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화가 성협(成夾)의 풍속화첩 중 ‘야연(野宴)’. 양반들이 야외에서 화로를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그렸다. / 국립중앙박물관 |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게. 엄지손가락만 아프고 나머지 손가락들은 아프지 않던가? 몸에 속한 것들은 크건 작건 간에 다 피와 살이 있네. 그렇기에 아프기는 마찬가지네. 더구나 큰 생물이건 작은 생물이건 다 숨 쉬는 생물들인데, 어찌 큰 것은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것은 죽음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그대는 물러가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게. 작은 달팽이 뿔을 큰 쇠뿔처럼 여기고, 작은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여겨보게나. 그런 다음에야 나는 그대와 더불어 도(道)에 대해 이야기하겠네(盍齕爾之十指乎? 獨拇指痛而餘則否乎? 在一體之中, 無大小支節, 均有血肉, 故其痛則同. 況各受氣息者, 安有彼之惡死而此之樂乎? 子退焉, 冥心靜慮, 視蝸角如牛角, 齊斥鷃爲大鵬, 然後吾方與之語道矣).” -이규보, ‘슬견설(蝨犬說)’
“난 그 사람하고 겸상하지 않겠어!”
이것은 그런 사람하고 깊이 상종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사실 한 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다. 상대가 너무 재수 없는 사람이면, 일단 겸상할 수가 없다. 노골적 인종차별주의자와 겸상할 수 있을까. 최소한의 인간적 호감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너무 재수 없는 인물이라면 누구도 그와 겸상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겸상은 밥을 먹는 일이다. 남이 보는 앞에서 외부 사물을 자기 내부로 받아들이는 엄청난 일이다. 그러기에 심신이 긴장해서는 안 된다. 너무 긴장하면 체하기 일쑤다. 상대가 너무 더러워도 긴장된다. 밥맛이 떨어진다. 상대를 배려하는 뜻에서라도 손 정도는 씻고 오는 것이 좋다. 상대가 너무 무례해도 긴장된다. 밥상머리에서 느닷없이 화를 벌컥 내는 사람과는 겸상하기 어렵다. 최소한의 예의가 필요하다.
사람을 앞에 놓고 묵묵히 밥만 먹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맛있는 걸 독식하는 데 정신이 팔려 상대를 잊어서도 곤란하다. 식사 도중에 적절한 대화가 오가야 한다. 그러려면 상대의 밥 먹는 속도와 템포를 의식해야 한다. 젓가락질이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더러운 화제는 삼가야 한다. 눈치와 배려가 필요하다.
요컨대 너무 밥맛 떨어지는 사람과는 겸상하기 어렵다. 왜냐고? 밥맛이 떨어지니까! 이처럼 어려운 겸상에 비해 독상은 얼마나 편한가. 그러나 독상만 하다 보면, 겸상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소통, 유대, 우정 등을 나눌 수 없다. 배는 부를지언정, 삶은 굶주리게 된다.
어디 밥 먹는 일만 그럴까. 대화를 나누는 일 자체가 그렇다. 편견에 가득 찬 사람, 눈치 없는 사람, 배려 없는 사람, 자기 의견은 조금도 바꿀 의향이 없는 사람, 꽉 막힌 사람, 자기만 말하려고 드는 사람, 자기 속은 전혀 털어놓으려 들지 않는 사람과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어느 날 누군가 이규보(고려 후기 문인)에게 개를 때려 죽이는 비참한 광경을 보고 났더니, 다시는 고기를 먹고 싶지 않다고 토로했다. 충분히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내 주변에도 동물 도축 영상을 보고 충격받아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규보는 그 채식 선언에 공감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를 도발한다. “어제 누군가 이[虱]를 잡아 태워 죽이는 것을 보고 났더니, 다시는 이를 잡고 싶지 않아(昨見有人擁熾爐捫蝨而烘者, 予不能無痛心. 自誓不復捫蝨矣).” 그 말을 들은 채식주의자(?)는 문득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은 진지하게 개나 돼지에 대한 동정심을 표시했건만, 그에 맞서 해충에 대한 동정심을 운운하다니. 이 사람이 날 놀리나. 그래서 이규보에게 화를 냈다. “나를 기만하냐(豈欺我耶).”
그러자 이규보는 상대를 타이른다. 열 손가락 깨물어봐. 아프지 않은 손가락 있나. 죽임을 당하는데, 개돼지만 괴롭겠나. 이, 모기, 파리 같은 해충들도 괴롭겠지. 큰 생물만 죽음을 싫어하고 작은 생물은 죽음을 좋아할 리 있겠는가? 이런 식의 대꾸는 마치 채식주의자에게, 동물만 먹는 것은 나쁘고 식물 먹는 것은 괜찮나. 동물이든 식물이든 죽기 싫은 것은 마찬가지겠지라고 대꾸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견 재수 없어 보이는 이규보의 관심은 육식·채식 여부에 있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상대 마음이 충분히 자유로운지 여부다. 해충의 고통에 민감한 이규보가 개돼지의 고통에 무심했겠는가. 그렇지만 상대 마음의 스트레칭을 위해 일부러 다른 논리를 편다. 요가를 하듯이 마음을 한껏 스트레칭해 보게. 작은 달팽이 뿔을 큰 쇠뿔처럼 여기고, 작은 메추리를 큰 붕새처럼 여길 때까지 시야를 스트레칭해 보게. 이렇게 상대를 자극한 뒤에, 이규보는 말한다. “그런 다음에야 난 그대와 더불어 도(道)에 대해 이야기하겠네.”
이규보의 관심은 (미물에까지 관심을 기울이는) 환경주의도 아니고, (육식을 혐오하는) 채식주의도 아니다. 그는 그러한 특정주의자가 아니다. 이규보의 주 관심은 어떤 주의(主義)에 헌신하기 이전에 마음을 탄력 있게 유지하는 데 있다. 선입견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 최대 관심사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입장도 선택하지 않겠다는 말은 아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운용한 끝에, 신중하게 입장을 선택하겠다는 말이다. 특정 입장이나 주의가 곧 선은 아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입장을 선택했는지가 입장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이규보는 결코 도의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도를 알았다고 뻐기지 않는다. 도를 파악했다고 확언하기에는 도는 너무 유동적인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규보가 확언하는 것은 도의 내용이 아니라 도를 이야기할 수 있는 조건이다. 그가 찾는 사람은 득도한 사람이 아니라, 함께 도를 이야기할(與之語道) 사람이다. 이규보의 겸손은 도를 안다고 뻐기지 않는 데 있다. 이규보의 자부심은 도를 다 모르긴 해도 도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인간은 도를 원한다. 삶을 인도해줄 진리를 원한다. 진리라는 맛있는 음식을 즐기려면 겸상하는 게 좋다. 그러나 진리를 앞에 두고 겸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선입견과 긴장을 벗어나 자유로우면서도 예의를 갖춘 상태를 유지해야 하니까. 어렵다. 그게 어렵다고 독상만 하다가 보면 어느덧 독단에 빠지게 된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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