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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론주의의 몰락…경제파탄 아르헨 ‘남미 트럼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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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왼쪽에서 둘째) 당선인이 지난 19일(현지시간) 당사 밖에서 지지자에게 연설하고 있다. 빅토리아 비야루엘 부통령 당선인(왼쪽), 연인인 코미디언 파티마 플로레스(오른쪽 둘째), 여동생 카리나 밀레이(오른쪽)가 나란히 섰다. [AFP=연합뉴스]


아르헨티나에서 19일(현지시간) 치러진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전기톱 후보’로 돌풍을 일으킨 하비에르 밀레이(53)가 당선됐다. 자칭 ‘무정부주의 자본주의자’인 그는 경제학자 출신 방송인이었다. 지난 2021년 하원의원 당선으로 정치에 입문한 지 2년 만에 대통령직까지 오르게 됐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진하는 자유’ 후보로 나선 밀레이는 이날 99% 개표 상황에서 55.69%를 득표하며 집권당이 속한 ‘조국 연합’ 후보 세르히오 마사(51) 경제부 장관(44.3%)을 눌렀다. 지난달 1차 투표 때 마사 장관에게 약 7%포인트 뒤처졌으나, 결선투표에선 11.4%포인트 앞섰다.

일간 라나시옹은 “밀레이는 24개 주 가운데 부에노스아이레스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21곳)에서 승리했다”며 “역사적 승리”라고 전했다. 밀레이는 1차 투표에서 24%를 얻어 3위를 기록한 패트리샤 불리치 전 안보장관의 표뿐 아니라 4위였던 후안 시아레티의 표까지 흡수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리치 전 안보장관이 1차 투표 이후 밀레이를 지지하면서, 우파 성향 중도 표심이 밀레이로 결집했다는 분석이다.

밀레이 “오늘은 아르헨티나 재건하는 날”

밀레이는 당선 수락 연설에서 “오늘은 아르헨티나를 빈곤하게 만드는 국가 체제의 종말이자 아르헨티나를 재건하는 날”이라고 밝혔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70년 넘게 이어져 온 페론주의의 종식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필요한 변화는 급격할 것이며 점진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면서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로 향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사 장관은 “아르헨티나는 다른 길을 택했다”며 승복했다. 밀레이는 내달 10일부터 4년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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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 기자


헝클어진 머리에 가죽 재킷을 입고 다닌 밀레이는 ‘전기톱 퍼포먼스’로 국내총생산(GDP)의 최대 15%까지 정부 지출을 줄이겠다고 공약했다. “중앙은행을 폭파해야 한다”며 아르헨티나 화폐 페소를 폐기하고 달러를 공식 화폐로 쓰자고 제안했다. 총기 자유화, 장기 매매 합법화, 낙태권 폐지, 동성 결혼 반대 등을 옹호했으며, 기후변화는 “사회주의자들의 사기”란 입장이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실상 정치 경험이 없는 밀레이는 과감한 스타일과 음모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과 비슷한 극우주의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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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 기자


정치 문외한인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건 파탄에 이른 경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르헨티나 물가는 말 그대로 살인적이고, 국민 40%는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전년보다 142.7% 폭증했다. 연말까지 185%를 찍을 거란 전망도 나온다. 공식 환율은 1달러당 365페소지만 암시장 환율을 의미하는 ‘블루 달러’는 달러당 900페소를 넘는다.

트럼프 “아르헨을 다시 위대하게” 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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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밀레이에 대한 호감보다 좌파 포퓰리즘인 페론주의에 대한 회의가 더 크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페론주의자들은 군부 독재 기간(1976~1983년)을 제외하고 대부분 선거에서 승리했다. 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정권도 페론주의의 한 분파로, 실권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키르치네르 부통령을 중심으로 현금성 복지 정책을 남발했다.

밀레이는 외교 노선에서도 급진적인 인식을 드러내 왔다. 그는 “미국과의 외교를 강화하고, 중국과는 거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다만 당선 연설에선 “우리는 모든 국가와 협력할 것”이라며 조정 여지를 남겼다. 제이크 설리번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밀레이의 당선과 공정한 선거를 치른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축하를 전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나는 밀레이가 매우 자랑스러우며, 당신은 나라를 바꾸고 진정으로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NYT는 “밀레이의 당선은 최근 몇 년간 선거 패배로 주춤했던 세계 극우 운동의 승리”라고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페소 폐지로) 6220억 달러 규모의 아르헨티나 경제를 달러로 전환할 경우 또 다른 초인플레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2015년 당선됐던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도 친기업 성향의 중도 우파 출신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경제 상황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못하면서 4년 만에 페론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내준 전례가 있다.

밀레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나 학부와 대학원까지 이곳에서 마쳤다. 첫 직장은 공교롭게도 자신이 해체를 주장한 중앙은행(인턴)이었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했으나 그의 언행에 대한 학생들의 항의로 교정을 떠났다고 한다. 코미디언으로 유명한 파티마 플로레스와 연인 관계다.

☞페론주의=아르헨티나에서 1946~55년, 1973~74년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대통령의 정책을 계승하는 정치 이념. 외국 자본 배제, 산업 국유화, 복지·공공지출 확대, 현금성 보조금 지급, 임금 인상 등 대중주의 정책이 주류를 이룬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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