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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일 수 있는 여긴···‘홈그라운드’[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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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커뮤니티·역사 다룬 다큐
권아람 감독·주인공 윤김명우씨
70년대 샤넬다방·2000년대 신촌공원
2020년대 이태원 레스보스까지
여성 퀴어들의 ‘해방공간’ 조명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의 권아람 감독(오른쪽)과 출연자 윤김명우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레즈비언바 ‘레스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 뒤에는 퀴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문재원 기자

다큐멘터리 영화 <홈그라운드>의 권아람 감독(오른쪽)과 출연자 윤김명우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레즈비언바 ‘레스보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두 사람 뒤에는 퀴어를 상징하는 깃발이 걸려 있다. 문재원 기자


1974년, 잔뜩 긴장한 얼굴의 윤김명우씨(당시 18세)가 서울 명동 ‘샤넬다방’ 앞에 섰다.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몰래 들어선 그곳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한 다방에는 테이블마다 여자들로 가득했다. 잔뜩 멋을 부린 여성들 중에는 남성복을 입은 ‘바지씨’(중성적인 느낌을 풍기는 여성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옛 은어)들도 있었다. 잠시 앉아 있다 자리를 떴다. 명우씨는 이날을 해방감보다 두려움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인터넷도 없던 시절, 이 다방이 “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는 공간임은 분명했다.

퀴어들에겐 ‘홈그라운드’가 필요하다. 내가 마음껏 나일 수 있는 곳, 내가 나여도 안전한 곳은 갑갑한 일상의 유일한 탈출구다. 한국 여성 퀴어들의 공간이 1970년대 샤넬다방, 2000년대 신촌공원, 2020년대 이태원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로 이어지고 있는 까닭이다.

6일 개봉한 <홈그라운드>는 한국의 레즈비언 커뮤니티와 그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다큐멘터리 영화다. 영화를 연출한 권아람 감독과 주인공이자 레스보스 운영자인 윤김명우씨를 지난달 28일 레스보스에서 만났다.

“단편 <퀴어의 방>(2018)을 통해 여러 퀴어 당사자의 방과 집을 다뤘어요. 그 작업 이후 사적 공간인 방 밖에서 어떤 공간을 만들고 향유하며 살아가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방 안에서 풍요로운 관계를 만들며 살아갈 수 있지만, 방 안에서만 행복하다고 행복하게 사는 건 아니니까요.”(권 감독)

<홈그라운드>는 윤김명우씨의 일상을 좇는다.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윤김명우씨는 2000년 커밍아웃했다. ‘명우형’이라 불리는 그는 레즈비언들의 정신적 지주다. 씨네소파 제공

<홈그라운드>는 윤김명우씨의 일상을 좇는다. 한국 최초의 레즈비언바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윤김명우씨는 2000년 커밍아웃했다. ‘명우형’이라 불리는 그는 레즈비언들의 정신적 지주다. 씨네소파 제공


그때 윤김명우씨를 떠올렸다. ‘명우형’이라 불리는 그는 2000년 방송을 통해 커밍아웃한 퀴어 당사자로 한국 성소수자 역사 그 자체인 인물. 권 감독은 친구들과 찾은 레스보스에서 끝없이 나물 반찬을 서비스로 주는 명우씨를 또렷이 기억했다. “레스보스에 가기 훨씬 전부터 명우형은 알고 있었죠. 직접 만난 명우형은 다정하고 귀여웠어요. 제가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거든요(웃음).”

이미 비슷한 제안을 여러 차례 거절했던 명우씨는 권 감독의 진지한 모습에 촬영을 승낙했다. “열의가 느껴졌어요. 모든 면에서 집요하게 붙들고 늘어지는데 안 해줄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3년 넘게 촬영하면서 컨디션이 안 좋아 촬영을 취소하기도 하고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윤김명우씨의 집과 그의 일터인 레스보스에서 출발한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60년 전 서울 명동으로, 20년 전 신촌공원으로 관객을 데려간다. 당시 이 공간을 찾았던 퀴어 당사자들의 기억과 옛 언론 보도, 성소수자 단체가 아카이빙해 온 여러 자료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다보면 어느새 한국의 ‘퀴어 공간사’가 완성된다.

1970년대 여성 퀴어들의 해방구였던 샤넬다방은 개업 2년 만인 1976년 ‘퇴폐 업소’라는 낙인과 함께 문을 닫았다. 2000년대 초 여성 청소년 퀴어들이 모여놀던 신촌공원은 ‘동성애를 하는 비행 청소년의 공간’이라는 뉴스의 주인공이 됐다.

권 감독은 이들 공간에 관한 자료를 주로 옛 신문 사회면에서 찾았다. “퀴어란 말도 없던 시절이라 ‘남장 여자’·‘여장 남자’ 같은 키워드로 검색했어요. 이런 존재들은 꼭 범죄와 연루될 때 가시화됐더라고요. 그게 아니면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뉴스로 다뤄졌죠.”


사회면 기사와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공간들은 재연으로 만들어냈다. 비틀스, 딥퍼플의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고 신나게 춤추는 여성들의 모습은 84분의 러닝타임 중 가장 활기 넘치는 대목이기도 하다. 권 감독은 “특히 샤넬다방 관련해선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개 숙인 사진만 있었다”며 “인터뷰만으로는 그 장소들의 이상하지만 따뜻하기도 한 느낌을 전달할 수 없을 것 같아 재연 장면을 찍었다”고 말했다.

<홈그라운드>는 1970년대 서울 명동의 ‘샤넬다방’과 2000년대 신촌공원, 2020년대 망원동의 댄스교실 ‘루땐’까지 여성 퀴어들의 공간을 조명한다.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던 샤넬다방과 신촌공원은 연출을 통해 재현했다. 씨네소파 제공

<홈그라운드>는 1970년대 서울 명동의 ‘샤넬다방’과 2000년대 신촌공원, 2020년대 망원동의 댄스교실 ‘루땐’까지 여성 퀴어들의 공간을 조명한다.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었던 샤넬다방과 신촌공원은 연출을 통해 재현했다. 씨네소파 제공


다큐멘터리를 찍는 3년 사이 퀴어들의 공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사건이 있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고 성소수자가 주로 이용하는 이태원 클럽에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퀴어를 향한 손가락질은 거세졌다. 퀴어 커뮤니티는 크게 위축됐다. 레스보스에도 손님의 발길이 뚝 끊어졌다.

“코로나19 사태 때 제1구호가 ‘만나지 마라’였어요. 그때 명우형을 비롯해 퀴어들이 많이 힘들어했어요. 그런데 그게 단순히 영업 안 돼서나 못 놀아서가 아니었어요. 모여서 술 먹고 노는 시간은 퀴어들에겐 힘을 내서 일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에요. 저도 이번 작업을 하면서 이 사실을 더 절실히 느꼈습니다.”(권 감독)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니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월세와 물가는 끝을 모르고 오른다. 명우씨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하지만 명우씨는 오늘도 레스보스의 문을 연다. “내가 어릴 땐 레스보스 같은 곳이 없었어요. 학업에 열중할 수도 없었고 누구랑 대화할 수도 없었어요. 집에서 아우팅을 당해 내쫓긴 아이들이 지금도 있어요. 가슴 펴고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죠.”

퀴어의 존재를 지울 수 없듯 이들의 공간 역시 계속되고 있다. 홍대 인근에만 열 군데가 넘는 레즈비언 바가 있다. ‘퀴어 프렌들리’를 내세운 가게들도 많다. 바에서 댄스교실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권 감독은 앞으로도 퀴어만의 공간은 계속될 것이라 말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어떤 곳은 없어지고 어떤 곳은 계속되기도 하고 변화가 생겨요. 하지만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편안하고 안전한 공간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유지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권아람 감독(오른쪽)과 윤김명우씨가 서울 이태원동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문재원 기자

권아람 감독(오른쪽)과 윤김명우씨가 서울 이태원동의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 문재원 기자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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