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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와인 두 거장이 만나 만든 용기와 결단의 와인 [전형민의 와인프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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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유명한 강은 무엇일까요? 가장 길다는 타이틀을 가진 아마존강부터 이집트 문명의 태동이 된 나일강, 우리나라 수도 서울을 관통하는 유서 깊은 한강과 독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상징하는 라인강까지…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규모가 크고 역사가 오래된 여러 강을 떠올릴텐데요. 오늘 소개할 와인 이야기와 관련이 있는 이 강은 고대 시대부터 존재하며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길이는 고작 50㎞, 우리에게 익숙한 한강(총 길이 500㎞)의 10분의 1 남, 지류인 공릉천(45.7㎞)과 비교하더라도 조금 긴 수준에 불과한 작은 강 입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 작은 강이 세계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을까요? 우리는 뭔가 중대한 결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옮길 때 ‘이 강을 건넌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현대에 와서는 강의 이름이 아예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이라는 뜻의 영어 단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바로 루비콘강 입니다. 고대 로마의 위대한 군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사를 통해 전세계가 공감하는 단어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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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콘강을 건너는 카이사르(Julius Caesar and the Crossing of the Rubicon). 프란체스코 그라나찌(Francesco Granacci), 1494년.


“주사위는 던져졌다”
고대 로마에서는 루비콘강을 본국과 속주인 갈리아 키살피나의 경계선으로 삼았습니다. 과거 우리 선조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영토의 경계로 삼은 것과 같은 느낌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주의 왕격인 총독은 속주에서는 병권까지 쥐고 있지만, 본국으로 돌아올 때는 자신의 군대를 루비콘강에 남기고 본인만 건너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49년, 8년에 걸쳐 갈리아 지방(지금의 스위스,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을 평정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뺏기 위해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원로원에 반기를 들고, 결단을 내려 갈리아 정벌에 동행한 군대와 함께 루비콘강을 건넙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를 모욕한 적이 기다리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누구나 알 법한 유명한 고사를 소개한 이유는 여기에 등장하는 루비콘강과 같은 이름을 가진 와인이 오늘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와인 루비콘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또한 루비콘강을 건너던 카이사르의 고뇌와 용기 못지 않아, 그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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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루비콘강의 모습.


훌륭한 떼루아… 하지만 이어 닥친 시련들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북부 나파 밸리(Napa Valley)는 오늘날 와인 애호가들에게 너무 잘 알려진 와인 산지입니다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나파 밸리가 와인의 산지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 이후로 비교적 역사가 짧습니다.

그 중에서도 북쪽 루더포드(Rutherford)의 잉글눅 빈야드(Inglenook Vinyard)는 200여년 전 캘리포니아의 와인 산업이 태동하던 시기부터 훌륭한 떼루아를 통해 꾸준히 가능성을 보여준 와이너리였습니다. 핀란드인 선장이었던 구스타프 니바움(Gustave Niebaum)이 ‘프랑스 스타일의 최고 품질 와인을 만들겠다’라는 꿈과 함께 1879년경부터 구입·관리해왔죠.

하지만 훌륭한 떼루아에도 불구하고 서부 영화에서 나오던 골드러시와 실버러시가 이어지며 시련을 겪습니다. 황금을 찾아 이곳으로 몰려든 노동자와 이민자들 대부분이 섬세하고 복합적이지만 비싼 고품질 와인보다, 양 많고 빨리 취할 수 있으며 가격이 싼 저품질 와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장의 수요에 맞춰 인근 와이너리들이 재배가 쉽고 수확량이 많은 레드와인 품종, 진판델(Zinfandel·이탈리아의 Primitivo)을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합니다. 현재에도 잉글눅 빈야드 바로 북쪽에는 이때의 흔적인 ‘진판델’이라는 마을이 존재합니다.

여기에 1919년 금주법(볼스테드법·National Prohibition Act)이 시행되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더해집니다. 결국 니바움은 여러 상황을 버티지 못하고 와이너리를 매각하게 되는데요. 매각된 후 잉글눅은 주변 와이너리들을 따라 저가 와인을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고. 이를 굴욕이라 여긴 니바움은 끝내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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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니바움의 초상. 그는 잉글눅 와이너리의 창설자다.


코폴라와 몬다비, 다시 피기 시작한 꽃
이후 잉글눅은 수차례 팔리면서 초창기 명성을 잃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잉글눅 와인은 고품질 와인을 뜻하지 않았죠. 하지만 1975년 한 영화감독이 이 와이너리를 사들이면서 다시 한번 최고 품질을 위한 담금질을 시작합니다. 바로 영화 대부(God father)의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sis Ford Coppola) 입니다.

사실 와이너리 구입 초기 코폴라의 목적은 ‘가족이 즐길 와인’이었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수준의 의미였죠. 하지만 그가 캘리포니아 와인의 전설 로버트 몬다비(Robert Gerald Mondavi)와 만나면서 오래 전 니바움의 꿈이 다시 꽃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당시 코폴라는 이미 대부의 큰 성공으로 셀럽이 돼있었는데요. 어느 날 몬다비가 코폴라의 와이너리를 방문하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코폴라 부부는 와이너리 지하 셀러에 보관돼있던 19세기 니바움의 와인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몬다비는 와인을 맛보곤, 품질에 감동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프란시스, 이것봐요. 이곳에서도 이런 와인을 만드는 일이 가능하답니다.” 이날 몬다비는 코폴라에게 와이너리와 얽힌 니바움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영화감독인 코폴라는 니바움과 잉글눅의 이야기에 매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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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폴라와 몬다비. 두 사람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잉글눅 와인은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또 다시 닥친 시련…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공교롭게도 이날 코폴라 부부가 몬다비에게 대접한 니바움의 와인은 니바움이 그토록 노력했던 ‘프랑스 스타일 고품질 와인’의 가장 근본이 되는 까베르네 소비뇽 클론 29 품종으로 빚은 와인이었습니다. 니바움은 이 품종을 유럽에서 직접 공수해 식재했다고 하죠.

아무튼 코폴라는 과거 잉글눅의 포도밭을 야금야금 사들입니다. 밭을 전문적으로 관리할 책임자도 고용하고요. 영화와 와인의 두 거장(巨匠)이 만나 니바움의 오랜 꿈을 다시 꽃 피우기 시작하는 순간 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 코폴라의 재정 상태는 1976년부터 찍던 영화 지옥의 묵시록 때문에 최악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막대한 사재를 털어넣어 촬영을 이어가는데, 자꾸 문제가 생겨 제작비가 방대해졌죠. 애초 1977년 12월 개봉 예정이던 영화는 개봉 시기를 여러 번 미루더니 1979년 8월에야 개봉합니다.

후일담이지만, 당시 영화에 투자했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는 코폴라 감독의 추가적인 투자 요구에 응하는 조건으로 그의 나파 밸리 와이너리를 담보로 잡았습니다. 영화가 실패한다면, 그는 영화 뿐만 아니라 와이너리까지 모든 것을 잃을 위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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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눅 와이너리 전경.


8년의 기다림, 그는 루비콘강을 건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이던 1978년, 코폴라 감독의 와인이 완성됩니다. 몬다비에게 내놓았던 와인과 같은 파워풀한 와인이었죠. 하지만 이번엔 와인 소비 트렌드가 문제가 됩니다. 요샛말로 뽕따(바로 오픈해서 마시는 편한 스타일의 와인)가 당시 유행하면서 입니다.

하지만 코폴라의 와인은 수년은 더 묵혀야 진가가 발휘될 것 같았고,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코폴라는 8년을 더 숙성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8년간 수익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생산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은 매년 계속 쓰여야 하는 것이고요.

코폴라로써는 2000여년 전 루비콘강을 건너던 카이사르 만큼의 고뇌와 결단이 있어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와인의 이름을 루비콘이라고 짓습니다. 다행히 영화 ‘지옥의 묵시록’은 이듬해 개봉하면서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제 코폴라에게 남은 것은 와인의 성공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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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묵시록 포스터. 원제는 Apocalypse Now인데, 일본판 번역을 그대로 따라해 우리나라에서도 지옥의 묵시록으로 개봉했다.


용기와 결단의 상징, 루비콘
1985년, 코폴라는 나파 밸리 자신의 와이너리에서 저명한 와인 저널리스트들을 초대해 시음 적기에 접어든 자신의 와인 루비콘을 선보입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 자리에는 세계 와인 시장에 가장 강한 영향을 끼치는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도 참석했는데, 이런 감상평을 남깁니다.

“맛에 깊이가 느껴지고, 지금이 시음 적기이나 8~10년은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섬세하고 복합적인 고품질 와인의 절정이 10년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찬사입니다. 코폴라의 결단은 옳은 선택이었던 것이죠.

루비콘은 비단 코폴라 본인의 성공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의문 부호가 따르던 캘리포니아 와인의 장기숙성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확신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카이사르, 니바움 그리고 코폴라의 용기와 결단이 꽃 피운 잉글눅의 와인인 셈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는 종종 물러설 수 없는 전환점에 부딪치곤 합니다. 어떻게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럴때 루비콘을 한 잔 마시며 결의를 다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쩌면 카이사르와 니바움, 코폴라의 강한 운이 여러분과 함께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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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은 시간이 빚어내는 술입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와인의 역사도 시작됐습니다. 그만큼 여러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품고 있는데요.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국제공인레벨을 보유한 기자가 재미있고 맛있는 와인 이야기를 풀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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