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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재난현장마다 뜬 까치, 942명 구했다

조선일보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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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희망으로 ‘까치 2호’의 숨은 이야기
지난달 31일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국내 최초 소방 헬기 '까치 2호'가 서울 동작구 보라매안전체험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달 31일 문화재로 등록 예고된 국내 최초 소방 헬기 '까치 2호'가 서울 동작구 보라매안전체험관 야외에 전시돼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994년 10월 21일. 평소처럼 아침을 먹고 돌아온 서울소방항공대원들은 TV 뉴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뉴스 앵커가 성수대교 붕괴 소식을 전하며 “현재 소방 헬기가 보이지 않는다”고 다급히 구조를 요청했다. 황급히 소방본부 상황실로 연락하니 ‘바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소방 헬기 까치 1호와 2호가 동시에 출발했다. 당시 까치 2호를 탔던 김창호(65) 정비사는 “그때만 해도 헬기 인명 구조는 흔치 않아서 대형 사고가 나도 헬기를 먼저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성수대교·삼풍백화점 참사 등 대형 재난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 헬기 ‘까치 2호’가 문화재가 된다. 문화재청은 1979년 12월 도입한 국내 최초의 소방헬기 까치 2호를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고 지난달 31일 발표했다. 까치 2호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뿐 아니라 1984년 강동구 풍납동·성내동 수해 현장, 1994년 아현동 가스폭발사고 등 26년간 주요 재난 현장에 총 3091회 출동해 942명을 구조했다.

1994년부터 2005년 까치 2호가 퇴역하기까지 10여년을 동고동락한 김창호 정비사는 성수대교 붕괴 당시 이직 두 달 차였다. 그날 운행일지에는 8시 20분 출동, 16시 50분 복귀, 20회 착륙 등 긴박했던 상황이 담겨 있다. “맨 처음 구조낭에 실린 구조자가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무학여고 학생이었어요. 병원 옥상에 내려놨는데 나도 대형 사고를 처음 겪으니까 공포 때문에 가슴이 막 울렁거리더군요. 의사가 확인하더니 ‘왜 사망자를 병원까지 데려왔냐’고 하더라고요. 우린 생존 가능성을 보고 데려왔는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 출동한 소방 헬기. 김창호 정비사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 소방 헬기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했다. /서울소방항공대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시 출동한 소방 헬기. 김창호 정비사는 "성수대교,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 소방 헬기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했다. /서울소방항공대


그 후로도 차 안에서 수습한 시신을 헬기 구조낭에 담아 강변 공터까지 수차례 옮겼다. 사고 현장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이륙과 착륙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수습이 되고 자원봉사자들이 빵이나 우유를 나눠주는데 한 입도 못 먹겠더라고요. 그 후엔 수난구조대가 생존자 구조를 계속하고 헬기는 오후 5시쯤 복귀했죠.”

까치 2호의 공식 명칭은 ‘서울 002호’. 구입 비용은 1억5000만원으로 당시 대형 소방차 7대 가격과 맞먹었다. 1970년대 163명이 사망한 대연각호텔 화재, 30여명의 사상자를 낸 라이언스호텔 공사장 화재 등 대형 화재가 잇따르면서 도입됐다. 그 전까진 대형 사고 발생 시 주한미군이나 공군에 도움을 요청해야 했다. 까치 1·2호와 함께 서울소방항공대가 창설되면서 30여개 고층건물에 헬리포트도 만들어졌다.

헬기 구조가 흔하지 않던 시절, 까치 2호는 어딜 가나 환호를 받았다. 1983년 12월, 서울 중구 롯데빌딩 화재 사고를 보도한 조선일보 기사에는 헬기의 활약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연기에 쫓긴 몇몇 인부들이 창문 밖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외쳐대는 상황이어서 급박하고 다급했다.... 시민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저마다 발을 동동 굴렀고, 헬리콥터가 옥상 위로 피해있던 인부 8명을 구출하여 차도 한복판에 안전하게 내려놓을 때마다 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함께 도입됐던 ‘까치 1호’가 1996년 방제 작업 도중 서울 중랑천에 추락해 폐기되면서 ‘까치 2호’는 유일한 국내 최초 소방 헬기가 됐다. 이후 두 대의 소방 헬기를 추가로 들여오면서 ‘서울 002호’에서 ‘서울 005호’로 밀려났지만, 현장에서 대원들끼리 교신할 때는 여전히 ‘까치 2호’로 불렸다.

김성재 전 서울소방항공대 기장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소방항공대가 창설될 때마다 서울소방항공대에 와서 까치를 구경하고 갔다”면서 “우리 까치가 전국 소방항공대의 산파 역할을 한 셈”이라고 했다. 2020년 기준 전국에는 31대의 소방 헬기가 운항 중이다.

“지금은 14인부터 21인승까지 중대형 헬기가 많지만, 까치는 5인승밖에 되지 않는 소형 헬기였어요. 조종사, 정비사가 타면 들것을 놓을 자리가 없어서 헬기 문짝을 떼고 날아다녔어요. 요즘 같은 겨울이면 영하 10~15도까지 떨어지고 칼바람이 몰아치는데, 입이 얼어서 뒷좌석이랑 소통이 안 될 정도였죠.”


2005년 까치가 퇴역할 때까지 함께했던 그는 “헬기 소리나 냄새가 조금만 이상해도 ‘어디 잘못됐나’ 싶어 덜컥하고, 늘 오각을 총동원해서 임무 수행을 했다”면서 “퇴역식 때는 사람을 떠나보내듯 감개무량하더라”고 했다.

2005년 '까치2호'가 퇴역식에서 대원들의 거수경례를 받고 있다. /소방청

2005년 '까치2호'가 퇴역식에서 대원들의 거수경례를 받고 있다. /소방청


소형 헬기라 응급 환자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유용산 서울소방항공대 정비사는 “헬기가 작다 보니 하강할 때 바람이 다른 헬기보다 약해 접근하기가 좋았다”고 했다. “어디에나 착륙하기 편한 헬기죠. 좁은 협곡이나 계곡에서 장애물을 피하기도 유리하고요.” 까치 2호의 출동 기록을 보면 서울 시내 산불 진압만 450회, 산악 구조도 126명에 달한다. 신형 헬기들이 들어오고서는 공중에서 이들을 통제하는 반장 역할도 톡톡히 했다. 유 정비사는 “산불이 났을 때 여러 대가 동시에 출동하거나, 헬기 훈련을 할 때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공중에서 컨트롤 타워 구실을 했다”고 설명했다.

노후로 인한 정비 비용이 늘면서 2005년 까치 2호는 퇴역 절차를 밟게 됐다. 정부 자산인 중고 장비는 매각이 일반적이지만, 역사 유산으로서 인정을 받아 엔진만 매각하고 기체는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현재 서울 동작구 보라매안전체험관 앞에 전시돼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위원회는 “우리나라 소방 항공 역사를 간직한 최초의 소방 헬리콥터 모델”이라면서 “옥외에 노출돼 훼손 우려가 매우 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 철저히 관리해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라고 평가했다.

[백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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