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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용의 물건漫談] 카리나 CD 1000만원어치 샀으니, 연애하지 마라?

조선일보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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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CD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이번 달 내게 가장 인상적인 글은 ‘카리나 연애 반성문’이었다. 카리나씨는 SM엔터테인먼트의 걸그룹 에스파 멤버다. 이 멤버가 어느 배우와 연애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팬 여론이 나빠졌다. 급기야 카리나 본인이 지난 5일 소셜미디어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이 사건을 이해하려면 아이돌 산업의 경제적 작동 원리와 그 심적 근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한편에 음반이라는 물건이 있다.

아이돌 팬은 크게 코어 팬과 나머지로 나뉜다. 코어 팬은 다른 사람들을 ‘일반인’이나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일반인을 지칭하는) ’머글’이라 부른다. 아이돌을 보통 이상으로 좋아하는 우리는 팬 세계에서는 일반인이 아니라는 뜻이겠다. 카리나의 반성문 역시 코어 팬들에게 쓰는 편지다. 그 글에는 에스파의 팬덤을 뜻하는 ‘마이’가 6번 등장한다.

코어 팬이 화를 내는 근거는 소비다. 특히 음반이라는 제품은 오늘날 팬 애호 활동이라는 독특한 소비 행위의 독특한 소품이 되었다.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지 음반의 역할이 ‘음원 데이터가 담겨 있는 데이터 저장고’였다면 오늘날 음반의 역할은 그를 완전히 벗어났다. 음반이 새로운 비즈니스가 된 배경이자 K팝 비즈니스의 그늘이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적으로 표현하면 오늘날 음반은 음악 감상이라는 사용 가치를 완전히 잃었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재생하면 음악이 나오지만 오늘날 그 목적으로 음반을 사는 팬이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다. 오늘날 음반은 팬들의 사랑(및 질타)과 팬 활동의 기세를 증명하는 티켓이다. ‘팬질’이라는 팬 애호 활동을 위한 기념품이다. 무엇보다 21세기 한국의 기묘한 이벤트인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한 일종의 청약권이다.

옆 나라 일본이 일찍이 음반의 새로운 사용 가치를 증명했다. 15년 전 AKB48이라는 걸그룹이 ‘총선 시스템’을 도입했다. 총선에서 1위를 한 멤버가 발매할 신곡 무대의 가운데(센터)에 섰다. 글로 정리하면 말장난 같지만 한창 때 AKB48 총선은 지상파 방송국이 선거 방송 팀까지 동원해 생중계하던 대형 이벤트였다. 이 총선의 투표권이 AKB48 싱글 앨범이었다. 총선의 인기가 가장 높던 2011년, 투표권이 들어 있던 싱글 앨범 ‘에브리데이, 카추사’는 150만 장 넘게 판매됐다. 이 이후부터 음반 판매 차트는 대중성을 떠나 특정 팬덤의 기세 지표로 전락했다.

한국은 사랑을 수익화하는 팬덤 비즈니스를 고도화했다. 오늘날 한국 아이돌 앨범은 커버나 디자인을 바꾸어 내용은 같은데 버전은 몇 가지다. 거기에 무작위로 아이돌 멤버의 포토 카드를 넣으니 팬들이 사야 할 음반은 수십 장 단위로 늘어난다. 이건 2023년 공정위가 3대 엔터사 현장 조사를 나갈 정도로 알려진 문제다. 결정적으로 팬 사인회가 있다. 아이돌을 직접 만나는 팬 사인회는 응모를 통해 당첨된다. 팬 사인회 당첨 확률을 높이려면 청약 점수를 관리하듯 음반을 많이 사야 한다. ‘팬 사인회에 당첨되기 위해 구입해야 하는 음반의 수’라는 ‘팬싸컷(팬 사인회 커트라인)’도 팬들 사이에 일반화된 용어다. 현재 최대 엔터사 중 하나인 하이브의 박지원 대표이사가 게임 내의 사행성 장치로 유명한 넥슨 출신이란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 결과 음반과 음악이 분리됐다. 2023년 1월~11월에 팔린 K팝 누적 음반 판매량은 1억1600만장. 그중 판매 1위인 세븐틴의 ‘FML’은 672만장이나 팔렸다. 약 30년 전인 1990년대에 음반 100만장이 팔렸다면 전국에 그 앨범 타이틀곡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FML’의 타이틀곡 ‘손오공’은 멋진 노래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전국 단위 히트곡이라 보기는 어렵다. 기부처 등에 K팝 앨범이 너무 많이 쏟아진다는 뉴스도 나온 지 한참이다. 요즘은 포토카드나 응모권을 쓰고 남은 CD를 K팝을 좋아하는 제3세계로 수출하는 사업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음반과 음악은 분리되고 팬과 아티스트의 관계는 뒤틀렸다. 지금의 K팝 팬 비즈니스는 기묘한 주주 자본주의처럼 작동한다. 개별 아티스트가 팬들에게 음악과 퍼포먼스를 제공한다면 팬들은 왜 퍼포먼스 바깥의 (연애라는 정상적인) 사생활에 분노할까. 팬들이 구입하는 상품에는 이들의 무결한 사생활까지 포함될까. 거칠게 말해 1000만원어치 음반을 샀다면 저 연예인에게 내가 원하는 걸 요구할 수 있는가. 정말 그리 생각하는 사람과 마주한다면 나는 할 말을 잃을 것 같다.

[박찬용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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