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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100년 전 ‘산소같은 그녀’는 누가 찍었을까... ‘모던경성’과 함께 떠난 시간여행

조선일보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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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름한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띤 여성의 초상사진이다. 1920년대 이홍경이 찍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 도장과 남편인 채상묵이 감수했다는 인장이 찍혀있다./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갸름한 얼굴에 활짝 미소를 띤 여성의 초상사진이다. 1920년대 이홍경이 찍었다. 인사동 경성사진관 도장과 남편인 채상묵이 감수했다는 인장이 찍혀있다./ 한미사진미술관 소장


1921년 5월25일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사진관 개업광고가 실렸습니다. ‘신문화를 건설하며 새 사업을 이루려는 우리 사회에 오직 그 요소인 예술적 관념이 결핍하옴은 우리의 항상 감탄하는 바인 줄로 생각해와 본인이 이에 다년간 연구해온 결과….’

종로구 관철동 75번지 우미관 앞이란 주소와 함께 ‘朝鮮婦人寫眞館 主 李弘敬’이라고 이름을 내걸었습니다. 이홍경은 당시 조선에 거의 유일한 여성 사진사였습니다. ‘모던 경성’은 이홍경을 비롯, 첫 여성 비행사 권기옥, ‘부인공개장’ 기획한 기자 윤성상 등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여성들의 도전을 소개해왔습니다.

◇창간 이후 기사 295만건 ‘한국 근현대사 보물창고’

조선닷컴 특별기획 ‘모던 경성’은 2020년 3월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아 공개한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newslibrary.chosun.com)를 바탕으로 탄생한 기획입니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은 1920년3월 창간부터 1999년까지 조선일보 지면 26만1589면, 기사 295만 건을 담은 한국 근현대사의 ‘보물 창고’입니다. 독자 누구나 조선닷컴에 접속하면, 클릭 한번에 100년 간 기사를 손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여성사진사 이홍경

여성 사진사 이홍경(파란 글자를 누르면 해당 기사에 연결됩니다) 의 스승은 궁중화가 채용신의 셋째 아들이자 초상화가였던 남편 채상묵이었습니다. 이홍경의 광고마케팅은 성공적이었던 모양입니다. 남녀 내외가 심해 남자가 여성을 촬영하는 게 어려웠던 당시 여건상, 여성 사진사는 여성 고객을 끌어들이는데 최고의 카드였습니다. 덕분에 부인사진관은 개업 10개월만에 건물을 2층으로 확장하고 설비를 대거 들일 만큼 성황을 이뤘습니다. 1924년을 전후해 남편까지 그림에서 사진으로 전업하면서 사진관 이름을 ‘경성사진관’으로 바꿨고, 이듬해 종로1가에 분점을 낼 만큼,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6년 쯤엔 이 사진관을 넘기고 인사동으로 자리를 옮겨 ‘경성사진관’을 개업했습니다.

◇첫 여성사진사는 1907년 ‘향원당’

1926년 신문에 ‘아직 조선에서 오직 하나인 여자사진사’ 이홍경을 소개하는 기사가 났습니다. ‘8년전부터 남편과 함께 사진술을 공부하여 현재 인사동에 경성사진관을 열었고, 한편으로 근화여학교 사진부 생도들을 가르치나니 조선에 첫 시험인 그에게 사진사로서의 설움과 기쁨’(조선일보 1926년 5월18일 ‘조선여성이 가진 여러 직업 8-사진사’)을 인터뷰한 기사였습니다.

이홍경은 조선의 두번째 여성 사진사였습니다. 첫번째 기록은 고종의 시종인 김규진(1868~1933)이 1907년 경성 석정동에 개설한 천연당사진관에서 활동한 향원당(香園堂)이라고 합니다. 천연당사진관은 개업초부터 여성 사진은 여성이 촬영한다는 광고를 신문에 냈습니다. 1907년10월2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부인사진사 향원당’명의 광고입니다. 향원당은 김규진 아내 김진애라는 주장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습니다.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귀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중국에서 비행사로 활약할 당시의 권기옥. 상해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에 참여하다 상해로 망명한 권귀옥은 1925년 운남육군항공학교를 졸업, 비행사의 길을 걸었다./조선일보DB

◇ ‘日帝 폭격하려고 비행사 됐다’

‘조선에 처음인 여류비행가 권기옥 양은 금년에 중국 운남(雲南)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방금 그 학교에서 비행기를 연습하는 중이다.’(‘외국에 노는 신여성’ 권기옥양, 조선일보 1925년 5월21일)

조선의 첫 여성 비행사의 탄생을 알리는 기사가 신문에 났습니다. 스물네 살 권기옥이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는 1923년12월 동포 청년 3명과 함께 운남 육군항공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항공대 창설을 구상하던 상해 임시정부의가 주선했습니다. 1925년 2월 항공학교를 졸업한 권기옥은 조선 여성 최초의 비행사가 됐습니다.


평양 출신인 권기옥은 숭의여학교 졸업반 때 3.1만세시위를 하다 체포당하고, 임시정부 연락원과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가 6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1920년 10월 그의 뒤를 밟던 형사의 추적을 피해 목선을 타고 상해로 탈출했습니다. 여학교 시절인 1917년 경성 여의도를 방문해 곡예비행을 선보인 미국인 스미스 뉴스를 접하면서 키운 비행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운남육군항공학교에 들어간 겁니다. 권기옥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터무니없는 이유로 비행술을 배우려 했다. 비행기에 폭탄을 가득 싣고 일본까지 가서 폭격을 할 생각이었다’(‘공군의 날에 붙이는 공군의 할머니’, 조선일보 1965년10월3일)

◇이상화 형인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

권기옥은 1926년 초 독립운동가 이상정과 결혼했습니다. 이상정은 저항시인 이상화의 맏형으로 오산학교 교사를 지내다 망명했습니다. 장개석 국민군에 가담한 풍옥상(馮玉祥) 부대에서 준장급 참모로 있었습니다. 권기옥은 이듬해 상해로 가서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약했습니다. 조선의 첫 비행사 안창남, 서왈보, 최용덕, 민성기 등이 중국군에 들어가 창공을 누비고 있었을 땝니다. ‘중국혁명전선의 조선인 비행가’(중외일보 1927년8월28일)기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권기옥은 남편 이상정과 함께 1936년 하반기 일본 밀정이라는 모함을 받아 8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풀려났습니다.그는 항일전쟁 기간 중 육군참모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면서 1943년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했고, 중국 공군에 몸담고 있던 최용덕(1898~1969·공군참모총장·국방장관)과 광복군 비행대 편성을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1949년 귀국한 권기옥은 국회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을 지냈습니다. 한참 뒤인 일흔 여섯 권기옥이 다시 신문에 났습니다. 1975년부터 장학기금 1000만원을 만들어 고교,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몰래 주고 있다는 보도였다.(’남몰래 준 ‘할머니 장학금’, 조선일보 1977년 2월11일) 권기옥은 당시 인터뷰에서 “‘나 대신 조국에 유익한 일을 해달라’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1947년 10월 모친상으로 먼저 귀국한 이상정은 한달만에 뇌일혈로 급사했습니다.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불평등과 차별 공개 비판한 ‘부인공개장’

‘가면을 쓴 남성들에게 보냅니다.’

100년전 도발적인 제목의 글이 신문에 실렸습니다.’경성 李0淑'이라고 밝힌 필자는 인텔리 남성들을 향해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조선 여자가 해방을 얻자면, 먼저 조선이란 조건밑에서 신음하는 남자들과 약속하지 않으면 아니되겠다 하여 남자들과 한 자리에 나아가려 하면 당신들은 한 동지로서의 교훈이나 지도를 주지 않고 의례히 첫 교제수단으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ㅡ든 수단을 써가며 아직 사회적 훈련이 적은 우리 여성에게 호기심이나 사게하고 성적(性的)XX을 얻기 위하여 감언이설로 교제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여성들이 고분고분 따르지 않으면 ‘모성을 무시하느니, 처녀미를 존중치 않느니, 사회에 풍기를 문란케 하느니 하는 역선전을 하지 않습니까’(이상 1929년 10월30일자 조선일보 ‘가정부인’면). 진보적 남성의 위선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윤성상.스물한살때였다. 가정면을 전담한 윤성상은 성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 계몽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1928년 조선일보 기자로 입사한 윤성상.스물한살때였다. 가정면을 전담한 윤성상은 성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 계몽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였다.


◇'갑갑한 하소연, 속상하는 사정 적어보내시오’

이 글은 조선일보가 1929년 9월부터 연말까지 진행한 ‘부인공개장’기획의 일부였습니다. 구시대적 차별과 억압 아래 있는 여성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기회를 마련하자는 취지였습니다. 하루에 수십통씩 투고가 쏟아졌습니다. 첫회인 9월3일자엔 전남 고흥읍에 사는 김봉자란 여성의 글 ‘아버님! 반성해주십시오’가 실렸습니다. 부모로부터 원치않는 결혼을 강요받는 미혼 여성의 고민을 담았습니다.

‘저주하라! 조선의 가정제도를’(9월10일), ‘이러한 남자들은 하루바삐 각성하라’(10월12일). 연일 과감한 제목의 기고가 석달간 계속됐습니다. 그러자 남자들의 의견도 반영하겠다며 ‘여성에게 보내는 말’ 공개투고도 모집했습니다. ‘여성운동보다 먼저 사람이 돼라’(11월26일) ‘배웠다는 여성들 정조를 지킵시다’(12월6일)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요즘과 다름 없는 날 선 공방이 오갔습니다.

이 기획 책임자는 학예부에 근무하던 여기자 윤성상(1907~1978)이었습니다. 동경여자고등사범학교를 중퇴한 그는 1928년 주필이던 민세 안재홍 추천으로 입사했습니다. 그는 ‘내가 담당하고 있는 가정란의 초점을 아직도 봉건의 깊은 안방속에 잠자고 있는 우리 여성들을 위한 계몽에 두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훗날 회고했습니다. 앞서간 사람의 분투가 있었기에 오늘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신문 읽듯 100년간 신문을 편안하게 볼 수있습니다.

‘모던 경성’은 이렇듯 100년 전 사람들의 경험과 감각을 충실하게 따라가며 과거를 편견 없이 들여다보는 시도입니다. 조선닷컴에서 ‘김기철의 모던 경성’을 검색하시면 지난 1년간 연재된 기사(총 53회)를 한꺼번에 볼 수 있습니다.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의 강점은 이미 역사가 된 과거를 오늘 신문 읽듯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한자가 많은 옛날 기사 원문과 함께 요즘 말로 옮긴 현대문을 함께 서비스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00년간의 사건과 인물이 궁금하시면,’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을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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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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