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가 1989년 사법연수원 졸업식에서 어머니 구호명 여사와 찍은 기념 사진./이재명 후보 캠프 제공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5일 자신의 소년공 시절을 회상하며 “덜 가진 사람, 사회적 약자에게 우리 사회는 따뜻한 울타리가 돼주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난해 별세한 어머니 구호명 여사와의 추억을 언급했다.
이 후보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직후, 3년 전 앞서 성남으로 올라간 아버지를 따라 나머지 가족도 모두 상경했다. 1976년 2월이었다”며 “내 출신성분은 공구로 가득했던 그날의 이삿짐만 보아도 분명했다. 시쳇말로 흙수저도 못되는 무수저”라고 했다.
이 후보는 “열세 살, 월세집 뒷골목 주택에서 목걸이를 만드는 가내공장에 취직했다”며 “연탄 화덕을 두고 빙 둘러앉아 염산을 묻힌 목걸이 재료를 연탄불 위에서 끓는 납그릇에 담가 납땜하는 일이었다”고 했다. 당시 이 후보는 종일 연탄 가스와 납 증기를 마셨는데 그럴 때마다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했다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유해물질인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 월급 3000원을 받았던 얼마 뒤 이 후보는 월급 1만원을 준다는 공장으로 옮겼다. 아침 8시30분에 출근, 밤 9시까지 하루 12시간을 일하는 생활이었다. 그는 “점심은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먹었고 집에 와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며 “파김치가 돼 귀가하면 엄마가 밥상을 내왔다. 엄마는 밥그릇에 얼굴을 묻고 허겁지겁 밥을 먹는 나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 후보는 “힘들었던가? 나는 자기연민에 빠질 틈이 없었다”며 “시장통 공중화장실을 청소하고, 휴지를 팔고 소변 10원, 대변 20원 이용료를 받던 어머니와 여동생이 더 아팠다”고 했다. 이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주던 엄마는 그런 일을 했다. 엄마는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어 끼니도 화장실 앞에서 때웠다”며 “집에서는 시멘트 포대를 털어 봉투를 접어 팔았다. 그런 엄마가 가여웠고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안달했다”고 했다.
이 후보는 “잊히지 않는, 아니 기억하려 애쓰는 삶의 경험 때문에 가진 게 없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가혹할 수 있는지 안다”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수많은 누군가의 사연을 들으면 한없이 조급해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그런 이들을 아끼고 보살피는 공동체여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글이나 헬조선이 아닌 행복한 보금자리일 수 있다”고 강조한 이 후보는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 하고 있는 일 모두 그 연장선에 있다. 그 일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어서 치열할 수밖에 없고 포기할 수도 없다”고 했다.
[원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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