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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친일 교수와 ‘위안부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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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워싱턴정대위)는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내걸고 미국에서 가장 먼저 결성된 민간단체 중 하나다.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듬해인 1992년 유엔에서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한 황금주 할머니의 미국 방문 지원, 워싱턴 한인교회 증언 행사 개최 등이 이 단체의 출범 계기가 됐다. 지난해 8월 워싱턴정대위는 28년에 걸친 미국 내 위안부 운동의 역사와 성과, 의미를 집대성한 영문 책자 발간을 알리면서 영문 자료 발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경향신문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미국 위안부운동단체의 영문 책자 발간이 단순히 단체의 역사를 정리하는 차원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태평양전쟁 당시 성매매 계약’ 논문 파문을 보면서 새삼 깨달았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의 ‘세계화’와 ‘일반화’ 작업은 갈 길이 멀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자발적인 매춘부로 규정했고, 저명한 국제 학술지가 이 논문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딘가 심각한 구멍이 뚫려 있다는 증거다.

램지어 교수의 친일적·식민주의적 시각은 극명하다. 그는 지난 1월 일본 산케이 신문의 영문매체 ‘저팬 포워드’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위안부에 관한 이야기들이 “진정한 허구”라고 단정하면서 위안부 피해 부정론자들의 단골 논거를 답습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 일제 패망 뒤 재일 조선인 차별 관련 논문은 학살과 차별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로 규정한 논문은 ‘재앙’ 수준이다. 논문의 핵심 근거인 위안부 여성과 매춘업자 사이의 실제 ‘계약서’를 한 건도 제시하지 못했다. 자료의 오독 내지는 왜곡, 논지에 반하는 내용을 피해가기 위한 선택적 인용 사례가 다수 확인됐다. 학자로서의 양심과 자질이 의심되는 대목이다.

하버드대 로스쿨에서 일본 기업 미쓰비시가 제공한 기금으로 마련된 교수로 재직 중인 램지어의 친일·극우적 시각은 ‘양심의 자유’에 속한다고 치더라도 그가 자신의 학자적 평판을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음모론 수준의 논문을 발표하는 위험을 감수한 이유는 미스터리다. 일본과 한국 극우 성향 학자 및 저술가들의 일본어·영어 자료들을 다수 인용한 것을 감안하면 이런 자료들의 편재가 램지어 교수의 확증편향을 강화시켰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의 학자 및 극우논객들의 편향되고 왜곡된 저작이 상호 인용되고 번역됐고 그럴듯한 자료로 둔갑한 것이다.

그가 법학자이고 비판이 주로 역사학계에서 나왔다는 점도 주목된다. 일본군 위안부를 둘러싼 학술 논쟁의 주요 무대인 역사학계에선 발붙이기 어려운 수준 이하의 논문이 다른 분야 학술지에 수용됐다. 램지어 교수의 간토대지진 관련 논문을 수록하기로 했던 책자의 편집진은 일제강점기 역사에 대한 지식 부족을 시인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역사가 학계에서 아직 ‘일반상식’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이번 사태가 친일 성향 미국 학자의 일탈로 끝날지, 빙산의 일각으로 드러날지는 한국 정부와 학계, 시민사회의 대응에 달려 있다. 위안부 역사의 세계화와 일반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램지어 교수는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

워싱턴 | 김재중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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