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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의 돌발史전] “백성은 호랑이보다 무섭다” 한영우 교수의 마지막 인터뷰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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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최후의 저작 ‘허균 평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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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2022년 3월 1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2022년 3월 1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2022년 3월 14일, 저는 취재를 위해 서울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 갔습니다. 국내 대표적 역사학자인 한영우(1938~2023) 서울대 명예교수가 저서 두 권을 한꺼번에 출간한 것을 계기로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미 여러 번 한 교수의 자택 연구실에 취재를 갔었기 때문에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아주 익숙했습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습니다.

한영우 교수는, 큰 키에 중후하면서도 밝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현관에서 방문객을 맞고, 멋들어진 병풍을 배경으로 거실 소파에서 호쾌하게 껄걸 웃으며 차분하면서도 치밀한 충청도 말투로 “그러니까 정조는~ 자기 아버지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았던 거지”라며 역사상의 일을 명쾌하게 해석하고 설명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저는 한 교수의 자택에 들어서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쇠약해진 그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병이 악화돼 큰 수술을 받은 직후라고 했습니다. 목소리도 거의 알아듣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미리 집필해 놓은 ‘서경덕과 화담학파’(지식산업사)와 ‘허균 평전’(민속원) 두 책이 동시에 출간돼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터뷰에 응했던 것입니다. 이런 줄 모르고 공연히 인터뷰를 요청한 것이 아니었나 당황했지만 한 교수는 “괜찮으니 말을 하겠다”며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2019년 11월 본지 인터뷰 당시의 한영우 교수. /박상훈 기자

2019년 11월 본지 인터뷰 당시의 한영우 교수. /박상훈 기자


◇”조선시대, 최소한 ‘文民정신’은 있었다”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해 보니, 거의 유일한 기자의 장점은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그들 사고의 농축된 언어들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학자와 한 시간 동안 인터뷰를 한다면, 그는 오직 저만을 위해 그 시간만큼의 특강을 해 주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한영우 교수와의 인터뷰는 늘 각별했습니다. 그는 아들뻘인 저를 제자처럼 친근하게 대하며 단박에 질문의 요점을 짚고 자신이 수행한 연구의 맥을 짚어 설명해 줬습니다.

“편협한 국수주의와 주체성이 없는 세계주의는 모두 위험하다. 자기 역사에 뿌리를 두고 남을 이해할 때 생존 능력은 몇 배로 커질 것이다.”

실증주의적 학자인 한영우 교수는 광복 이후 제2세대에 해당하는 역사학자였습니다. 조선시대사 전공자로서 ‘당파싸움’ ‘정체된 역사’ ‘문약(文弱)’ ‘수탈’ 등 식민사학의 영향에 의해 부정적으로만 인식됐던 조선시대 역사의 재해석에 힘썼습니다. 조선의 문화는 생각보다 무척 다채로우면서도 풍부했고, ‘지배층의 이상주의와 집권자에 대한 견제 기능이 균형을 이뤘던 문민(文民) 정신이 살아있었던 나라’가 바로 조선왕조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수정하기 위해 그는 대단히 실증적인 연구를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과 족보, 각종 인구 통계 등 방대한 자료를 통해 과거 급제자 1만5000명을 분석한 대작 ‘과거, 출세의 사다리: 족보를 통해 본 조선 문과급제자의 신분이동’은 조선왕조가 특정 가문에 의해 관직이 독점된 폐쇄 사회였다는 통설을 1차 자료를 통해 반박한 작업이었습니다. 조선의 과거제는 신분 상승을 가능케 한 사회적 사다리였다는 것입니다.

한영우 교수의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전4권).

한영우 교수의 연구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전4권).


◇”선비 정신이 한국인의 DNA”

그는 2010년 낸 저서 ‘한국선비지성사’에서 “한국인의 문화적 DNA이자 전통적 공동체 정신은 바로 선비 정신”이라며 “한국인이 수많은 외적의 침입과 식민 지배, 혼란을 이겨내고 오늘날 세계 일류국가를 넘볼 만큼 성장한 생존 능력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비? 선비라니. 요즘 인터넷에서 ‘선비’라는 비속어를 쉽게 볼 수 있듯, 그것은 지금 ‘고루함’ ‘잔소리’ ‘답답함’ ‘변화 거부’ ‘꼰대’ 등을 상징하는 용어처럼 돼 버리지 않았는가? 그러나 한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비란 단순히 조선시대의 유학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조선부터 현재까지 한국사를 이끌어 온 지성인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김유신이나 서희·강감찬 같은 사람을 설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선비는 우리 고유어로서 이를 한자로 옮기면서 선인(仙人)이나 선인(先人)으로 기록됐습니다. 선비는 민심을 존중하고 만민공생(萬民共生)을 추구하는 민본과 애민 사상이 근본 이념이었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짓지 않고 상생(相生)하는 정신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한 교수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비 정신이 늘 변화를 거부하고 고착돼 있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통 문화를 기반으로 외래 문화를 창조적으로 수용하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지혜 역시 존재했습니다. 개화기의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 대한제국의 구본신참(舊本新參), 안재홍의 신민족주의는 전통적 선비사상과 서양 정치사상을 융합함으로써 근대국가 건설을 꾀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선비 정신’의 DNA는 지금 어디로 갔기에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요. 한 교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해방 후 제 것을 우습게 알고 남의 것만 받아들인 결과, 전통문화 브랜드가 후진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나라가 돼 버렸습니다.”

선비들의 풍경을 묘사한 강희언(1417-1464)작 ‘사인삼경(士人三景)’.

선비들의 풍경을 묘사한 강희언(1417-1464)작 ‘사인삼경(士人三景)’.

◇광복 후 네 번째 한국사 통사(通史) 저술

한영우 교수는 사실 베스트셀러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한국사 통사(通史)이자 개설서인 ‘다시 찾는 우리 역사’(경세원)는 1997년 처음 출간해 2013년까지 50쇄 넘게 찍었고, 2014년엔 전면 개정판을 새로 냈습니다. 각종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로부터 인기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사 전체를 서술하는 통사를 집필하는 일은 매우 어렵고 대가(大家)만이 할 수 있는 일로 인식돼 왔습니다. 한영우 교수의 통사는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1967), 한우근의 ‘한국통사’(1970), 변태섭의 ‘한국사 통론’(1986)에 이어 우리 역사학자가 저술한 네 번째 통사로 기록됩니다. 한영우 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 역사’는 한국사를 ①고대연맹국가(고조선과 열국) ②고대귀족국가(삼국과 남북국) ③중세귀족관료국가(고려) ④근세관료국가(조선) ⑤근대산업국가(개항기~1945년) ⑥현대민주국가(광복 이후)의 여섯 단계로 시대구분해 서술했습니다.

현대사 서술에서 한 교수는 이승만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승만의 선택은 이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으나 당신의 국제적 현실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승만이 결단을 안 내렸으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이승만에게 분단 책임을 묻는 것은 당치 않다.”

“이승만은 국제 감각이 뛰어난 현실주의자, 김구는 통일정부를 추구했던 이상주의자였다. 두 사람을 양자택일의 관계로 볼 필요는 없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선택해야 했지만 이제는 꿈과 불가피성을 모두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012년 제3회 민세상을 수상했을 때 그는 학자의 자세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교수는 많은데 학자는 적습니다. 학자란 현실에 관심을 갖되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연구실에서 천수를 다하고 가는 사람이죠.” 버젓이 현실 정치에 뛰어드는 이른바 ‘폴리페서’를 향한 쓴소리였습니다.

2012년 11월 30일 오후 열린 제3회 민세상 시상식에서 참석자들이 수상자를 축하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쨰가 한영우 교수.

2012년 11월 30일 오후 열린 제3회 민세상 시상식에서 참석자들이 수상자를 축하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쨰가 한영우 교수.


◇2017년 ‘정조 평전’ 인터뷰

2017년 10월, 그가 두 권 분량의 ‘정조 평전’을 냈을 때 봉천동 자택 연구실에서 한영우 교수와 만난 저는 처음부터 공격적인 질문을 했습니다. “정조 임금은 지나치게 미화되거나 과대평가된 게 아닌가요?”

이에 대한 한 교수의 답변은 차분하면서도 진지했고, 실증적 연구를 바탕으로 해석된 언어여서 무척 탄탄했습니다. “왕조의 근본적 체제를 바꾼 적이 없고, 편지에 상스러운 욕설을 썼다는 것 같은 얘기 말인가요?” 그가 한번 숨을 돌리고 말했습니다. “정조는 낡은 ‘경국대전’ 체계를 극복하고 행정을 전문화해야 한다는 당대 지식인층의 요구에 부응했습니다. 편지에 쓴 욕설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죠.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지혜를 갖춰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적 군주상에 맞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정조 해석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말하는 한영우 교수의 풍모는 현인(賢人)인 동시에 마치 거인과도 같았습니다.

2020년 12월에 저는 ‘사람들’면에 작은 기사를 하나 썼습니다. 한영우 교수가 평생 모은 장서 1만2000여 권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교수는 당시 “한 달 동안 이삿짐 차 9대 분량의 책을 운반했다”며 “연구실은 물론 집 부엌과 베란다까지 쌓여 있던 책들을 후학을 위해 내놓으니 홀가분하다”고 했습니다.

2017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한영우 교수. 그는 "학자는 현실에 관심을 갖되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연구실에서 천수를 다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2017년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는 한영우 교수. 그는 "학자는 현실에 관심을 갖되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연구실에서 천수를 다하고 가야 한다"고 했다,


◇2022년 마지막 인터뷰, ‘역적’ 허균, 그리고 햄버거 한 봉지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난 2022년 3월.

저는 너무나 쇠약해진 한영우 교수의 모습 앞에서 당황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사진기자가 도착하자 한 교수는 위엄을 갖춰 촬영에 응했습니다. 신문에 난 사진만 보고서는 아무도 그가 병중이었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마지막 저작인 ‘허균 평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허균은 지나치게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이자 실학자였습니다. 조선 중기 율곡이 위로부터 혁명을 꿈꿨다면, 허균은 아래로부터 혁명을 꿈꿨습니다. 문제는 재승박덕(才勝薄德)이었죠. 허균의 행적은 지금 보면 비리 공무원의 전형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을 위한 축재가 아니라 서얼 지식인, 승려, 기생, 화공 같은 소외 계층을 도왔던 것입니다.”

제가 질문했습니다. 역적으로 몰려 죽은 것은 모함을 받은 것입니까, 아니면…

“진짜로 모반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허균은 좋은 선비들을 배척하는 당쟁, 입만 살아 떠들면서 실무를 모르는 지식인, 전쟁의 참화와 농민의 가난을 외면하는 권력자들을 혐오했습니다.”

허균 영정.

허균 영정.

그리고 이 한 마디를 덧붙였습니다.

“허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성은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섭다고요.”

2022년 3월, 이것이 한영우 교수가 인터뷰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날 인터뷰를 위해 한 교수의 자택을 찾은 것은 점심 무렵이었습니다. 한 교수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유 선생, 시장하실 텐데 이것 좀…”이라며 미리 주문한 듯한 햄버거를 내놓았습니다. 포장지를 열고 식은 햄버거를 한 입 베어물자 그만 눈물이 터져나와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앞으로 한동안은 그 브랜드의 햄버거는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인터뷰가 끝나자 한 교수가 다시 힘겹게 입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유 선생… 내 부탁 하나만… 좀 들어주세요.”

“……네?”

“내가 아프다는 얘긴, 신문에 쓰지 말아 주세요.”

“……”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2022년 3월 1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2022년 3월 1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자택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그로부터 11개월이 지난 2023년 2월 15일.

한영우 교수는 자택에서 별세했습니다.

그날 부음 기사를 쓴 뒤 밤에 빈소를 찾았습니다. 영정 사진 속 한영우 교수는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배경으로 웃고 있었습니다.

―선생님,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그분의 명복을 빕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설명해드립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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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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