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국가보훈처 제공) |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일제침략의 부당함과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세계에 알린 이희경·나용균·황기환 선생이 '2023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고 31일 국가보훈처가 밝혔다.
보훈처에 따르면 이들 3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황 선생은 1886년 평안남도 순천 출생으로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의 실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 '공립협회'에서 활동했고, 1906년 6월까지 레들랜드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황 선생은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땐 지원병으로 입대해 독일 베를린에 입성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11월 종전 뒤엔 김규식 선생의 제안으로 1919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서기장을 맡아 강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와 유럽 내 언론사 등에 통신전을 보내 조국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황 선생은 1919년 8월부턴 파리위원부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프랑스·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침략과 통치 실상을 알리면서 같은 해 10월엔 프랑스 인권옹호회에 참석해 우리나라의 독립 문제를 보고했다.
황 선생은 1920년 9월엔 임시정부 런던위원부 위원에 임명돼 프랑스와 영국을 오가며 외교활동을 폈다. 그리고 같은 해엔 10월 영국 언론인 프레더릭 매켄지와 '대영제국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했다.
이희경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
황 선생은 1921년 6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대영제국 식민지 수상회의 땐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자 하는 조선 사람의 청원'이란 인쇄물을 배포하고 '일영(日英)동맹 반대안'도 공식 제출했다.
황 선생은 1921년 8월 이승만 당시 임정 대통령의 요청으로 미 워싱턴 군축회의에 제출할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했고, 이듬해엔 하와이에 파견돼 민찬호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았다.
황 선생은 이후 뉴욕·런던을 오가며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1923년 4월 뉴욕에서 별세했다.
보훈처는 황 선생의 유해를 순국 100주년이 되는 다음달 미 뉴욕에서 국내 국립묘지로 봉환해 조국에서 영면할 수 있도록 한다는 계획이다.
황 선생과 함께 '4월의 독립운동가'에 선정된 이 선생은 1889년 평안남도 순천 출신으로 1911년 미국 일리노이대 의학전문과에 진학, 같은 해부터 대한인국민회 시카고지방회에서 임원·총무로 활동했고, 1916년엔 미 하와이에서 병원을 운영하며 한인사회의 의료체계를 마련했다.
나용균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
이 선생은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고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군무위원장, 임시회계검사원, 법률기초위원, 외무총장대리 등을 맡았다.
특히 그는 1919년 임시정부 내무부의 인가를 받아 회규를 제정하고 선언서를 발표하는 등 초창기 대한적십자회의 토대 구축과 체계 확립에 힘썼고, 간호원 양성소·병원 설립도 추진했다.
이 선생은 또 미 시애틀·샌프란시스코 등의 한인사회를 직접 찾아가 대한적십자회원을 모집했으며, 이곳에서 모집한 의연금 4000여원을 상하이 임시정부 본부로 송금하기도 했다.
이 선생은 1920년 8월 미 상하원 의원들로 구성된 '미국의원단 동양시찰단'이 상하이를 방문했을 땐 교제위원으로서 임정에서 작성한 '진정서'를 미 의원들에게 전달했다. 1921년엔 안중근 의사 동생 안공근 선생과 함께 임시정부 특별전권대표로서 러시아로부터 독립자금 지원을 받기 위해 모스크바에 파견되기도 했다.
이 선생은 1938년 국내로 돌아온 뒤엔 호흡기 전문의로 활동했으며 1941년 서거했다.
황기환 선생.(국가보훈처 제공) |
또 나 선생은 1895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1914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 정치학부에 입학해 유학 생활을 하던 중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대두되자 유학생들과 모임을 만들어 독립운동에 나섰다. 나 선생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된 1919년 '2·8독립선언' 발표에도 기여했다.
이후 상하이로 망명한 나 선생은 1919년 임시정부의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됐고, 이후 임시의정원 법제위원회 이사·위원으로서 임시정부 관제 및 헌법 개정에 힘썼다.
나 선생은 1922년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김규식·여운형 선생 등과 함께 러시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한 극동인민대표대회에도 참석했다. 같은 해 2월 상하이로 돌아온 나 선생은 국민대표대회주비위원에 임명돼 5월 국민대표대회주비위 선언서를 발표했다.
1945년 광복 뒤 귀국한 그는 제헌의원, 국회부의장, 보건사회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1984년 서거했다.
정부는 이들 선생의 공훈을 기려 이 선생에겐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나 선생과 황 선생에겐 각각 1990년과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hgo@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