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명 목숨 구한 ‘한국의 쉰들러’
신흥무관학교 출신 광복군 활동
6차례에 걸쳐 지정 요청했지만
보훈부 “자료 미비” 끝내 보류
경찰청 “국립묘지 안장 등 예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이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됐다고 경찰청이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문 전 서장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심사는 총 6차례 이뤄졌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6번째 독립유공자 지정을 추진했다. 보훈부는 사실상 기각 판정인 ‘서훈 보류’ 결론을 내렸다. ‘자료상의 인물과 동일인 여부 불분명’ ‘독립운동 활동 당시 입증자료 미비’ 등을 보류 사유로 들었다.
경찰은 지난해 7월 문 전 서장을 독립유공자가 아닌 참전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보훈부에 수정 요청했다. 경찰청은 “문 전 서장이 6·25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하며 ‘지리산 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에 착안해 독립유공이 아닌 참전유공으로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요청했다”면서 “보훈부가 지난해 12월 문 전 서장에 대한 참전유공자 등록을 마치고 그 결과를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광복군 활동
6차례에 걸쳐 지정 요청했지만
보훈부 “자료 미비” 끝내 보류
경찰청 “국립묘지 안장 등 예우”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은 예비검속자 총살 명령에 대해 ‘부당하므로 불이행한다’라며 명령을 거부해 200여명의 주민 목숨을 살렸다. 제주경찰청에 그의 흉상이 설치돼 있다. 박미라 기자 |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한국의 쉰들러’로 불린 문형순 전 모슬포경찰서장이 6·25 참전유공자로 인정됐다고 경찰청이 3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문 전 서장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독립유공자 심사는 총 6차례 이뤄졌다. 경찰청은 2018년 문 전 서장을 ‘올해의 경찰 영웅’으로 선정하고 6번째 독립유공자 지정을 추진했다. 보훈부는 사실상 기각 판정인 ‘서훈 보류’ 결론을 내렸다. ‘자료상의 인물과 동일인 여부 불분명’ ‘독립운동 활동 당시 입증자료 미비’ 등을 보류 사유로 들었다.
경찰은 지난해 7월 문 전 서장을 독립유공자가 아닌 참전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보훈부에 수정 요청했다. 경찰청은 “문 전 서장이 6·25전쟁 당시 경찰관으로 재직하며 ‘지리산 전투사령부’에 근무한 이력에 착안해 독립유공이 아닌 참전유공으로 국가보훈부에 서훈을 요청했다”면서 “보훈부가 지난해 12월 문 전 서장에 대한 참전유공자 등록을 마치고 그 결과를 통보해왔다”고 밝혔다.
문형순 전 서장의 경찰인사기록에 신흥무관학교 졸업 후 국민부 호위대장 등 독립군으로 활동한 이력이 기재돼 있다. 경찰청 제공 |
문 전 서장은 1897년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19년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한국의용군에 편입했다. 1921년 4월 고려혁명군에 재편돼 군사교관으로 복무했다. 1929년 국민부 중앙호위대장, 조선혁명당 초기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1935년부터는 지하공작대로 허베이 지역에서 암약했으며, 1945년 임시정부 공식 군조직인 광복군 소속으로 화베이지역에서 활동했다.
문 전 서장이 경찰이 된 것은 해방 이후 2년이 흐른 뒤다.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1947년 5월 제주청 기동경비대장(경위)으로 입직했으며, 이후 모슬포경찰서장 임시서리(1949년 1~10월), 성산포경찰서장(1949년 10월~1950년 12월), 경남 함안서장(1951년 6~10월), 지리산전투경찰사령부 교육대장(1952년 3~4월) 등을 역임했다”고 쓰였다.
문 전 서장 입직 당시 제주에선 4·3항쟁이 고조되고 있었다. 군경은 1948년 12월 대정읍 하모리의 좌익 총책을 검거해 관련자 100여명의 명단을 압수했다. 1949년 모슬포경찰서장에 취임한 문 전 서장은 주민 수백명이 처형될 위기에 놓이자 이들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그리고 주민 100여명이 자수하자 이들을 전원 훈방했다.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성산포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한국전쟁 때는 계엄군에 맞서 도민들의 목숨을 지켜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정부는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을 불순분자라며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놓는 일)했다. 예비검속된 이들 중에는 좌익단체 활동 이력이 없거나 입산활동 경력이 없는 경우가 다수 포함됐다.
당시 제주·서귀포·모슬포·성산포 경찰서 등 제주도 내 4개 경찰서에는 예비검속으로 수백명씩 구금돼 있었다. 제주·서귀포·모슬포 경찰서에 구금된 이들은 결국 총살을 당했으나 문 전 서장이 있던 성산포경찰서의 사정은 달랐다. 해병대 정보참모 해군 김두찬 중령은 1950년 8월30일 성산포경찰서에 예비검속자를 총살하고 결과를 보고하라고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문 전 서장은 해당 공문에 ‘부당함으로 미이행’이라고 쓴 후 명령을 거부했다. 그 덕에 주민 200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1953년 9월 제주청 보안과 방호계장을 끝으로 퇴직한 문 전 서장은 1966년 6월20일 제주도립병원에서 향년 70세로 유족 없이 생을 마감했다. 문 전 서장의 시신은 제주시 오등동에 있는 평안도민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훗날 4·3연구가 등은 문 전 서장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 재산을 바쳐가며 유대인 학살을 막은 ‘오스카 쉰들러’에 빗대 ‘제주판 쉰들러’ ‘한국의 쉰들러’로 불렀다.
경찰 관계자는 “문 전 서장이 참전유공자로 등록됨에 따라 제주호국원과 협의해 국립묘지 안장을 추진하는 등 경찰 영웅으로서 최고의 존경과 예우를 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yjle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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