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15] 매실이 익을 무렵 콩국수를 먹지

조선일보 정수윤 작가·번역가
원문보기
후드득 소리에

귀도 새콤해지네

매실 비

ふるおと みみ なるうめ あめ

降音や耳もすふ成梅の雨

푹푹 찌는가 싶더니 요즘은 날마다 비 소식이다. 장마에 들었다. 장마는 비를 뜻하는 옛 우리말 ‘맣’이 길 장(長)을 만나 생긴 말이다. 과연 비가 길게도 내린다. 습한 공기가 대기에 꽉 차 수영장 물속을 걷듯이 축축하고 묵직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숲길을 걷다 보니 발밑 여기저기 초록색 열매가 떨어져 있다. 매실이다. 그렇구나. 장마철은 매화나무에서 매실이 익어서 떨어지는 계절이구나.

일본에서는 장마를 매실 매(梅)에 비 우(雨)를 붙여 ‘梅雨(쓰유)’라고 한다. 매실이 익어가는 시기에 내리는 비라서다. 오래전 중국에서 건너간 말이다. 이십 대의 바쇼(芭蕉·1644~1694)도 장맛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시를 남겼다. 새콤한 매실이 익어 사방에 떨어지니 후드득후드득 빗소리를 듣는 귀가 신맛을 느낄 지경이란다. 입도 아니고 귀가 새콤해서 어쩌나. 당시에는 ‘귀가 시다’가 같은 소리를 여러 번 들어 질린다는 관용어로 쓰였기에 ‘또 비가 내리는구나, 지긋지긋하네’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다. 옛사람들도 습한 장마가 견디기 힘들었나 보다.

그런 날이면 입맛도 없다. 그럴 때 일본인들이 찾는 음식이 소금에 절여 햇볕에 말린 매실, 우메보시(梅干し)다. 반찬으로도 먹고 고명으로도 쓰이고 사탕으로도 만드는데,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건 주먹밥 속에 들어간 우메보시다. 붉은 매실 초에 담가 저장하기에 빨갛게 물이 드는데, 하얀 쌀밥 속에 새콤한 우메보시 한 알이 입맛을 돋운다.

내가 처음 우메보시를 경험한 건 일본 편의점 삼각 김밥 속에서다. 난생처음 보는 쪼그라든 빨간 열매를 아무 생각 없이 한 입 꽉 깨물었을 때, 나는 기절할 것만 같았다. 셔도 너무 셨다. 세상에 이렇게 신 음식이 있다니! 그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침이 솟을 정도로 강렬한 신맛이었다. 그렇게 신 우메보시를 즐겨 먹으니 장맛비 소리에 귀가 새콤해질 법도 하다. 우리에게는 전혀 없는 감성이다.

숨이 턱턱 막히게 습한 장맛날, 우리는 시원한 콩국수 한 그릇이 그리워진다. 일본에는 없는 음식이다. 콩을 진하게 갈아서 만든 걸쭉하고 고소한 콩물이 가슴속으로 한 줄기 폭포수처럼 쏟아지면 더위에 끈적끈적해진 몸이 환희에 잠긴다. 알맞게 반죽해서 탄력이 살아있는 국수에 찬 콩물을 휘휘 저어 한 젓가락 입안에 넣으면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장맛비마저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덥고 답답한 계절이지만 신선한 우메보시 한 알과 구수한 콩국수 한 그릇으로, 그들도 우리도 맛있게 하루하루 버텨보는 수밖에.

정수윤 작가·번역가

정수윤 작가·번역가

[정수윤 작가·번역가]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에스파 닝닝 홍백가합전 불참
    에스파 닝닝 홍백가합전 불참
  2. 2강선우 공천헌금 의혹
    강선우 공천헌금 의혹
  3. 3전현무 기안84 대상
    전현무 기안84 대상
  4. 4삼성생명 신한은행 경기 결과
    삼성생명 신한은행 경기 결과
  5. 5심현섭 조선의 사랑꾼
    심현섭 조선의 사랑꾼

조선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