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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이 증거”라는데 가습기 살균제 ‘무죄’된 이유…판결문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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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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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이 지난 12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와 관련해 SK케미칼과 애경산업 전 대표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를 한 직후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조순미씨가 재판 결과에 대해 발언하던 중 울고 있다. 강윤중 기자


“내 몸에서 일어난 일이 다 증거”라고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존재에도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사건과 달리 ‘가습기메이트’ 사건은 무죄가 선고됐다.

가습기메이트 제품의 원료인 클로로메틸이소티아졸리논(CMIT)·메틸이소티아졸리논(MIT)과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연구결과가 없다는 게 결정적 이유다. CMIT·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만 단독으로 사용한 피해자가 4명으로 다소 적은 점도 진실 규명에 어려움을 더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7월 기준 환경부에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를 신고한 사람은 6817명이다. 그 중 사망자는 1553명이다. 이들의 피해 원인을 특정해야 가해자 처벌과 피해 구제가 이뤄질 수 있다. 문제는 대부분 피해자들이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 가습기 살균제인 옥시싹싹과 CMIT·MIT 성분의 가습기 살균제인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사용한 ‘복합 사용자’라는 점이다.지난 12일 1심 재판부가 가습기메이트 제조·판매 기업의 전직 대표 등에게 무죄를 선고한 직후 자신의 몸이 증거라며 오열했던 피해자 조순미씨 역시 복합 사용자이다.

① CMIT·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 때문인가

13일 홍지호 전 SK케미칼 대표(71), 안용찬 전 애경산업 대표(62) 등 13명의 업무상과실치사상 사건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재판장 유영근)는 무죄 근거 중 하나로 총 98명의 피해자 중 94명은 옥시싹싹과 가습기메이트를 함께 쓴 복합 사용자이고, 가습기메이트만 쓴 단독 사용자는 4명뿐이라는 점을 들었다. 즉 이들의 피해가 CMIT·MIT 성분으로 인한 피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② 동물 실험 결과는?

물론 CMIT·MIT 단독 사용자의 수가 적어도 피해는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동물 실험 결과가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판부는 환경부가 2018년 수행한 ‘가습기 살균제 건강피해 규명을 위한 독성시험’ 결과를 근거로 제시했다. 당시 환경부는 PHMG 성분을 쥐의 기도에 점적투여(용액을 떨어뜨림)해 폐섬유화를 유발한 뒤 CMIT·MIT 성분을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과 CMIT·MIT 성분만 단독으로 쥐에 흡입 노출하는 시험을 각각 수행했다. CMIT·MIT 성분 가습기 살균제만 사용했다는 피해자의 수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두 가지 방식의 실험을 모두 한 것이다. 하지만 CMIT·MIT에만 노출된 쥐에서는 폐의 염증이나 폐섬유화가 관찰되지 않았다. 재판부는 “위 연구에서는 시험 동물에 대한 노출 시간을 하루 20시간으로 늘리고, 시험 물질의 농도도 가습기메이트 권장사용량의 833배에 달하도록 높였지만 CMIT·MIT를 흡입한 시험동물에게서 폐섬유화는 관찰되지 않았다”고 했다.

③ “다른 원인에 의한 폐질환 가능성”

재판부는 CMIT·MIT 단독 사용자의 피해 증상이 정상에 가까워 폐섬유화가 나타났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했다. 재판부는 공소장에 기재된 단독 사용자 4명 뿐만 아니라 공소시효가 지난 단독 사용자 8명도 포함해 총 11명의 피해를 인정할 수 있는지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인정자 중 대다수의 영상판정이 3·4등급으로, 원인미상 폐질환의 영상학적 소견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4등급의 경우 폐질환일 확률이 0~25% 확률로, 1등급에 비해 가능성이 떨어진다.

특히 단독 사용자로 인정된 4명 중 정부 조사에서 ‘관련성 확실’ 판정을 받았던 박나원·박다원 쌍둥이 자매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다른 원인에 의한 발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되기 전에 호흡기 질환(상세불명의 급성 세기관지염)을 진단받았다는 것이다. 돌이 지났을 무렵부터 폐섬유화 증상을 보였던 자매는 현재까지 목에 구멍을 내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생활하고 있다. 재판부는 “박나원·박다원의 경우 가습기 살균제 노출 시작 전에 호흡기 질환을 진단받아 치료를 받기도 했고 유전적, 선천적 요인, 다른 질병에 따른 합병증 등 다른 원인에 의한 폐질환의 가능성이 있음에도 다른 원인을 배제하기 위한 추가적인 확인 및 검증절차가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고 했다.

검찰과 변호인은 1심 재판 과정에서 박 자매의 폐질환이 유전자 변이 질환인지를 두고도 치열하게 다퉜는데, 이 부분은 항소심의 핵심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수사 관계자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피해자들에 대한 유전자 변이 질환 검사 결과 폐질환과 관련된 유전자의 유의미한 변이는 없었다”며 “단백면역화학 검사 결과 피해자들은 모두 정상 범위 안이라는 점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④ 검찰 “쥐와 사람은 다르다”

검찰은 1심 법원이 동물 실험에서 CMIT·MIT와 폐질환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점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쥐 실험에서 폐섬유화가 발생해야만 사람에게 폐섬유화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논리다. 검찰은 ‘탈리도마이드 사건’을 예로 든다. 1957년 서독의 한 제약회사는 ‘탈리도마이드’라는 입덧 완화 약품을 출시했다. 쥐를 대상으로 한 독성 실험 결과로만 보면 안전성이 검증된 약이였다. 하지만 약을 복용한 산모들은 사지가 없거나 짧은 아기를 출산했다. 전세계 48개국에서 1만명 이상의 피해자를 남긴 이 사건은 동물과 사람의 차이를 간과한 대표적 사건으로 꼽힌다.

수사 관계자는 “여러 동물 실험 결과 폐섬유화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CMIT·MIT가 동물 호흡기 등에 상해를 입힐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됐다”며 “인간과 동물의 기전의 차이가 크다는 점 등을 종합해 인과관계를 인정했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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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희 기자 s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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