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햄릿’에서 햄릿(강필석)과 레어티즈(박건형)가 검투를 벌이는 장면. 뒤로 왕비 거트루드(김성녀)가 보인다. 연출가 손진책은 “죽음을 사는 남자를 통해 우리 시대의 삶을 조망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신시컴퍼니 |
무대막이 걷히자 뿌옇게 언덕이 보인다. 한밤의 묘지다. 곧 죽게 될 등장인물들이 거기 나란히 서 있다. 왕이든 거지든 삶에는 끝이 있나니, 죽음만큼 평등한 것도 없다. 유랑 극단 배우들이 말한다. “춥다! 뼈가 시리게 추워!” “어둡구나. 먹물처럼 깊은 밤이다” “산 자는 잠에 들고 죽은 자 눈을 뜨네”....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개막한 연극 ‘햄릿’(배삼식 극본, 손진책 연출)은 먹물 같은 밤으로 열린다. 죽은 자들의 세계로 관객을 데려간다. 셰익스피어 원작은 400년 묵은 이야기지만, 햄릿은 오늘도 고통을 짊어진 채 죽어간다. 날마다 죽고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불멸의 고전인지도 모른다. 이번 연극은 휴대전화와 권총, 바퀴 달린 여행 가방이 등장할 만큼 현대가 배경이다.
연극 '햄릿'은 이렇게 시작된다. /신시컴퍼니 |
덴마크 왕자 햄릿(강필석)은 바닥 모를 슬픔에 빠져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숙부 클로디어스(유인촌)와 재혼한 어머니 거트루드(김성녀)를 원망한다. 무대 바닥에서 솟아오른 선왕의 유령은 말한다. “클로디어스가 나를 독살했다.” 죽은 왕이 왕자의 마음 깊숙이 들어앉는 순간이다. 햄릿은 연인 오필리어 앞에서 미친 척을 하고, ‘쥐덫’이라는 연극으로 진실을 들추고, 엉뚱하게 폴로니우스가 죽는 과정이 쾌속으로 펼쳐진다. 건조한 번역 투가 아니라 말맛이 달큼하다.
연극 '햄릿'의 배우 박정자, 손숙, 손봉숙, 길해연, 윤석화(왼쪽부터). 모두 이해랑연극상을 받았다. /신시컴퍼니 |
셰익스피어를 공연하려면 배우들에게 연륜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번 ‘햄릿’에는 이해랑연극상 수상자 10명이 출연한다. 연기 경력을 합치면 500년. 평생 6번이나 햄릿을 맡은 유인촌은 클로디어스로, 전무송은 유령으로, 박정자는 배우1로, 손숙은 배우2로, 정동환은 폴로니우스로 각각 물러났지만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배역은 없다”는 말을 증명한다. 또렷한 해석과 깊이, 부드러운 가속과 감속으로 존재감을 뿜어냈다. 명배우들이 무대를 떠받치는 동안 햄릿 강필석과 오필리어 박지연, 호레이쇼 김수현도 큰 무게를 감당하며 관객을 사로잡았다.
햄릿(강필석)은 숙부 클로디어스(유인촌)에게 복수하려 하지만 그가 기도를 하는 중이라 행동을 미룬다. /신시컴퍼니 |
무대미술(박동우)은 조리개처럼 열리고 닫히는 철벽, 차가운 대리석 계단이 지배적이다. 검은 흙과 돌이 무대를 감싸고 있었다. 누구나 죽어 흙으로 돌아간다는 섭리를 깔아둔 셈이다. 이 연극은 도처에 만연한 죽음, 그러나 우리가 외면하는 죽음을 렌즈로 삶을 마주하게 한다.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To be, or not to be)~”는 복수를 망설이던 햄릿이 영국으로 쫓기듯 떠나는 대목에서 흘러나온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운명의 발길질을 견딘들 무슨 소용인가. 햄릿은 마침내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돌아온 햄릿이 무덤지기(권성덕)를 통해 해골이 된 왕의 어릿광대와 재회하고 오필리어의 최후를 알게 되는 대목에서 가슴이 쿵 울렸다. 햄릿과 레어티즈(박건형)의 검투로 죽음의 행렬이 시작된다. 어느 순간 무대는 거대한 무덤처럼 보인다. 연극은 되감기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에 첫 장면을 다시 보여준다. 남는 것은 침묵뿐. 관객은 뜨거운 기립 박수로 응답했다.
연극 '햄릿'의 무덤지기 권성덕. 커튼콜 때는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 /신시컴퍼니 |
‘햄릿’은 두 배우의 코로나 확진으로 24일까지 공연이 멈췄다. 원 캐스트(배역 하나당 배우 1명)를 선택할 때부터 짊어진 숙명이었다. 관객은 40대(25.3%), 30대(24.6%), 20대(24.7%)가 비슷하다. 50대도 14.7%에 이른다. 평점은 10점 만점에 9.4. “2022년 최고의 작품.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 보지 않은 게 문제”라는 후기가 올라왔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펀치력을 맛볼 드문 기회. 러닝타임 3시간이 쏜살같다. 공연은 8월 13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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