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30일 새벽 5시 30분쯤 일본 도쿄 '도요스 수산시장'에서 경매가 진행되기 직전의 모습. 미리 참치를 살펴보고 품질을 체크한다. /성호철 특파원 |
문을 열고 들어가자 비릿한 생선 냄새가 코를 콱 찔렀다. 지난 1월 30일 새벽 5시.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참치 경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손을 씻고 손 소독까지 마쳤다. 일본 도쿄 남쪽 도쿄만(灣)에 인접한 도요스(豊洲) 수산시장의 경매장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한 마리에 수천만원까지 하는 생(生)참치 약 200마리가 꼬리만 댕강 잘린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론 역시 꼬리가 없는 냉동 참치 1000마리 정도가 도열했다. 잘린 참치 꼬리마다 서너명씩 경매인이 둘러선 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메키키’(目利き), 즉 감식을 하는 것이다. 참치는 같은 크기라도 품질에 따라 ㎏당 3000엔부터 1만5000엔까지 가격 차이가 난다. 이 참치가 한 점에 1만엔씩 하는 긴자의 고급 횟집으로 갈지, 도쿄 외곽의 허름한 점포에서 수백엔짜리로 팔릴지 판가름나고 있었다.
‘땡땡땡땡’. 5시 29분에 경매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수산시장의 도매상 직원이 대략 100~200㎏인 참치 서너마리 앞에 서면 경매인 수십명이 연신 손가락으로 희망 매입 금액을 표시했다. 경매장 이곳저곳에서 연신 ‘땡땡땡’이 울리면, 1분도 안 돼 낙찰자의 이름과 가격을 적은 종이가 참치에 붙었다. 경매는 4~5곳에서 동시에 진행됐고 순식간에 모든 참치의 등에 낙찰 딱지가 붙었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이 조금 지났다. 단 10분 만에 경매가 끝난 것이다.
2024년 1월 30일 새벽 5시 30분쯤 일본 도쿄 도요스 수산시장에서 손에 종을 든 도매상 직원이 참치 네 마리 앞에서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주변에 모인 경매인 수십명이 쉴 새 없이 손가락으로 희망 가격을 제시하고 1~2분 만에 낙찰됐다. /성호철 특파원 |
◇1400만명 도쿄도에 매일 1210톤 공급
이날 일본 도쿄도(東京都)는 한국·미국·호주·캐나다·스페인 등 9국의 9매체에 세계 최대 규모 수산시장인 도요스 시장을 공개했다. 도요스 시장은 하루에만 수산물 1210t(2022년 기준)과 청과물 872t을 중간도매상에 넘기는 도매시장이다. 금액으론 각각 16억5300만엔(약 150억원, 2022년 기준)과 3억2500만엔이다. 1400만 도쿄도 주민을 포함해 인근 지역에 신선한 수산물·청과물을 공급하는 ‘도쿄의 부엌’인 셈이다. 규모는 상상 이상이다. 도요스 시장은 40만7000㎡ 부지에 10여 건물이 집결한 곳이다. 건물 연면적을 합치면 51만㎡. 노량진수산시장보다 5배 큰 규모다.
“생(生)참치 경매 현장에서는 절대 플래시를 터트리면 안 됩니다.” 도쿄도 직원은 외국인 기자들에게 몇 차례나 강조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온도를 높여, 참치의 선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경매를 단 10분 만에 끝내는 이유도 사람들이 운집하면 온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노출 시간을 최소화한 것이다. 경매 시간에는 냉풍기 가동도 멈춘다. 냉동 참치는 영하 50도에서 저장하다가 경매 때만 잠시 나열하는데 냉풍을 틀면 오히려 더 빠르게 녹기 때문이다. 수산물 경매동에선 같은 날 새벽 4시 20분과 5시에 활어·성게·잡어 등 온갖 생선이 차례대로 경매로 팔려갔다.
도요스 수산시장에서 낙찰된 참치를 해체하는 모습. /도쿄도 제공 |
◇축구장 6개 크기 대형 냉장고
도요스 수산시장은 ‘맛있는 생선회를 먹겠다’는 일본인의 집념이 만든 곳이다. 일본 지방정부인 도쿄도는 2018년 예전 수산시장인 쓰키지(築地)에서 수조원의 이전 비용을 무릅쓰고 도요스로 수산시장을 옮겼다. 이유는 오직 ‘냉장(冷藏)’을 위해서다. 1935년에 생긴 쓰키지 수산시장은 일본인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이 찾아오는 일본 수산물 성지지만, 명성과 달리 철저한 ‘온도 관리’는 어려웠다. 200㎏짜리 생참치 한 마리는 300만~500만엔을 왔다 갔다 하는 고가인데도 쓰키지에선 경매하는 2~3시간은 물론이고 이동할 때마다 상온 노출이 불가피했다.
도요스 수산시장의 주요 건물들은 외부와 단절된 거대한 냉장고다. 예컨대 건축 면적만 4만9000㎡로 축구장 6~7개 넓이인 5층짜리 수산물 경매동은 여름에도 생선 보관에 최적화된 6~10도 저온을 유지한다. 일본 인근에서 잡힌 참치가 전날 오후 10시까지 냉장 상태로 도요스에 들어오고 도매상의 경매와 중간도매상, 소매상으로 팔리고 마지막에 도쿄로 출하되는 모든 절차가 거대한 냉장고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일본 도쿄 수산물 도매시장인 도요스시장에서 1월 5일 열린 올해 첫 참치 경매에서 238㎏짜리 일본 아오모리현 오마(大間)산 참다랑어가 1억1424만엔(약 10억3400만원)에 낙찰돼 최고가를 기록했다. /연합뉴스 |
◇매일 60톤씩 물 날라, 도요스에 온천 만들어
생선의 선도를 잡은 도요스 수산시장에 남은 숙제는 쓰키지의 ‘명성’이다. 도요스 수산시장 건물 내에는 횟집 등 60~70점포가 있지만 쓰키지에는 역부족이다. 방문객은 평일 7000명, 주말 1만명 정도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요즘도 도요스가 아닌 쓰키지로 간다. 쓰키지 시장은 수산물 도매를 하지 않지만, 여전히 460여 점포에 사람이 붐빈다. 요미우리신문은 “코로나 팬데믹에도 점포 수가 전혀 줄지 않았을 정도로, 쓰키지의 인기는 건재하다”고 보도했다.
여기에 도요스 수산시장은 전철 유리카모메선(線)의 시조마에(市場前)역에 있는데, 도쿄 도심에서 출발하면 한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린다. 도요스 수산시장은 이달 1일 시장 단지 내에 ‘센캬쿠반라이(千客萬來)’라는 장외 시장을 만들었다. 일본의 옛 도시인 에도 분위기를 살린 거리를 조성하고, 횟집은 물론 야키니쿠, 몬자야키, 해산물 버거 등 점포 60~70곳을 유치했다. 에도 거리 중앙에 종탑을 만들었고, 오전 9·12시, 오후 3·6·9시에 자동으로 종을 친다. 적어도 연간 260만명이 방문할 것으로 도요스 수산시장 측은 전망한다.
비장의 카드는 온천이다. 일본은 온천의 나라지만, 정작 도쿄 도심엔 온천 여관이 거의 없다. 그 틈새를 노린 것이다. 100㎞ 이상 떨어진 유명 온천지 하코네에서 매일 60톤의 온천물을 실어온다. 왕복 5시간 걸리지만, ‘좋은 온천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데 사활을 건 것이다. 다카하시 마사미 만요구라부 부사장은 “8층에는 누구나 공짜로 족욕할 수 있는 장소도 있다”며 “에도의 거리에서 일본 음식을 즐기고, 최고 품질의 온천을 즐길 수 있는 유일무이한 시설”이라고 말했다.
도요스 수산시장은 이달 1일 장외 시장인 센캬쿠반라이를 개업했다. 에도 거리와 같이 만든 이곳에는 횟집, 해산물 버거, 몬자야키 등 60~70점포가 모였고 숙박 시설과 온천도 있다. /성호철 특파원 |
◇관동대지진의 건물 잔해가 만든 도요스
도요스에는 도요스 수산시장 말고도 외국 관광객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인 팀랩 플래닛 도쿄(TeamLab Planets TOKYO)도 있다. 빛과 프로젝션으로 만든 예술을 체험하는 곳이다. 하지만 도요스의 진짜 모습은 전혀 다를지 모른다.
태평양과 이어지는 도쿄만 옆에 있는 도요스는 매립지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건물과 가옥 10만9000여 채가 무너지고 21만2000여 채가 불탔는데 그 잔해를 바다로 밀어넣어 매립한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10만명 이상이 죽거나 실종됐다. 매립 작업은 지진 발생 8년이 지난 1931년에 끝났고 바다의 일부가 육지가 됐다. 당초 ‘도쿄만 매립 5호지’로 불리다, 1937년에 도요스로 이름을 바꿨다. 지진의 불행 위에 생겼기에 ‘풍요로운[豊] 토지가 되길 바란다’는 기원을 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시카와지마 조선소(현 IHI)와 같은 군 시설이 밀집된 주요 군사 지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미군의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도쿄 재건을 도운 것도 도요스다. 공장 지대인 도요스에서 도쿄가스가 도쿄로 전력을 공급했던 것이다. 일본의 ‘24시간 편의점’도 도요스에서 나왔다. ‘세븐일레븐 제1호점’은 1974년 공장 지대인 도요스에서 시작했는데 당시 공장들이 24시간 가동됐기 때문에 세븐일레븐도 자연스럽게 밤새도록 영업했다.
마코토 이소자키 도요스시장협회 사무국 차장은 “도요스 수산시장은 일본 정부의 건축물 지진 대책 기준보다 훨씬 강한 기준으로 건설됐다”며 “지진 발생 시 도쿄만에서 쓰나미가 밀려와도, 대략 6.5~8m는 문제 없이 견딘다”고 말했다. 그는 “정전이 돼도, 3일간은 자가발전으로 가동한다”며 “재해 시 이곳은 ‘머물러도 안전한 지역’으로 분류돼 있다”고 덧붙였다. 관동대지진이 만든 도요스니, 지진 대책만큼은 한 치의 부족함도 없다는 것이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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