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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성희롱 61% 권력형 … “운 나빠 걸렸다” 범죄로 생각 안 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유명 헤어디자이너 박준(62)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미용실에서 비서 A씨를 수차례 성폭행했다. 올해 경기도 양평에서 열린 직원 세미나에선 술에 취해 직원 B씨 등 2명을 성추행했다. A씨는 “박씨가 성관계를 요구했을 때 거부하고 싶었지만 회사 대표라 반항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대해 박씨는 “합의하에 한 것으로, 강압적으로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박씨는 피해 여성의 고소 취하로 법적 처벌은 면했지만 경영 일선에선 물러나야 했다.

#지난주 서울 여의도 금융가의 한 식당. 부서 전체회식 자리라 술잔이 제법 오갈 법도 했지만 분위기가 왠지 서먹하기만 하다. 좌석도 마치 미팅이라도 하는 듯 여직원들은 한쪽에 모여 앉아 있다. 김모 부장은 “최근 성희롱 파문이 커지면서 남자 직원들이 여직원들 옆에는 가급적 앉지 않으려 해서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야 할 정도”라며 “사회 분위기가 워낙 안 좋다 보니 서로가 말 한마디도 조심하는 등 부쩍 몸을 사리는 모습”이라고 전했다.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인턴 성추행 의혹 사건으로 우리 사회의 성윤리가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특히 평소 존경받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어이없는 엽기적 성추행에 국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경찰에 신고된 성추행·성폭행 등 성범죄는 모두 2만2935건. 이 중엔 교수·의사·변호사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성추문도 적잖다. 2005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국가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성희롱·성추행 진정사건 1152건 중 704건(61.1%)은 업무상 상하관계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가해자도 기관·기업 대표(33.5%)나 중간관리자(30.8%)가 평직원(24.1%)보다 월등히 많았다.

이뿐이 아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09년부터 지난해 6월까지 전국 초·중등학교에서 성윤리 문제로 징계받은 교사는 111명에 달했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조가 지난해 병원 내 성희롱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간호사의 31.9%가 의사에게서 폭언 및 성희롱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성범죄가 직업과 장소를 불문하고 확산되고 있는 셈이다.

업무상 지위 악용하는 경우 많아

성추문 사건이 늘면서 범죄 유형도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게 ‘권력형 성추행’이다. 2009년 ○○시립합창단 단원들은 지휘자 이모씨가 성추행을 했다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다. 이씨가 연습시간에 단원들을 은근슬쩍 만지고, 일부 단원은 지휘자실로 불러 듣기 불쾌한 얘기를 건넸다는 것이다. 피해자들은 이씨가 “저를 좀 꼬셔 보세요” “네가 예뻐서 그러는 것”이란 언동을 일삼았다고 했다. 이씨는 윤 전 대변인 같은 변명도 했다. “일부 단원이 공공연히 지휘를 거부하려는 분위기를 조장해 대화를 위해 단원들을 부른 것”이란 해명이었다. 하지만 인권위는 “업무상 지위를 이용해 성추행을 했다”고 결론 내렸다.

충남 청양군에서 장애인재활근로센터를 위탁 운영하던 지역장애인단체 이모(59) 회장은 지난해 8월 20~30대 미혼 장애인 여성 3명을 성추행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피해자들은 모두 지적장애인 2~3급으로 미혼이었다. 이씨는 퇴근하는 피해자들을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유인해 차에 태운 뒤 가슴 등을 만졌다. 이씨는 회원들이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반항하면 “나가게 하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고, 이 때문에 설령 성추행 사건이 벌어져도 잘못했다는 생각을 안 하기 일쑤”라고 이들의 심리를 분석했다.


권력을 더욱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질 나쁜 추행 사례도 적잖다. 뭘 해주겠다고 제시하는 ‘대가형 성추행’이 대표적이다. 2011년 모 대학에서 통상영어 수업을 받던 김모씨는 중간고사 시간에 30분 지각했다. 사정을 전해 들은 이모 교수는 “성적은 보장해 주겠다. 이왕 시험 칠 거면 좋은 곳에 가서 보자”며 호텔 수영장으로 김씨를 데려갔다. 그는 시험 도중 답까지 불러주며 김씨의 손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면접 과정에서도 성추행은 종종 일어난다. 지난해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 교장은 비정규직 여직원을 뽑으면서 면접 여성에게 가슴 사이즈를 물어보는 등 성희롱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돼 직위해제됐다.

심지어 피해자를 업무 중 성추행하는 경우도 있다. ‘업무공간형 성추행’이다. 2007년 산부인과 의사 C씨는 지방분해 흡입시술을 상담하러 온 피해자를 간호사 등 보조인원이 모두 퇴근한 뒤 병원으로 따로 불렀다. C씨는 허벅지에 주사를 놓으며 피해자의 몸을 더듬었다. 지난해에는 전모 검사가 검사실에서 상습절도 피의자와 조사 도중 성관계를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은 이를 권력자의 ‘완장 심리’로 설명했다. 그는 “성적인 문제가 없는 정상적인 사람들도 권력을 쥐면 아무 여자나 자기에게 충성을 바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며 “어느 정도 위치까지는 욕구를 참다가도 높이 올라가 견제장치가 사라졌다 싶으면 독단적 행동을 벌이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런 유형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다. 보상심리다. 최항섭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치열한 경쟁을 통해 고위직에 오른 경우 ‘내가 얼마나 많은 걸 투자했는데’라는 본전 생각에 아무 거리낌없이 부정을 저지르게 된다”고 지적했다.


남성중심적 사회 분위기도 한몫


이 같은 ‘갑의 횡포’와 함께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남성중심적 사고도 성추행이 빈번해진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평소엔 지도층으로 점잔을 빼다가도 술만 마시면 돌변하는 ‘주사형 성추행’이 대표적 경우다. 매너가 좋아 ‘신사’라는 별명을 가진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술만 마시면 옆에 앉은 여성을 더듬는 등 야수로 돌변해 수차례 구설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법조계의 ‘신사’로 통하고 있다.

‘회식 자리형 성추행’은 이제 단골 소재다. 공부깨나 했다는 대학병원 의사들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해 대한전공의협의회 조사에 따르면 여성 전공의 631명 중 285명(45.2%)이 성희롱을 경험했는데 대부분 회식 때였다. 전공의 D씨는 “술자리에서 선배들이 야한 농담을 하며 특정 신체 부위를 거론했지만 막 전공의가 된 때여서 남몰래 울 수밖에 없었다”며 “그만 집에 가겠다고 하자 ‘××, 전공의 주제에 어딜 가’라며 욕을 해댔다”고 털어놨다.

성추행 처벌이 약한 현실은 ‘습관형 성추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제주시에서 체육관을 운영하던 E씨(48)는 2010년 3월 일곱살 여자아이의 몸을 더듬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그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사람 이름으로 다시 체육관을 열었고, 지난해 3월 도복 끈을 묶어주겠다며 초등학교 여학생에게 접근한 뒤 두 차례 성추행했다. 결국 그는 징역 3년에 정보공개 5년, 전자장치 부착 6년을 선고받았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상대방도 좋아하는 줄 알았다”고 강변하는 ‘왕자병형 성추행’이나 “이 정도 가지고 성추행이 되느냐”고 변명하는 ‘발뺌형 성추행’도 적잖다. 고은태 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사장은 올 초 앰네스티 여성 회원에게 특정 부위가 보이는 사진을 달라고 한 뒤 각각 주인과 노예 역할을 맡자고 제안했다. 피해 여성은 고씨가 자신의 엉덩이를 때리게 하고 싶다는 등의 표현을 썼다고 폭로했다. 이에 대해 고씨는 “상대방도 그런 대화에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명했다. 정광수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은 지난달 여기자 6명이 동석한 자리에서 ‘빨아 보고…’라는 가사가 담긴 외설적인 노래를 불러 입방아에 올랐다. 환경부 차관까지 나서 사의를 요구했지만 그는 “사퇴할 사안은 아니다”고 버텼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중년 남성들 사이엔 심지어 윤 전 대변인에 대해 ‘운이 안 좋았다’는 인식조차 있는 게 사실”이라며 “이 같은 심리엔 성폭행을 해야 범죄지 그전까지는 범죄가 아니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고 꼬집었다.

권력을 쥔 갑의 전형적인 행태

현실은 가혹하지만 해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1993년 ‘우 조교 사건’ 때 조교 측 변호을 맡았던 최은순 변호사는 “성희롱 예방을 위한 교육제도나 처벌규정은 계속 보완돼 왔지만 성희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요령껏 잘 피하면 된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항섭 교수도 “윤 전 대변인이 해명 중 ‘화가 나서 (인턴을) 꾸짖었다’고 했는데, 이는 권력을 가진 전형적인 갑의 행태”라며 “높은 자리에 오르는 순간 많은 권력을 얻게 되지만 이를 통제할 장치는 부족하다 보니 자기 권력에 쉽사리 도취돼 버리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의 잇따른 성추문은 재산이나 병역에 비해 성에 대한 윤리기강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이 성범죄 예방교육의 중요성을 한목소리로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최강현 경찰청 가정폭력분과 정책자문위원은 “현재의 50~60대는 성희롱이 뭔지, 왜 성희롱을 해서는 안 되는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세대”라며 “그러다 보니 ‘이 정도면 문제가 없겠지’란 생각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이나 공공기관에서 리더십·커뮤니케이션 교육만 할 게 아니라 성희롱에 대한 실질적인 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최 변호사는 “실제 교육을 나가 보면 오히려 최근 입사한 젊은 평사원들은 성희롱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데 반해 윗사람일수록 관심도, 경각심도 없는 경우가 적잖다”며 “예방교육도 형식적인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되고, 고위직도 교육 대상에서 예외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성희롱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최근 직장 내에서는 새로운 회식 풍속도 생겨나고 있다. 성추문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다. 처음부터 남녀 직원이 따로 앉는가 하면 한두 명의 감시자를 지정해 문제가 될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직원을 골라내도록 하기도 한다.

회식을 하더라도 2차는 가지 않고 노래방은 웬만해선 피하는 경향도 늘고 있다. 예정에 없던 번개회식도 금물이다. 한 대기업 간부는 “직원들에게 음담패설 등을 삼가고 동료 간에도 존칭을 쓰도록 권유했다”며 “그래도 문제가 생길 경우에 대비해 신고요령 등을 숙지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글=이상화·송지영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상화.송지영.권혁재 기자 shotg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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