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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35] 오펜하이머와 첫 원폭 실험

조선일보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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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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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음,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연구를 이끈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는 1945년 7월 16일 새벽에 이루어진 첫 원폭 실험이 성공한 뒤에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이 구절(11장 32절)을 읊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얘기를 한 것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할 폭탄을 만든 데 대한 고뇌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는 1967년에 사망할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발언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선 이 얘기가 1945년 핵실험 직후가 아니라, 1965년 NBC 인터뷰에서 나왔음을 고려해야 한다. 1945년 7월에 그의 옆에서 원폭 실험을 지켜본 동생 프랭크 오펜하이머는 그가 폭발 후에 “성공할 줄 알았다”는 얘기를 중얼거렸다고 회고했다.

그가 인용한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은 고뇌나 회한과는 거리가 멀다. 여기서 비슈누신의 화신인 크리슈나는 친척들과 전쟁하기를 꺼리는 아르주나 왕자에게 무기를 든 네 팔을 펼쳐 신성(神性)을 드러내면서 왕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이 싸움을 하라고 설득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세상의 파괴자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파괴자임은 그가 시간의 신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 적군 병사들은 다 죽게 마련이고, 따라서 아르주나 왕자가 이들을 죽이는 것은 자신이 죽이도록 결정한 사람에게 실제 죽음을 안겨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65년 오펜하이머가 한 얘기를 전부 들어보자. “(핵실험 직후) 세상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몇몇은 웃고 몇몇은 울었지만 대부분은 침묵했습니다. 나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비슈누는 왕자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왕자를 감동시키기 위해 여러 무기를 든 모습으로 ‘이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원자폭탄을 만들어 숱한 사람을 죽게 한 것이,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크리슈나가 부여한 숙명이었음을 얘기하려던 것이 아닐까?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현학적으로 늘어 놓은 것은 아니었을까?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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