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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넷플릭스에서 '영웅문x100'의 위용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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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연합고사를 마친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은 대학 입학이란 지상 과업을 완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훌쩍 어려워지는 고등학교 공부를 대비해야 하는 때였는데 졸업학기라 기간이 길고 그만큼 해방감이 컸지만 재미있는 것들의 유혹도 많았다. 중학교까지 성적이 하위권이었다가 이 시기에 이를 악물고 공부를 해 명문대에 갔다는 인생 반전 후기들이 심심찮게 들려왔다. 나 역시 '서울대 합격수기' 같은 책을 몰래 읽으며 박약한 의지를 불태우던 때였다.

빳빳한 수학의 정석과 성문종합영어가 모셔져 있던 내 책상 위에 어느 날 이상한 책 뭉치 한 덩어리가 놓여 있었다. "동생, 좋은 대학에 가려면 이 책부터 다 읽어야 해." 마침 명문 대학에 합격해 온 친척들의 워너비가 되어 있던 세 살 터울의 오빠가 가져다놓은 책이었다. 오빠는,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한자와 역사도 많이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 호연지기를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딱히 맞는 말 같진 않았지만 명문대생의 이야기니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굵은 한자로 적혀 있던 책 제목은 <영.웅.문>이었다.

소설 '영웅문'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끈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소설 '영웅문' 시리즈로 큰 인기를 끈 '무협소설의 대가' 김용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그것이 판도라의 상자였을 줄이야. 공부시간을 야금야금 잡아먹던 <영웅문> 읽기는 결국 밤낯 없이 이어졌고 낯선 무협 언어와 강호 영웅들의 신공에 익숙해졌을 무렵, 방학은 중반을 한참 지나 있었다. 양과(중국무협소설 <신조협려>의 주인공)와 장무기(<의천도룡기>의 주인공)에 빠져 대한민국 중3의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나는 허전함을 달래려 '청향비' 등 작가의 다른 무협지에 손을 뻗어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죄책감과 불안, 극단의 희열과 흥분 상태 속에 맞이한 고등학교 1학년. 3월의 꽃샘추위보다 더 매섭고 헐벗은 성적표가 덩그러니 들려 있었다. 공부 내공을 높여줄 방법은 오직 시간이었을 뿐 비급이 담겨 있는 구양신공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2020년의 징검다리 연휴.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밀린 업무와 공부, 개인적으로 챙겨야 할 일들까지 리셋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였다. 코로나로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오빠네 가족을 만나는 일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있는데, 오빠가 불쑥 방으로 들어와 하는 말. "동생, 넷플릭스 아이디 있나? 요즘 콘텐츠를 알려면 이 정도는 봐줘야지." 월정액이 부담돼 망설이던 나는 오빠네 가족에 끼여 어느새 앱을 깔고 있었다. 요즘 드라마 한두 편만 잠깐 보고 말 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다음 회차 버튼을 터치하는 손가락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고 20편짜리 드라마 정주행을 마친 시간은 출근을 앞둔 새벽녘이었다. 계획은 둘째 치고 머릿속이 멍하고 몸이 너무 피곤했다. 좀비처럼 허우적대며 밀린 일을 처리하고 스스로 책망해 보아도 그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일상을 작파하고 몰두하게 만드는 마성의 이야기와 오락거리들은 늘 존재했다. 마성의 유혹에 넘어간 이야기들은 훗날 웃픈 사연쯤으로 재생하곤 했지만, 이번엔 조금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무언가 거대한 힘 앞에 시간의 주도권을 자꾸만 빼앗기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손가락 하나만 까닥하면 전 세계의 온갖 재미난 콘텐츠를 내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세상의 진기명기 같은 상품들을 구입할 수 있는 시대다. 대여소에 찾아가 빌려와야 했던 <영웅문> 정도는 유혹도 아니다. 그 별천지 같은 신세계에서 현실은 망각되고 시간은 멈춘다. 점점 강력해지는 매력적인 콘텐츠와 마케팅의 공세 앞에 나는 얼마나 절제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향유하는 사람에서, 점유당하는 존재로 전락하지는 않을까?

제레미 러프킨은, 기업의 마케팅이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시간점유율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유형의 소비재이든 무형의 콘텐츠이든 소유에서 경험으로 소비 패턴이 변화되는 시점에 '시간은 돈이다'라는 옛말은 정말 현실이 되어버렸다. 수많은 일과 역할과 정보 속에 조각난 시간을 겨우 붙들고 사는 우리들. 함부로 내 시간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는 힘과 지혜가 그만큼 절실해진다. 굳은 결심을 하고 넷플릭스 앱을 지우려던 손가락은, 조금 신중해지기로 했다. 나를 한 번만 더 믿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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