서도 가혹하다는 지적들이 나왔다. 영국 경제학자 존 케인즈는 지나친 배상금을 요구하는 전승국의 탐욕을 가리켜 '독일 경제를 파괴할 카르타고의 평화'라고 비판했다(기원전 146년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 끝에 로마제국은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성벽과 주거지를 허물거나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고, 경작지에 소금을 뿌려 카르타고를 지도에서 사라지게 했다). 1923년 독일이 경제난으로 배상금을 제대로 못 내자 프랑스는 루르 공업지대를 2년 넘게 점령하기도 했다(1932년까지 독일은 배상금으로 210억 마르크를 내놓았지만, 히틀러 집권 뒤 더 이상의 배상금 지불은 없었다).
1932년 1/4분기 독일의 실업률은 39.4%에 이르렀다. 실제 실업률은 이보다 더 높았다. 실업수당을 받으려면 노동사무소와 시청 복지과에 지원금 신청서를 낸 다음, 수령 자격을 확인 받으려고 줄을 서야 했다. 위의 실업률은 몇 시간씩 줄을 섰던 신청자들을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긴 줄에 서서 처량하게 기다리는 게 내키지 않았던 사람들은 실업률 통계에서 빠졌다. 이렇듯 대공황과 전쟁배상금 지불의 충격은 전체 독일인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소한의 소득'마저 앗아갔다(김학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 오인석 편 <바이마르 공화국>, 삼지원, 2002, 177-178쪽 참조).
히틀러의 나치당은 "전쟁배상금 지불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지지율을 높였다. 경제 재건을 통한 일자리도 약속했다. 대공황에 따른 독일 경제위기는 히틀러에게 권력을 잡을 기회로 다가왔다. 대공황이 오기 전 나치당의 선거 득표율은 꾸준히 오르긴 했지만 그리 높지 않았다. 경제위기를 거치며 급상승했다. 1930년 선거에서 거의 20%, 1932년 초 선거에선 30%를 넘기더니 그해 7월 선거에선 거의 40%에 가까운 37.3%의 득표율로 의석 230석을 차지했다(제2당인 사회민주당 21.6%, 제3당인 독일공산당 14.3%). 영국 역사가 폴 존슨은 "대공황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나치가 정권을 잡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대공황으로) 독일은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보다 심한 타격을 받았다. 유례없이 높은 실업률에 양국(독일과 미국) 유권자는 정부와 집권당을 맹비난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에, 독일에는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에 화살이 돌아갔다. 1932년 11월에 이틀 간격으로 양국에서 총선거가 있었다. 선거는 미국과 독일의 정치변혁을 불러왔다. 11월6일 독일 유권자의 33.1%가 나치당에 투표했다. 11월 8일 미 대통령 선거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압승했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810쪽).
미국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공화당을 지지해왔었다. 하지만 대공황 충격 뒤인 1932년 선거에선 미 유대인의 85~90%가 민주당에 표를 던졌다. 1932년의 미 선거 결과를 듣고 히틀러는 루스벨트를 유대인과 한 패거리로 여겼다고 한다.
▲ 패전 뒤 독일은 경제난에 시달렸다. 1918년 무료 급식소 앞에 줄을 선 하노버 도시빈민들. ⓒ위키미디어 |
"유대인이 먼저고 독일인은 그 다음"
1929년 대공황이 터지기 전에도 독일은 실업문제가 심각했다. 대공황은 가뜩이나 어려운 독일 경제를 비틀거리게 만들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심각해지면 사람들의 마음은 각박해지기 마련이다. '나와는 다른' 타자, 소수자에 대한 괴롭힘과 폭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20세기 전반기 독일이 그랬다. 그곳에서의 소수자는 유대인이었다. "지금 독일의 형편이 안 좋은 것은 유대인 탓"이라는 히틀러의 선전은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이었다. 생활고로 힘든 하루를 보내던 독일의 보통사람들에게 쉽게 먹혀들어갔다. 히틀러의 독설을 들어보자.
[전쟁이 터졌을 때, 그리고 전쟁 중에도 우리 최량의 독일 노동자 수십만이 전쟁터에서 당했던 것과 같이 이들 1만 2,000이나 1만 5,000의 헤브라이인(유대인) 파괴자들이 한 번 독가스 속에 집어던져지게 되었더라면, 전선에서 수백만의 희생이 헛된 것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더욱이 이들 1만 2,000의 깡패들이 적당한 시기에 처치되고 말았더라면, 아마도 100만의 귀중한 독일인의 희생이 구제되었을지도 모른다](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동서문화사, 2020, 821쪽).
히틀러가 말하는 1만2000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죽은 유대인 숫자와 같다. '나의 조국은 독일'이라 여기고 싸우다 죽은 유대인 참전자들의 혼령이 히틀러의 독설을 듣는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분노와 더불어 허탈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10만 명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애국심을 증명함으로써 독일 보통사람들로부터 유대인이 '우리와 다른 타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히틀러를 비롯한 많은 독일인들은 유대인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유대인들은 충성심을 가졌다 해도 이중적이다. 유대인이 먼저고 독일인은 그 다음"이라는 식이었다.
독일 인구 1% 유대인의 영향력
<나의 투쟁>(1925)에는 유대인을 겨냥한 온갖 독설과 저주가 담겨있다. 히틀러가 이런저런 정치행사에서 연설할 때마다 빠짐없이 유대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총리로 권력을 잡은 뒤 잇달아 쏟아낸 인종차별주의 악법들을 보면서, 해외 이주를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 악법들의 목록은 길다. △유대인 관료들을 내쫓으려는 '공무원 복권법'(1933년 4월), △교육기관에서 유대인의 비율을 제한하려는 '독일 학교와 대학교의 만원 방지법'(1933년 4월), △언론계에서 유대인을 쫓아내려는 '편집인법'(1933년 10월) △유대인의 국방 의무 제외(1935년 5월), △이른바 '뉘른베르크법(1935년 9월)'으로 알려진 두 개의 법령, 즉 유대인의 시민권을 제한해 2등 시민으로 만드는 '제국시민법'과 유대인이 비유대인(아리안)과 결혼을 못하도록 한 '독일 피와 독일명예 수호법' 등이다. 1933년부터 1935년 사이만 살펴본 것이 이 정도이고, 갈수록 더욱 가혹한 법령들이 잇달아 나왔다.
히틀러가 잇달아 내는 반유대 법령들로 말미암아 독일 유대인들은 불이익과 더불어 '2등 시민'이란 수모를 겪어야 했다(오늘날 이스라엘 시민권을 지닌 200만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2등 시민' 차별을 받는 것과 닮았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이 독일을 떠나기가 어려웠다. 여러 세대에 걸쳐 독일에서 애써 쌓아올린 경력과 재산을 생각하면, 하루아침에 떠나기란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은 유대인의 판단을 헷갈리게 하는 느슨한 유화정책들을 펴기도 했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유대계 백화점에 대한 금융지원과 베를린 올림픽 무렵이 그랬다.
두 명의 유대 역사학자(이스마 엘보겐, 엘레오노레 슈텔링)이 쓴 책(Die Geschichte der Juden in Deutschland, 1996)에 따르면, 1925년 독일인 약 6,600만 가운데 유대인은 56만 4,379명이었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 독일에는 49만 9,682명의 '유대 신앙인'이 있었다(이스마 엘보겐, 엘레오노레 슈텔링, <독일 유대인의 역사: 로마제국에서 20세기 홀로코스트까지>, 새물결, 2007, 309쪽과 342쪽).
유대인 통계는 그 조사 시기와 방법의 차이(누구를 유대인으로 규정할 것인가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잡힌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이 운용하는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은 1933년의 독일 유대인을 52만(독일 시민권을 지닌 유대인 40만, 나머지는 동유럽 이민자)으로 추산했다. 미 유대인협의회 연감(The American Jewish Yearbook)에 따르면, 1933년의 독일 유대인 숫자를 56만으로 잡았다.
통계상의 작은 차이에도 분명한 사실은 독일 유대인이 독일 전체 인구 가운데 1%도 안 되는 소수자였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독일 사회 안에서 유대인이 갖는 영향력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변호사․대학교수․의사를 비롯한 전문직의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았다(1933년 통계로는 의사 가운데 유대인 비율 11%, 변호사 16%). 금융업과 유통(백화점) 분야에서도 유대인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소득에서 큰 차이가 났다. 독일 보통사람들에 견주어 유대인의 소득은 3~4배에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독일인들이 "우린 이렇게 어렵게 고생하며 살고 있는데 저놈들은 잘 먹고 잘 산다"는 생각을 품었다. "정치인이 표를 많이 얻으려면 유대인을 욕하면 된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히틀러의 나치당의 득표 전략이 바로 그랬다.
▲ 1923년 독일이 배상금을 제대로 내질 않자 프랑스군은 루르 지역을 점령했다. 철강과 석탄 산업도시인 에센을 순찰중인 프랑스 기마병들. ⓒ위키미디어 |
동유럽 유대인 동족을 보는 찬 눈길
독일의 모든 유대인이 잘 살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역사적으로 숙주(宿主) 민족(다시 말해서, 다수 원주민)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라 낮춰 불렀고, 많은 독일인들은 히틀러의 그런 인종차별적 독설에 머리를 끄덕였다. 제1차 세계대전 뒤 '유대인은 기생충'이라 흉을 볼만한 현상이 하나 더 보태졌다. 홀로코스트 연구자인 로버트 위스트리치(헤브루대, 근대유럽사)의 글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1920년대 초 베를린에는 가난한 폴란드 유대인 난민들이 몰려들었다. 독일인들에게는 또 다른 골칫거리였다. 이들 동유럽 유대인 중에는 실업자들이 많았다. 게다가 이들은 문화적으로도 이질적인 국외자였고, 따라서 외국인을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생충'이라는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적당한 표적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이들은 유대인 전체 인구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로버트 위스트리치,<히틀러와 홀로코스트>,을유문화사,2004,67쪽).
폴란드 유대인 난민뿐 아니라 러시아 유대인 난민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동유럽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독일 본토 유대인들의 눈길은 어땠을까. 동정심으로 연민의 눈길을 보낸 사람들보다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한 마디로 싸늘했다. 독일 사회에 어느 정도 동화돼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던 유대인들은 가난한 동유럽 이주민들 때문에 자신들의 삶이 위협받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아울러 이들은 패전 뒤 다시 고개를 치솟기 시작한 독일의 반유대주의가 동유럽 유대인 이주민들을 겨냥한 것이라 애써 믿고 싶어 했다. 나치 정권이 들어선 1933년부터 1940년대 아우슈비츠까지 비극적 결말로 이어졌던 흐름(차별과 분리-추방과 집단수용-처형)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들은 독일 유대인들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드러낸다.
같이 베토벤 음악을 들어도 그때뿐
기업인이나 의사, 변호사 등 독일 사회에서 중상층으로 자리 잡은 많은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어엿한 독일 국민으로 여겼다. 기독교로 개종을 하는 등 독일 사회에 녹아들어 동화(同化)된 유대인으로 살았다. (한국인에게 조금씩이나마 유교문화가 몸에 밴 것처럼) 유대인이라는 의식을 지니긴 했지만, 독일 사회에 유대인 티를 유별나게 내지도 않았다. 유대교를 열심히 믿는 소수의 정통파 유대인들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삶을 꾸려 나갔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독일 보통사람들과 유대인의 공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뚜렷이 드러났다. 스스로 독일 사회에 동화됐다고 여겨온 유대인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배척과 차별 정책에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현실을 돌아보면, 유대인이 유럽인 사회에 녹아들어갔다(동화됐다)고 여기는 것은 그들의 착각이었다. 볼프강 벤츠(베를린공대, 반유대주의연구소장)는 독일 보통사람들과 유대인 사이의 "사적인 친밀한 교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고 잘라 말한다.
[유대인과 독일인은 콘서트홀과 오페라하우스에서 함께 바그너와 베토벤(의 작품들)을 감상했으며, 같은 극장을 찾았고, 같은 고전 음악가를 칭송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각자 귀가해 집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유대인과 사적으로 접촉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경우는 대부분 과시하거나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략)유대계 독일인과 비유대계 독일인의 사회적 관계는 평민과 귀족의 관계였다. 유대인은 외적으로는 평등했지만 독일사회의 인적 네트워크에는 속하지 못했다. 적어도 유대인 중산층은 그러했다](볼프강 벤츠, <유대인 이미지의 역사> 푸른역사, 2005, 96-97쪽).
학교를 졸업한 뒤 변호사가 된 유대인 청년이 있다 치자. 그는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비유대계 독일인 변호사들의 동료로 함께 일했다. 그러나 퇴근하면 서로 각자의 길을 갔다. 살롱이나 술집에서 만나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유대인 청년 변호사는 처음엔 이들 독일인 변호사들과 저녁 시간에 함께 어울리고 싶어 했지만 곧 그의 생각이 어림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 1933년 4월 유대인 상점 앞에서 불매운동을 펴는 나치 돌격대(SA) 대원들. 히틀러는 대규모 실업사태를 막으려고 유대계 백화점을 구제금융으로 돕기도 했다. ⓒ위키미디어 |
유대인과의 공생은 환상인가
볼프강 벤츠는 "독일인과 '유대인'이 진정으로 서로를 위해 공생한다고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 지적했다. 왜냐 하면 이러한 형태의 공생은 이른바 '유대인 명사'(이를테면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지휘자이자 음악감독 브루노 발터, 출판인 사무엘 피셔, 대기업인 AEG 회장이자 외무장관을 지낸 발터 라테나우 등)에게나 해당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벤츠 교수의 설명.
[유대인 명사들은 비유대인의 눈에 단지 '손님의 지위를 가진 이방인 독일인'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이들에게 '유대적 특성'이 발견되면, 그 다음 반응은 교육 정도에 따라 "그러면 그렇지!" 혹은 (관계를 끝장내기라도 하듯이) '유대인 돼지새끼'였다. (중략) 이미 히틀러 집권 훨씬 이전부터 유대인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폭력을 두려워해야 했다. 1933년 이후엔 최소한의 예의마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볼프강 벤츠, 105-106쪽).
독일 언어학자 빅토르 클렘페러는 동화되고 개종한 독일 유대인이었다. 그는 히틀러 정권이 들어서고 폴란드 침공이 있기까지 지난 6년 동안 히틀러가 가해온 유대인 박해를 겪은 뒤 일기장에 이렇게 그의 울분을 털어놓았다.
[1933년까지, 그리고 최소한 그 이전 거의 1세기 동안 독일 유대인들은 다름 아니라 전적으로 독일인이었을 뿐이다. 반유대주의가 항상 존재한다는 점은 반론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대인과 '아리안족'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이란, 예컨대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 사이에, 또는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에, 라인란트 지역 사람과 베를린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견주면 별것 아니기 때문이다. 프랑스 유대인들이 프랑스 국민의 일부인 것처럼, 독일 유대인도 독일 국민의 일원이다](로버트 위스트리치, 89-90쪽).
홀로코스트 연구자 로버트 위스트리치(헤브루대, 유대인역사)는 이들 동화 유대인들을 가리켜 '몇 대에 걸쳐 기업가 집안이거나, 독일 문화 및 언어에 너무 깊게 젖어서 다른 대안을 찾아볼 수 없는 이들'이라 했다. 위스트리치가 보기엔, 이들은 독일을 떠날 경우 잃을 재산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었다.
이들 부자 유대인들은 1933년 히틀러 정권이 들어선 뒤 갑자기 반유대 정책이 거세지는 것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반유대적 조치들이 잠깐 동안의 악몽처럼 곧 없어질 것이란 헛된 희망을 품었다. 히틀러라는 괴물이 일시적 일탈이고 그가 얼마 안 가서 정권을 내놓고 물러날 것이라는 기대마저 품었다. 하지만 역사가 보여주듯이, 히틀러는 '유대인 절멸!'(Vernichtung aller Juden!)을 외치며 유대인 600만을 희생시켰다고 얘기된다(600만이란 숫자가 무슨 근거로 나왔는지, 통계에 문제는 없는지는 따로 살펴볼 예정임).
구제금융으로 살린 유대계 백화점
위의 유대인 언어학자 클렘페러도 나름의 희망을 품고 독일에 남으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도 앞날에 다가올 고난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다. 일찍이 독일을 떠난 유대인들도 있긴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했던 1933년 말 무렵 독일 유대인 가운데 10%쯤이 독일을 떠났다(50여만 명 가운데 약 5만명). 하지만 나머지 90%는 그대로 독일에 머물렀다. 1933년 1월 히틀러 집권부터 1939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6년 반 동안 유대인 20만 명이 독일을 떠났다(로버트 위스트리치, 91쪽).
독일을 제때 떠나지 못했던 30여만 명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야 했다. 그 가운데 7만 명은 전쟁 중에 몸을 피했고, 20만 명 이상이 게토와 절멸수용소에 강제 이송되었다. 그들 가운데 16만 5,000명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추산된다(볼프강 벤츠, 214쪽). 유대인 출신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히틀러가 집권하던 1933년 바로 그 해에 독일을 떠났다. 아렌트는 히틀러 집권 뒤 유대인들이 재빨리 독일을 떠나지 않고 머뭇거린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정권 초기에 나치는 법과 법령의 눈사태를 일으켰지만 공식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을 일부러 폐지하려 하지는 않았다. 공무원 조직도 그대로 두었다. 이런 사실은 (독일 유대인을 포함한) 많은 국내외 관찰자들에게 (나치)당의 권한이 제한되고 새 정권이 신속하게 정상화될 기대를 불러일으켰다](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2> 한길사, 2019, 154쪽).
아렌트의 표현대로 유대인이 '정상화'를 기대하며 "독일을 굳이 떠나도 않아도 되겠다"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만든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유대인이 소유한 독일 최대의 백화점 콘체른인 헤르만-티에츠(헤르티)에 대한 금융 지원이었다. 1933년 6월말, 1만4000명의 직원을 둔 헤르티 백화점이 도산 위기에 빠졌다. 정부가 구제금융을 해주지 않을 경우 관련 업체들의 연쇄 도산이 불을 보듯 뻔했다. 헤르티의 위기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직후인 1933년 봄에 벌어졌던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Judenboykott)의 영향 탓도 컸다.
경제장관 쿠르트 슈미트는 금융지원 방안을 내놓아 히틀러의 화를 돋우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곧 현실적인 고려와 마주쳤다. "헤르티가 도산할 경우 독일 경제에 미칠 부작용이 너무 크다"는 슈미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히틀러는 내키지 않았지만 구제금융을 승인했다. 거리에서 불매운동을 펴온 나치 돌격대(SA) 대원들은 (히틀러의 변심 내막을 알 리가 없기에) 불평을 쏟아냈다. 급기야 나치당 총재대리 루돌프 헤스가 나서서 상황 변화를 나치당원들에게 설명했다(1933년 7월7일).
[정부의 주된 과제가 가능한 한 많은 일자리와 빵으로 이끄는 데 있는 이 시기에 백화점에 근무하는 수십만 노동자와 사무직 근로자들로부터, 그리고 백화점에 의존하는 납품업체들로부터 일자리를 빼앗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본인은 나치당과 산하 단체들에게 백화점에 대한 공격을 당분간 금지한다](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국가: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 문학과지성사, 2011, 239쪽).
헤스의 금지명령에 길거리의 나치 행동대원들은 할 말을 잃었다. 헤르티는 구제금융으로 살아남았다. 이를 지켜본 유대인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서로를 다독이면서 독일에 주저앉는 쪽을 택했다(헤르티가 유대자본에서 아리안 독일인의 소유로 넘어간 것은 1938년 '수정의 밤'을 거치면서 유대인 백화점 29개가 불탄 뒤였다. 괴벨스가 앞장 서 일으켰기에 '괴벨스 포그롬'이라 일컬어지기도 하는 '수정의 밤'에 대해선 따로 살펴봄).
▲ 1936년 8월1일 베를린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한 히틀러. 그 무렵 히틀러는 국제사회의 눈길을 의식해 유대인에 대한 압박을 잠시 멈추었다. ⓒ위키미디어 |
올림픽 앞두고 나온 기만적 유화책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다시금 '정상화'의 기대를 품게 함으로써 해외로 나아가려는 유대인의 발목을 잡은 짧은 시기가 있었다. 1936년 8월 (조선청년 손기정이 마라톤으로 금메달을 땄던) 베를린 올림픽 무렵이었다. 베를린 올림픽이 결정된 것은 1931년이었으니, 히틀러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하지만 히틀러의 광기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던 국제사회에서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치러져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올림픽 규약에는 '종교․인종․정치적 측면에서 모든 참가자들은 평등하다'는 조항이 들어 있다. "나치 정권은 이런 평등 조항을 어기고 있기에 보이콧돼야 마땅하다"는 목소리는 1935년 무렵 국제사회에서 아주 큰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나치 정권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국제올림픽조직위의 반대와 나치 정권의 기만책으로 흐지부지됐다.
여기엔 '히틀러의 나팔수' 괴벨스 선전장관의 마법이 숨어있다. 올림픽을 앞두고 반유대 공세를 멈추는 데 앞장 선 이는 괴벨스였다. 독일 저널리스트 랄프 로이트는 나치 정권을 분석한 2권의 역작인 괴벨스 전기(Joseph Goebbels, 1992)와 히틀러 전기(Hitler, 2003)를 써냈다. 로이트는 괴벨스가 편 기만적인 선전정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괴벨스는 올림픽 선전위원회의 도움으로, 그의 기만 작업을 최대한 완벽하게 이끌어나가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그는 언론보도지침에서 '인종주의의 관점은 완벽히 배제돼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베를린 시내에서는 '유대인은 환영받지 못한다'라거나 '유대인 출입시 위험은 자기 책임' 같은 문구들이 급속히 사라졌다. 반유대주의 언론 <돌격자>는 가판대에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랄프 로이트, <괴벨스, 대중선동의 심리학>, 2017, 520쪽).
그 무렵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전보다는 훨씬 느슨해졌다. 교활한 히틀러는 유대인에 휘두를 채찍을 등 뒤로 감추었다. 유대인 출신으로 미 대학에 다니고 있던 세계적 펜싱 선수 헬레네 마이어가 독일 대표로 나서는 것도 눈감아 주었다. 뉘른베르크법(1935년)으로 독일 안의 '2등 시민'으로 떨어진 유대인들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인종차별로 피곤하긴 하지만, 그래도 독일을 떠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했다.
베를린 올림픽이 막을 내리자, 나치 히틀러 정권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본격적으로 유대인을 억눌렀다. 많은 독일 유대인들은 가진 재산을 정리하고 히틀러로부터 도망칠 기회를 놓쳤다. 무거운 세금을 비롯한 여러 법적 장치로 말미암아, 떠나려면 거의 빈손으로 떠나야 했다. 나중엔 떠나는 것마저도 어려워졌다.
유대인 대량학살은 히틀러를 우두머리로 한 전체주의 체제에서 '의도적으로' 이루진 것인지 아닌지는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거리다. 나치 지도부에게 처음부터 유대인을 학살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서로 권력경쟁을 벌이면서 여러 유대인 억압 정책들이 점점 더 과격한 쪽으로 '구성'되면서 끝내 대량학살에 이르게 됐다고 보는 연구자들도 있다. 다음 주엔 홀로코스트에 얽힌 이런 불편하고 음울한 이야기들을 독자들과 함께 더 살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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