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인 자크 그리졸레씨. 올해 94세다./파리=손진석 기자 |
세상에는 문화·인종·국적의 원천이 다양한 ‘하이브리드 인재’가 많습니다. 정치·종교의 핍박을 피한 이주민이나 후손이 국가의 명운을 가르기도 합니다. 국경을 초월해 족적을 남기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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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까지 4년간 파리에서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여러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90대에 접어든 그분들을 만날 때마다 숙연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70년전 대한민국에 가서 중공군과 맞서 강원도 일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용사들입니다. 머나먼 나라였지만 공산 세력과 맞서 싸우겠다는 일념으로 장도(長途)에 올랐다는 점에서 ‘글로벌 노마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작년에 저는 당시 프랑스군을 이끌었던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을 그의 자택으로 찾아가 인터뷰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6·25전쟁과 관련해 만났던 분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6·25 때 전사한 292명의 이름 센강 변에 새겨지다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 대대 소속으로 숨진 장병 292명의 이름을 모두 새겨 넣었다. 원래는 참전하거나 전사한 병사들의 이름 없이 기념비만 세워져 있었다./프랑스 국방부 |
파리 4구의 센강 변에는 프랑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2021년 6월 18일 이곳에 90대의 노병(老兵) 9명이 모였습니다.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기도 어려울만큼 나이가 많이 들었지만 이들은 제복을 입고 당당히 서 있었습니다. 제복의 가슴에는 갖가지 무공훈장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프랑스 국방부가 1950~53년 사이 6·25전쟁에서 전사한 참전 용사 292명의 이름을 새긴 동판을 참전 기념비에 붙이는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프랑스 국방부는 참전 기념비 아래에 프랑스군 대대 소속으로 북한·중공군에 맞서 싸우다 숨진 프랑스군 268명과 한국군 24명의 이름을 빠짐없이 새겨 붙였습니다.
한반도 모양으로 만들어진 이 기념비에는 그동안 프랑스가 유엔군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글귀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생존해 있는 프랑스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작년 6월 파리 시내 6.25전쟁 참전 기념비에 전사자 이름 292명을 새겨넣는 제막식에 참석했다./주프랑스대사관 |
이날 제막식에는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랄프 몽클라르(1892~1964)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72)씨가 참석했습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참전 용사 레이몽 베나르씨의 아내도 찾아왔습니다. 한국을 잊지 못해 집에 태극기를 걸어두고 살았던 베나르씨는 2015년 별세할 때 “한국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던 분입니다.
6·25전쟁 당시 강원도 철원의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사한 이브 모알릭 상병의 조카는 뜻깊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모알릭 상병의 인식표를 건네받았죠. 이 인식표는 지난 2019년 화살머리고지 인근에서 발견돼 정경두 당시 국방부 장관이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에게 건넸던 것입니다.
이날 제막식에는 쥬느비에브 다리외섹 당시 프랑스 보훈 장관(현 장애인 담당 장관)이 참석했습니다. 다리외섹 장관은 “프랑스군이 6·25전쟁에 참전한 것은 프랑스 영토와 국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엔 주도하에 평화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프랑스군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2019년 10월 파리의 개선문에서 프랑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식이 열렸을 당시 모습. 왼쪽에 서 있는 노병이 자크 그리졸레씨이다. 맞은편 제복을 입은 젊은이들은 프랑스 생시르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다./파리=손진석 기자 |
프랑스군은 6·25전쟁에 약 3500명이 참전했고 265명이 숨졌습니다. 파병 장병 대비 전사자 비율이 7%로 당시 참전한 외국 군대 중 가장 높습니다. 지금은 생존해 있는 참전 용사가 60명 안팎으로 추정됩니다.
◇94세 ‘한글 넥타이의 사나이’
이날 제막식에 참석한 9명의 참전용사 가운데 파리에서 열리는 6·25전쟁 관련 행사에 가장 부지런히 참석해온 노병은 자크 그리졸레(94)씨입니다. 그는 기념비를 둘러보면서 “우리는 한국을 잊지 않고, 한국은 우리를 잊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졸레씨는 ‘한글 넥타이의 사나이’로 불립니다. 그는 6·25전쟁 관련 행사 때 재킷 오른쪽 깃에 태극기와 프랑스 삼색기 국기 문양이 함께 나란히 만들어진 배지를 달고 나타납니다. 또한 한글 문양의 넥타이를 자주 매고 나타납니다.
제가 ‘이 넥타이가 어디서 생겼냐’고 물어보니 “오래전 선물받아 한국과 관련한 행사 때마다 매고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한글을 잘 읽을 줄은 모르지만 글자가 무척 예쁘다”고 했습니다.
그리졸레씨가 맨 한글 문양의 넥타이/파리=손진석 기자 |
1928년생인 그리졸레씨는 6·25전쟁에 중사 계급으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20개월간 참전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이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였던 ‘단장의 능선 전투’에 참가했던 장본인이죠. 한국 정부는 그리졸레씨의 공로를 인정해 2018년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졸레씨는 고령이지만 의사소통에 별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그를 몇 차례 만나봤는데요. 늘 “오래전이지만 한국을 위해 싸웠다는 걸 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젊은 시절 군인일 때 그리졸레씨 모습/그리졸레씨 제공 |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70년 지났지만 아버지 기억하는 한국인들 고마워”
저는 작년 6월 25일을 앞두고 6·25전쟁에 프랑스군을 이끌고 참전한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 롤랑 몽클라르씨를 인터뷰했습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몽클라르 장군은 2차대전 영웅으로서 6·25전쟁이 벌어지기 직전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끌던 중장(中將)이었는데, 프랑스 정부가 6·25전쟁에 대대 규모로 파병을 결정하자 참전을 위해 자청해서 네 단계 낮은 중령 계급장을 달았습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후 한국전선을 찾은 미국 맥아더(맨 오른쪽) 사령관을 만나고 있는 몽클라르(맨 왼쪽) 장군. |
은행에서 쭉 일하고 임원으로 퇴임한 몽클라르씨는 차분하고 지적인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전형적인 프랑스 상류층 은퇴자의 인상을 풍겼습니다. 그는 “7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인들이 아버지를 기억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는 “종종 한국 사람들이 저를 만나면 ‘당신이 몽클라르 장군 아들이냐’며 제 손을 꼭 잡아주죠. 그러면 뭔가 가슴 속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뜨거운 감정이 느껴집니다”라고 했습니다.
6.25전쟁 참전 직전 몽클라르 장군(왼쪽)이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 가운데가 몽클라르 장군의 부인, 오른쪽이 아들 롤랑 몽클라르씨./조선일보 DB |
◇생후 5개월 아들 파리에 두고 한국으로 떠난 몽클라르 장군
아들 몽클라르씨는 1950년 1월생으로서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생후 5개월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차분히 말을 이어갔습니다. “세계 1·2차 대전에 모두 참전한 아버지는 나치와 맞서 싸운 것을 계기로 공산주의 세력을 악으로 보고 박멸해야 한다는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습니다. 어머니가 갓 태어난 나를 두고 전쟁터에 가지 말라며 반대했죠. 하지만 아버지 뜻을 꺾지는 못했습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계급까지 낮춘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롤랑 몽클라르씨가 파리 시내 자택에서 1951년 전쟁 중 아버지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휴가를 얻어 잠시 돌아왔을 때 두살이던 자신을 안고 있는 사진이 담긴 당시 언론 기사를 보여주고 있다./파리=손진석 기자 |
몽클라르 장군은 1951년 2월 경기도 양평군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중공군에 맞서 유엔군이 이긴 첫번째 전투로서 38선을 회복하게 된 계기였죠. 몽클라르씨는 “올해 지평리 전투 70주년이 됐다는 얘기를 듣고 있어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그립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1차대전부터 6·25전쟁까지 28번 부상을 입었습니다. 죽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죽지 않을 수 있었다는 아버지 말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제법 걸렸어요. 아버지는 한국인들을 좋아했어요. 제가 어릴 적 아버지는 한국의 경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얼마나 성실하고 예의바른 지 여러 번 이야기하셨죠. 겨울이 혹독하게 추워서 총을 쏘기 쉽지 않을 정도로 손가락이 얼어붙었다고 회상하시던 장면도 제 기억 속에 있습니다.”
롤랑 몽클라르씨는 파리 시내 자택의 거실 한켠에 아버지 랄프 몽클라르 장군이 남긴 다양한 검을 전시해놓았다./파리=손진석 기자 |
그는 몽클라르 장군이 한국에서 전쟁중이던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보관하고 있습니다. 생후 11개월짜리 아들이 후일 글을 깨우친 후 읽어보라며 쓴 일종의 기록물이라고 봐야겠죠.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중략) 너와 같은 어린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 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
◇”부자 나라가 된 한국, 자랑스럽다”
아들 몽클라르씨가 중학생이던 때 몽클라르 장군은 별세했습니다. 아들은 대를 이어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군인 월급이 적어 어머니와 여동생을 부양하기 여의치 않아 포기했고, 은행원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몽클라르씨는 위로 딸을 넷 낳고 22살인 늦둥이 대학생 아들을 뒀는데, 아들이 장교가 되기로 진로를 정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뒤를 잇고 내가 못다한 꿈을 이루겠다며 군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했습니다. 몽클라르씨의 아들은 최근 프랑스의 6·25전쟁참전용사협회에도 가입했죠.
6.25전쟁 당시 프랑스군을 이끈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딸 파비엔 몽클라르씨와 남편 베르나르 뒤푸르씨(예비역 대령)가 지평리 전투 충혼비를 찾아왔을 때 모습. 파비엔 몽클라르씨는 2017년 암으로 별세했다./조선일보 DB |
몽클라르씨는 “노병들이 계속 하나 둘 세상을 떠나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6·25전쟁 때 가난하던 한국이 지금은 손꼽히는 부자 나라가 됐습니다.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신한은행 등 한국 기업들 대단하죠. 한국이 잘 사는 나라가 된 건 몽클라르 장군의 아들로서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몽클라르씨의 여동생 파비엔씨는 2017년 암으로 별세했습니다. 몽클라르씨의 매부이자 파비엔의 남편인 베르나르 뒤푸르씨는 예비역 대령인데요. 이 분도 6·25전쟁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프랑스군에 하사한 표창기(旗)를 파리 근교에서 보다
그러면 몽클라르씨가 아들을 가입시킨 프랑스의 6·25전쟁참전용사협회를 살펴보겠습니다. 노병들이 서로 자주 만나고 한국대사관과도 연락이 긴밀하게 유지되는 건 이 단체가 잘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협회장을 맡고 있는 파트리크 보두앵(69)씨와 사무총장으로 일하는 로제 캥타르(72)씨를 만나보고 국내에 소개한 적 있습니다.
보두앵 회장은 25년간(1995~2020) 파리 동쪽 교외도시 생망데의 시장을 지냈습니다. 저는 2018년 5월 생망데 시청을 찾아가 시장실에서 보두앵씨를 만났습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프랑스군에 준 표창기(旗)를 책상 뒤에 걸어 놓고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이 대통령의 손길이 닿은 깃발을 걸어둔 시장 집무실이 있다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2018년 5월 프랑스의 6·25 전쟁 참전용사협회장인 파트리크 보두앵 생망데市 시장이 집무실에 걸어둔 표창기(旗)를 들어 보이고 있다. 6·25 전쟁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프랑스군에 수여한 것이다./생망데=손진석 기자 |
◇프랑스·에티오피아의 6·25 참전용사 해후
2019년 봄에 제가 보두앵씨를 인터뷰했던 건 계기가 있었습니다. 6·25전쟁에 참전했던 프랑스 참전 용사들과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이 만나는 행사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죠. 매우 이례적인 일이 틀림 없습니다. 한국의 국가보훈처에서 세계 각지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서울로 초청해서 모이는 행사는 종종 있었지만, 한국 정부의 주선 없이 민간 차원에서 해외 국가의 6·25 참전 용사끼리 만난다는 건 전례를 찾기 어려웠죠.
보두앵씨의 시장 집무실에 있던 명예 양구 군민증/생망데=손진석 기자 |
보두앵씨를 만났더니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주재 프랑스대사관에 근무하는 무관(武官)이 비슷한 경험을 한 양국 참전용사들을 만나게 해주자고 제안해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적극 나서서 성사됐습니다.”
보두앵씨는 당시 “기분 좋은 여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는 “1951년 프랑스군과 에티오피아군은 나란히 강원도에서 공산 세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특히 양구에서 치른 펀치볼 전투는 양국 군대가 번갈아 가며 참가한 인연이 있죠. 이제 노병들이 만나 67년 전 빛나는 무공을 추억하려 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에티오피아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51년 강원도 양구군 일대에서 벌어진 단장의 능선 전투 당시 프랑스군과 에티오피아군은 번갈아 배치된 인연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참전국 중에서 알파벳 순으로 에티오피아(E)와 프랑스(F)가 나란히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몽클라르 장군의 사위도 에티오피아의 6·25 노병들 만났다
보두앵씨는 그리졸레씨를 비롯한 프랑스 참전 용사 5명, 고인(故人)이 된 참전 용사들의 가족 4명과 함께 나흘 일정으로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습니다. 보두앵씨는 “제일 어린 분이 88세일 정도로 다들 연로하지만 흔쾌히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참전 용사 10여명이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모여서 프랑스에서 온 참전 용사들을 맞이하고 6·25의 기억을 나누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보두앵씨가 한국의 육군 2군단으로부터 받은 명예 군인증/생망데=손진석 기자 |
당시 에티오피아에 갔던 참전 용사 가족 중에는 랄프 몽클라르 장군의 사위인 베르나르 뒤푸르씨도 있었습니다. 에티오피아에 갔던 또다른 참전 용사 가족인 필리프 나바르씨는 2004년 별세한 참전용사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아버지의 유골을 양구군의 ‘프랑스 참전 기념비’ 주변에 뿌리고 돌아왔던 사람입니다.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6·25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도 상당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에티오피아는 황실 근위대 소속 정예 요원 위주의 ‘칵뉴(Kangnew) 부대’를 우리나라에 보냈습니다. 칵뉴란 ‘초전박살’이라는 뜻으로 당시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가 이기고 돌아오라는 뜻에서 지어줬습니다. 칵뉴 부대는 253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한 명도 포로가 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3520명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했습니다.
보두앵 시장은 그동안 20차례 가까이 한국을 오가며 활발하게 6·25 기념사업을 해왔습니다. 프랑스 참전 기념비가 있는 양구군 명예 군민이기도 하죠. 손녀들에게 한복을 맞춰줄 정도로 한국에 애정이 많습니다. 시장과 하원의원 겸임 시절(2002~2012) 프랑스 의회 한·불친선협회장을 지냈습니다.
2021년 5월 파리 센강 변에 있는 프랑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비의 하단에 전사자 292명의 이름을 새겨 넣은 동판을 공개하는 행사. 쥬느비에브 다리외섹 프랑스 보훈장관(오른쪽)과 유대종 주프랑스대사(왼쪽).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파트리크 보두앵 6.25전쟁 프랑스 참전용사협회 회장이다./프랑스 국방부 |
그는 “한국과 인연을 이어가는 일은 항상 즐거웠다”며 “참전용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2020년을 끝으로 25년의 시장직을 마무리하면서 생업에서는 은퇴했지만 프랑스의 6·25전쟁참전용사협회 회장직은 계속 수행하고 있습니다.
◇6·25전쟁 참전했다가 돌아와 파리에서 한국 역사 공부한 선친
프랑스의 6·25전쟁참전용사협회는 정치권 실력자였던 보두앵씨가 회장으로 전면에서 이끈다면 내부 살림은 로제 캥타르씨가 도맡아 합니다.
캥타르씨는 1997년부터 참전용사협회 일을 돕기 시작해 2009년부터 사무총장을 맡고 있습니다. 그의 선친 로베르 캥타르(1927~1995)씨는 1951년부터 1년간 강원도에서 중공군과 싸운 참전 용사였고, 캥타르씨 자신도 군인이었습니다. 대를 이어 군복을 입은 거죠.
2019년 10월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프랑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식에 참석했을 당시 로제 캥타르씨. 유엔군 문양의 넥타이를 매고 있다./파리=손진석 기자 |
캥타르씨는 참전용사협회가 파악하고 있는 생존 노병 60여명에게 ‘아들’ 노릇을 합니다. 90세 전후가 된 참전 용사들이 아플 때 찾아가 위로하거나 말동무를 합니다. 프랑스 내 9개 참전용사협회 지부 모임에도 찾아가서 노병들을 만납니다. 1년에 한 차례 만드는 협회 소식지도 혼자 만들죠. 매년 10월 파리 개선문에서 여는 6·25전쟁 기념행사 준비에도 열정을 쏟습니다. 캥타르씨는 “60여명의 참전 용사들이 모두 내게는 아버지 같다.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노병들이 하나 둘 저세상으로 떠나고 있어 마음이 아프다”고 했습니다.
캥타르씨는 선친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는 “아버지는 생전에 늘 한국을 그리워하며 도서관에서 한국 역사를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다른 노병을 도와주라는 유언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늘 6·25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라서 그런지 참전 용사들과 함께하는 일이 운명이라고 느낀다”고 말한 게 인상 깊었습니다. 캥타르씨도 18년간 직업군인이었으며, 전역 후 배관공으로 일하다 지금은 연금을 받아 생활하며 참전 용사들을 돕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 파리 개선문에서 열린 프랑스군의 6.25전쟁 참전 기념식. 제복을 입고 도열해 있는 젊은이들은 프랑스 생시르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다./파리=손진석 기자 |
캥타르씨는 2017년 “한국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긴 참전 용사 장 르우씨의 유해를 한국에 가져가 강원도 철원군 프랑스군 참전비 앞에 안장하기도 했습니다. 이때를 포함해 한국을 모두 일곱 번 방문했다고 합니다.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44명의 프랑스 전몰용사 무덤을 둘러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고 했습니다. 한국 음식 중 불고기를 특히 좋아한다는 캥타르씨는 “파리 시내 한식당을 찾아다니는 것이 큰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코로나 사태 때 한국대사관에서 마스크 선물 받고 감동받은 노병들
2020년 5월 7일 그리졸레씨와 노병들은 파리 시내 7구의 한국대사관에 찾아왔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사태 초기였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마스크가 부족해 큰 어려움을 겪던 시기입니다. 국가보훈처가 세계 각지의 노병들에게 각 100장씩 지급한 마스크를 지급하기로 결정해서 마스크를 받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국가보훈처가 마스크를 노병들에게 나눠주기 이전인 2020년 4월말 주프랑스한국대사관은 자체적으로 연락이 닿는 참전용사 66명에게 각 5장씩 마스크를 보냈습니다.
2020년 5월 주프랑스한국대사관이 방역용 마스크를 참전 용사들에게 전달하는 행사를 가졌을 때 자크 그리졸레씨(가운데)와 파트리크 보두앵 프랑스6.25전쟁참전용사협회 회장(오른쪽). 왼쪽은 최종문 당시 프랑스 대사./파리=손진석 기자 |
당시는 워낙 마스크를 구하기가 어려웠던 터라 ‘70년전 노병들에게 마스크 보내기’가 프랑스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공영방송 프랑스3는 프랑스 동부 소도비 벨포르에 살고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 미셸 오즈왈드씨를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집으로 배송된 마스크를 전달받은 오즈왈드씨 이야기가 프랑스 언론에 보도됐다. 그는 공영방송 프랑스3 인터뷰에서 "나는 88세이며 한국은 나를 조금도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프랑스3 |
오즈왈드씨는 “저는 올해 여든여덟입니다. 한국은 여전히 저를 잊지 않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고아였던 그는 농장에서 일하다 18세에 군에 입대했고, 19세이던 1951년 6·25전쟁에 파병됐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한국이 당시 함께 싸웠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있어서 감동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죽는다고 주변에서 모두 말렸고, 영하 30도 이하의 혹독한 추위가 끔찍했지만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오즈왈드씨가 방송 인터뷰에서 주프랑스한국대사관으로부터 받았다는 편지와 마스크를 보여줬다./프랑스3 |
오즈왈드씨는 ‘한국전 참전 용사(Korean War Veteran)’라는 문구가 새겨진 남색 모자를 쓰고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 모자는 국가보훈처가 세계 각지의 참전 용사들에게 보내준 것입니다.
오즈왈드씨가 방송 인터뷰에서 쓰고 있던 모자는 예전에 국가보훈처가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프랑스3 |
프랑스 북서부 소도시 아뇨에 사는 참전 용사 폴 로랑씨도 당시 일간 우에스트프랑스 인터뷰에서 “한국 대사관에서 마스크와 편지를 받아 놀랍고 기뻤다”고 말했습니다. 우에스트프랑스는 프랑스 서부 지역 최대 일간지입니다.
2020년 5월 참전 용사 폴 로랑씨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마스크를 쓰고 있는 장면이 프랑스 일간지에 소개됐다. 그는 "나는 놀랐다. 마스크를 받아 기쁘다"라고 했다./우에스트프랑스 |
로랑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참전 용사들이 없었다면 한국이 공산화됐을 것이란 점을 잘 아는 한국인들은 역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참전 용사들을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한국은 코로나 위기도 잘 빠져나왔다”고 했습니다. 로랑씨는 1952년 입대한 직후 한국에 파병돼 1년 가까이 참전했습니다.
2013년 서울에 와서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제복을 입고 경례를 하고 있는 폴 로랑씨/우에스트프랑스 |
이상으로 추석 연휴를 맞아 프랑스에서 6·25전쟁과 관련해 노병들과 그들의 후손, 노병들을 돕는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했던 이야기를 들려드렸습니다.
손진석의 글로벌 노마드 뉴스레터 구독하기 ☞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85831
[손진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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