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탁의 난이 진행되는 동안 삼국지 주인공들이 모습을 보였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유비와 관우, 장비도 이때 등장한다. 공손찬 휘하로 반동탁연합군에 참전한 유비 형제 중 관우는 술잔의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벴다. 장비는 여포와 80합을 싸웠고, 장비가 지치자 관우와 유비가 참가하여 전설적인 3:1 대결을 펼친다.
실제 역사를 보면 이때도 유비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유비의 존재감이 한껏 발휘되고 있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따르면 유비와 관우, 장비도 이때 등장한다. 공손찬 휘하로 반동탁연합군에 참전한 유비 형제 중 관우는 술잔의 술이 식기도 전에 화웅의 목을 벴다. 장비는 여포와 80합을 싸웠고, 장비가 지치자 관우와 유비가 참가하여 전설적인 3:1 대결을 펼친다.
실제 역사를 보면 이때도 유비가 본격적인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설에서는 유비의 존재감이 한껏 발휘되고 있었다.
▶유비가 삼국지 주인공이 된 이유
▷명·청 시대 유가적 이데올로기에 적합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이렇게 띄운 이유는 명·청 시대를 지배하는 유가적 이데올로기에 유비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나라 황실의 후손이므로 조씨의 위나라, 손씨의 오나라와 달리 정통성이 있다. 인의로 부하를 다스리고 학살극을 벌인 적도 없다. 이런 이유로 유비는 연의가 작성되기 전부터 이미 영웅이 돼 있었다. 남송 유학자 주희는 자치통감강목을 지으면서 이 같은 이유로 삼국시대 여러 군주 중 유비에게 정통성을 부여했다.
유비는 한나라 6대 황제인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라고 한다. 유승의 아들 유정은 현재의 베이징 교외에 있는 탁현을 봉지로 받았다. 하지만 해마다 바쳐야 하는 상납금을 적게 바쳤다는 이유로 작위를 박탈당해 평민이 됐다. 한나라는 온갖 트집을 잡으며 작위를 줬다 뺏었다 하면서 제후의 수를 억제하고 통제했다.
덕분에 평범한 사람이 된 유씨 집안은 대대로 탁현에 거주하면서 집성촌을 형성했다. 유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모친과 함께 짚신과 돗자리를 엮어 생계를 꾸렸다. 정사 삼국지에 정확히 이렇게 기록돼 있는 탓에 유비의 출발점이 시골의 빈농으로 인식되고 있다.
유비는 정말 가난했을까. 특정 인물이 소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자. 이 말은 빈민으로 힘든 소금 행상을 했다는 말도 되지만 염전을 경영했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짚신과 돗자리도 마찬가지다. 새끼줄과 가마니를 꼬아 팔았다는 의미일까, 신발 공장이나 강화 화문석 대리점을 했다는 의미일까.
후자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유비 집안은 대대로 현의 관리를 했고, 할아버지는 현령까지 역임했다. 중국 현령은 조선으로 치면 도지사보다 넓은 지역을 통치한다.
유비가 15살이 되자 모친은 그를 노식의 제자로 넣었다. 노식은 탁현 출신으로 구강태수를 역임한 명사였다. 이때 종중인 유덕연과 랴오둥에서 유학 온 공손찬이 동문이었다. 유비의 가능성을 높게 본 유덕연 부친이 유비의 학비를 대주고 덕연과 똑같이 보살펴줬다.
노식은 조정에서도 명망이 높고 탁현 최고의 명사였다. 최고 학부의 수업료는 그때나 지금이나 적지 않다. 더욱이 친척 후원으로 공부하는 주제에 유비는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고등학생 유비는 개와 말을 끌고 사냥을 하거나 음악을 듣고 멋진 의상을 입는 것이 취미였다. 요즘은 반려견 키우는 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지만, 고급 사냥개는 상상을 초월한 비용이 든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고가 승용차를 타고 일류 골프장과 비싼 유흥업소를 들락거렸다는 말이다.
소설과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난한 선비, 꽁생원 같은 유비 이미지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충격이겠지만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촉나라 사람이었다. 유비에 관한 정보는 정확할 것이다.
유비는 진짜 황실의 후예일까,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필자가 본 가장 절묘한 해답은 일본에서 저명한 동양사학자의 주장이다.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유비 본인은 그 사실을 철저히 믿은 것 같다는 해석이다. 황실 후손설은 의심스럽지만, 착한 유비가 족보를 위조해 사람들을 속인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다.
유비·관우·장비 세 사람이 형제처럼 각별했던 것은 사실이다. 관우와 장비는 늘 유비를 호위했으며, 고난과 위험을 함께했다. 관우가 나이가 많아 장비는 관우를 형처럼 대우했다. 유비를 맏형으로 모셨다는 내용이 없는 이유는 유비가 나중에 황제가 됨으로써 관우, 장비와 주종 관계에 놓였기 때문이다.
다만 세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다. 둘을 만나기 전부터 유비는 탁현에서 힘을 가진 능력자였다. 후한 시대는 황건적이 봉기하기 전부터 관의 지역 장악력이 떨어졌고 호족들은 자기만의 조직을 만들고 있었다. 유비 집안은 탁현의 토호였고 유비는 집안 사람들이 인정하는 인재이자 배운 사람이었다.
▶유비가 갖고 있는 묘한 리더십
▷지역 청년들에게 인기 있는 인물
유비는 리더십이 있어 일련의 무리들이 그의 밑에 모였다. 그는 청년에게 인기가 좋았다. 유비는 평소 말수가 적고 아랫사람에게 잘 대해줬다. 기쁨이나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의로운 사람과 사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거상인 장세평과 소쌍은 탁군 일대에 말을 사러 왔다 유비를 보고 뛰어난 인물이라고 생각해 거금을 희사했다.
유비는 이 돈을 바탕으로 무리를 모아 지역 자위대 같은 집단을 만들었다.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유비는 의병을 모아 종군했다. 이때 혹은 이 직전에 관우와 장비가 유비파에 가담했다. 관우는 살인을 한 후 탁군으로 도망쳐서 살고 있었고, 장비는 유비와 동향이었다.
의병을 모집할 때는 대장의 리더십과 인덕도 필요하지만, 전투에서 사람들을 이끌 수 있는 용사가 있어야 한다. 관우와 장비의 등장은 유비에게 큰 힘이 되었다.
지금부터는 소설과 비슷하다. 유비는 독립군단이 아니라 교위 추정의 부대로 들어가 싸웠다. 황건 토벌전에서 상당한 공을 세운 그는 안희현의 현위로 임명된다.
관직 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감찰관인 독우(관직명)가 안희현에 왔을 때 과하게 뇌물을 요구하거나 유비를 무시했던 것 같다. 유비는 면담을 요청했지만, 독우는 거절했다. 소설에서는 분노한 장비가 치고 들어가 독우를 구타하지만, 현실에서 독우를 묶고 처벌한 사람은 유비였다. 맏형다운 리더십이다. 유비는 독우에게 태형 200대를 집행하고 그를 기둥에 묶고 관직을 버리고 나갔다.
황건적 후유증으로 반란이 그치질 않아서 유비 집단은 처벌을 받지도 않고 실업자가 되지도 않았다. 유비는 다시 종군해 공을 세우고 고당현 현령이 됐다. 드디어 한 지역의 장이 되나 싶었지만 강력한 황건적 무리가 현을 습격했다. 현은 함락됐고 유비는 다시 빈털터리가 됐다. 그는 자신과 달리 랴오둥에서 크게 성공한 공손찬에게 의탁한다.
동탁 토벌전에서 유비 형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공손찬은 유비를 중용했지만 유비가 활약한 전투는 동탁전이 아니라 그 이후 벌어진 공손찬과 원소의 대결이었다. 두 사람은 현재 베이징에서 랴오둥까지 이어진 넓은 지역, 즉 북방의 패권을 두고 숙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원소는 강적이었고 천하 제패를 꿈꾸는 야심가였다. 공손찬은 유비 형제를 이용해 대담한 작전을 구상한다. 그것이 유비의 운명을 바꾸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82호 (2020.11.04~11.10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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