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성의 아파트
박철수·권이철·오오세 루미코·황세원 지음 | 집 | 488쪽 | 2만7000원
1930년대 경성의 신문에는 아파트에 대한 기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선례를 따라 경성에도 임대용의 복층 이상 아파트가 하나둘씩 지어지던 시기였다. 1931년 1월31일자 매일신보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들어선 동심원 구조의 아파트 단지를 ‘기관’, 즉 기이한 광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한 아파트도 잇달아 소개했다. 스웨덴 집권당이던 사회민주당이 주택정책, 도시계획의 질서를 강조하며 추진한 아파트도 인상적이다. 중앙난방 방식이 주로 채택됐고, 다양한 공용시설이 계획됐다. 지상의 식당에서 각 가구로 음식을 배달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세탁물 운반장치도 고려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어선 31층짜리 아파트 소식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때 소개된 아파트들 다수가 사회주의적 공동주택에 가깝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신문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관심을 가졌을 리는 없다. <경성의 아파트> 저자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주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로지 높이와 넓이 나아가 조선총독부가 내건 식민지 ‘명랑화 운동’과 생산력 확충 그리고 국민총동원령 등을 위한 일종의 도구”였다고 판단한다. 실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로 재편되면서부터 아파트에서는 연맹 또는 애국반이 조직되기도 했다. 오늘날 서울의 아파트가 자본주의적 성공과 욕망의 핵심 요소처럼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경성의 아파트
박철수·권이철·오오세 루미코·황세원 지음 | 집 | 488쪽 | 2만7000원
(왼쪽부터) 조선신문 1935년 6월1일자에 실린 내자동 미쿠니 아파트의 호화 낙성식 풍경. 시미즈건설주식회사가 보유중인 내자동 미쿠니 아파트 모습. ‘조선과 건축’(1930)에 소개된 남산동 미쿠니아파트 외관. 오늘날까지 공동주택으로 사용중인 남산동 미쿠니아파트. 사진·도서출판 집 제공 |
1930년대 경성의 신문에는 아파트에 대한 기사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선례를 따라 경성에도 임대용의 복층 이상 아파트가 하나둘씩 지어지던 시기였다. 1931년 1월31일자 매일신보는 독일 라이프치히에 들어선 동심원 구조의 아파트 단지를 ‘기관’, 즉 기이한 광경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한 아파트도 잇달아 소개했다. 스웨덴 집권당이던 사회민주당이 주택정책, 도시계획의 질서를 강조하며 추진한 아파트도 인상적이다. 중앙난방 방식이 주로 채택됐고, 다양한 공용시설이 계획됐다. 지상의 식당에서 각 가구로 음식을 배달할 수 있는 엘리베이터, 세탁물 운반장치도 고려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들어선 31층짜리 아파트 소식에 식민지 조선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을 것이다.
흥미로운 건 이때 소개된 아파트들 다수가 사회주의적 공동주택에 가깝다는 점이다. 조선총독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신문들이 사회주의 이념에 관심을 가졌을 리는 없다. <경성의 아파트> 저자들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주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로지 높이와 넓이 나아가 조선총독부가 내건 식민지 ‘명랑화 운동’과 생산력 확충 그리고 국민총동원령 등을 위한 일종의 도구”였다고 판단한다. 실제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전시체제로 재편되면서부터 아파트에서는 연맹 또는 애국반이 조직되기도 했다. 오늘날 서울의 아파트가 자본주의적 성공과 욕망의 핵심 요소처럼 여겨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오늘날 서울시민의 40% 이상, 전국적으로 50%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경성의 아파트>는 서울에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1930년대를 살펴본다. 당시 아파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누가 짓고 살았는지, 집세는 어느 정도였는지 꼼꼼히 찾는다. 이를 위해 당시 소설, 신문, 잡지, 전화번호부까지 뒤졌다. 풍부한 도판과 통계 자료를 제시한 학술서에 가깝지만, 일반 독자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많은 신문물이 그러하듯, 처음 소개된 ‘아파트’ 개념은 모호했다. 오늘날처럼 개인이 사서 장기간 거주하는 개념이 아니라, 일본계 민간회사가 지어 필요한 사람에게 일정 비용을 받고 대여하는 형식이었다. “고급 여관인 호텔과는 조금 달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학생이나 회사원처럼 장기간 거처를 빌려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는 통상의 하숙도 아닌 그 무엇이 바로 아파트였던 셈이다.”
1930년대 경성에는 70곳 이상의 아파트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아파트 열기는 경성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는 사실과도 관련 있다. 조선시대 500년간 한양 인구는 10만~20만명으로 유지됐으나, 1920년대 들어 25만명으로 늘어나더니 1930년대에는 40만명이 됐다. 독신 노동자를 위한 임대용 숙소가 필요해졌고, 이때 나타난 것이 아파트라는 주거형태였다.
새로운 개념의 주거형태인 아파트는 곧 ‘풍기문란’의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늘날 아파트가 입주자들을 위한 폐쇄적인 공간으로 여겨지는 것과 달리, 당시 아파트는 1층에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사교공간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종의 주상복합건물이었던 것이다. 이 공간에서 마작을 하거나 당구를 치는 사람들이 늘었고, 심지어 댄스홀이 열리기도 했다.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아파트로 몰려들자, 세태를 비판하는 시선도 그만큼 늘어났다.
경성의 많은 아파트는 독신 노동자를 위한 공동주택 성격을 가졌지만, 특권층을 위한 아파트도 있었다. 1935년 6월 내자동 미쿠니아파트 낙성식은 신문에 사진과 함께 보도될 정도로 호화로웠다. 300여명의 유력자가 내빈으로 참석했고, 기생들의 여흥 행사가 이어졌다. 이 아파트에는 임대용 방이 69실 있었는데, 입주 신청자가 150명을 넘었다고 한다. 아파트 옥상에 오르면 지척의 조선총독부와 남쪽의 경성신사, 조선신사까지 바라보였다고 하니, 조망권이 좋은 초고급 거주시설이었던 셈이다.
경성의 아파트는 일본 출신 임대사업자의 이득, 도시 노동자의 주거공간을 확보하려는 총독부 계획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30년대 후반 들어 일본은 전시체제로 들어섰고, 식민지에 대한 수탈 역시 가혹해졌다. 총독부는 인력과 물자는 최대한 수탈할지언정, 주거만은 안정시켜줄 필요를 느꼈다. 1939년 10월 총독부는 국가총동원법에 기반한 지대가임통제령(地代家賃統制令)을 발포했다. 소작료, 임대료를 칙령 제정 이전 해인 1938년 12월31일 가격을 초과해 받을 수 없게 강제한 것이다. 만일 이미 초과해 받고 있었다면 즉시 인하하도록 했다. 저자들은 대륙전진 병참기지인 조선의 인적 자원을 일상적 상태로 유지·증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고 해석한다.
가혹한 일제 통치자들도 주거권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식민지 조선인들의 들끓는 불만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본 것 같다. 부동산 문제로 정권이 타격을 입는 요즘 상황을 보면, 식민지 경영자들에게 최소한의 통치전략은 있었다고 봐야 할까.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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