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SBS 언론사 이미지

[인-잇] "소송에 졌는데, 판결문에 이유가 없어요"

SBS
원문보기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저서 <불량 판결문> 中

[주문]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소송 비용은 원고가 부담한다.

[청구취지]
피고는 원고에게 23,359,200원 및 이에 대한 이 사건 소장부본 송달 다음 날부터 다 갚는 날까지 연 15%의 비율로 계산한 돈을 지급하라.

[소액사건 판결 이유 생략]


최근 우리 사무실에 한 분이 판결문을 가지고 찾아왔다. 치과 진료를 받다가 의료사고를 당했는데, 2년 넘게 소송을 진행했지만 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분이 화가 나는 건 판결문을 통해서는 소송에서 진 이유를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 분이 가지고 온 판결문은 달랑 두 장이었다. 사건명, 원고, 피고 표시 등을 제외하면 사실상 딱 앞에 쓴 대로 여섯 줄이었다. 한마디로 '청구를 기각한다. 그러니 소송 비용을 부담하라'가 끝이 판결문.




거짓말 같았던 이 분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대법원 나의 사건 검색'이라는 법원 운영 사이트를 통해 이 분이 2017년 2월 28일 소송을 제기해 재판을 시작했다는 것과 2019년 10월 24일 판결 선고가 이루어진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판결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주문'의 세 가지 의미가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억울한 국민들이 억울함을 제대로 헤아려달라며 법원에 신청한 주문(注文)에 대해 판사는 성의없이 주문(主文)만 기재하고 그 이유를 기재하지 않는 판결문을 내놓았다.

마법과 같은 주문(呪文)을 외우면 판결 이유가 나오는 것일까? '혹시 판결문 끝에 있는 문구가 마법과 같은 주문(呪文)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당사자는 이 말의 의미를 물어오셨다. 판결문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소액사건의 판결서에서는 소액사건심판법 제11조의 2 제3항에 따라 이유를 기재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당신이 제기한 소송 금액이 3,000만 원이 넘지 않기에 소액사건으로 분류되었고, 소액사건심판법상 소송금액이 3,000만 원 넘지 않은 소액사건은 그 이유를 기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규정하므로 판결문엔 판결 이유를 기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대로 설명드렸더니 의뢰인은 한참 화를 내셨다.

"왜 제 사건이 소액사건이죠? 제가 청구한 2,400만 원은 제 전 재산보다도 많은 돈인데요"


이 문구는 판결 이유를 알려주는 주문(主文)이 아니라, 화를 부르는 주문(呪文)이었을까? 한참 동안 화를 내고 돌아서며 그 분은 이런 말을 남겼다.

"왜 졌는지 이유를 알아야 항소를 할지 말지 결정할 게 아니에요..."

결국 그분은 항소를 포기했고, 이렇게 억울함을 해결해달라는 주문(注文)은 응답받지 못했다.


청구 금액이 상대적으로 작은 사건에 '소액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인 건 1973년 소액사건심판법이 제정되면서부터이다. 최초 법 제정 당시 20만 원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사건으로 시작한 소액사건의 범위는 1980년부터는 법률이 아닌 대법원규칙으로 바뀌었고, 이후 대법원은 그 범위를 넓혀 2017년에는 3,000만 원에 이르었다. 그리고 소액사건의 경우 판결 이유를 생략할 수 있는 제도는 1981년부터 시행되어 지금에 이른다.

사법부가 제한된 인력으로 각종 소송을 더욱 능률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이러한 조치를 취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청구 금액의 규모만을 기준 삼아 판결 이유 기재를 생략 가능하도록 한 것은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등한시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2020년 법원이 발표한 자료(사법연감)를 보면 2019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 소송은 94만 9,603건이고 그중 소액사건은 68만 1,576건이다. 즉 소액사건이 무려 71,7%를 차치한다(2019년 법원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18년 전국 법원에 접수된 민사 소송은 95만 9,270건이고 그중 소액사건은 70만 8,760건으로 무려 73,9%를 차치한다). 일반인들이 생활에서 겪는 대부분의 사건에 소액사건이라는 딱지를 붙여 사건 처리 능률을 높이기 위해 청구금액에 따른 기준을 정하는 것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


빌려 준 3억 원을 받지 못해 그 돈을 달라고 요구하는 대여금 소송은 그리 복잡한 싸움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1심부터 판사 3명으로 구성된 합의부 재판을 받고 구체적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판결문을 제공한다. 반면, 의료과실로 입은 피해에 대해 2,000만 원을 배상해달라고 하는 복잡한 의료 소송은 그 청구 금액이 3,000만 원을 초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소액사건으로 분류되고, 이유도 적혀져 있지 않은 판결문을 제공한다. 이걸 납득할 시민이 있을까?

2018년 근로자 상위 40~50%의 연봉 평균이 2,864만이다. 자신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에 '소액'이라는 딱지를 붙여 이런 불친절한 서비스를 꾹 참고 버텨야 하는 걸 언제까지 참아야 할까?

일단 대법원이 단순히 규칙을 변경해 소액사건 범위를 결정하는 것부터 중단시키고, 처음 법이 시행되었을 때처럼 법률로 그 범위를 정하도록 하고 다시 신중하게 검토해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 소액사건의 범위를 단순히 청구금액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 옳은지, 사건 처리 능률을 높이기 위해 1973년에 등장한 소액사건이라는 명칭이 옳은지부터 따져봐야 할 것이다.



#인-잇 #인잇 #최정규 #상식을위한투쟁

# 본 글과 함께 생각해 볼 '인-잇', 지금 만나보세요.
[인-잇] 세월호 의인의 자해…외면받는 트라우마






▶ [제보하기] LH 땅 투기 의혹 관련 제보
▶ SBS뉴스를 네이버에서 편하게 받아보세요

※ ⓒ SBS & SBS Digital News Lab. : 무단복제 및 재배포 금지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트럼프 젤렌스키 회담
    트럼프 젤렌스키 회담
  2. 2이서진 한지민 케미
    이서진 한지민 케미
  3. 3애틀랜타 김하성 영입
    애틀랜타 김하성 영입
  4. 4손흥민 UEL 우승
    손흥민 UEL 우승
  5. 5故 이선균 2주기
    故 이선균 2주기

함께 보면 좋은 영상

SBS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독자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