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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먹는 사람들' 거기 있었다…비밀벙커 깨운 '고흐'

이데일리 오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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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고흐 10년 걸작 1800점 투사한 '미디어아트'
국가기간 통신망시설 리모델링한 공간에 펼쳐
길이100m 폭50m 넓이3000㎡ 90개 프로젝터
거대 스케일에 녹인 대담한 색채·붓터치 압권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빛의 벙커’ 벽과 바닥에 흐르고 있다. 회화 800여점, 드로잉 1000여점을 압축한 32분짜리 전시영상은 3000㎡(900평) 공간을 가득 채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이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빛의 벙커’ 벽과 바닥에 흐르고 있다. 회화 800여점, 드로잉 1000여점을 압축한 32분짜리 전시영상은 3000㎡(900평) 공간을 가득 채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제주=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암전 속에 생긴 점 하나. 작은 파문을 만들더니 이내 좁은 식탁을 비춘다. 침침한 호롱불 아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들. 그중 한 얼굴이 달려든다. 그래, 저 여인. 어둠 속에 흔들리는 저 여인의 눈빛을 견뎌내긴 쉽지 않다. 늘 가슴을 후벼파니까. 불안을 감춘, 절망조차 체념한 듯한 애절함을 읽어야 하니까. 어찌어찌 잘 넘겼다고 방심한 게 실수였나. 이번엔 그들의 불거진 광대뼈가, 거친 손마디가 움직인다. 눈앞만이 아니다. 이쪽 벽을 타고 저쪽 벽으로, 이 기둥을 거쳐 저 기둥으로. 노르스름한 저들의 엄청난 형상이 꿈틀대고 있다. 눈치를 챘으려나. 맞다. 농부화가이고 싶었다는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감자 먹는 사람들’(1885)이다.

저들을 이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다. 참으로 낯선 공간, 낯선 방식이 아닌가. 거대한 규모의 미디어아트라니. 가로세로 1m 남짓(114×82㎝)한 ‘감자 먹는 사람들’이 길이 100m 폭 50m 천고 5.5m의 벽에서 튀어나오고 있지 않나.

‘빛의 벙커’에서 투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가로세로 114×82㎝의 원작은, 길이 100m 폭 50m 천고 5.5m에 걸맞은 압도적인 규모로 탈바꿈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의 벙커’에서 투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가로세로 114×82㎝의 원작은, 길이 100m 폭 50m 천고 5.5m에 걸맞은 압도적인 규모로 탈바꿈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빛의 벙커’가 미디어아트 두 번째 작품을 올렸다. 작년 11월 개관해 지난 10월에 폐막한 ‘클림트’ 전에 이은 ‘반 고흐’ 전이다. ‘빛의 벙커’는 명작을 바탕으로 삼아 디지털IT로 골격을 만들고 음악으로 살을 붙인, 현란한 시공간을 전시하는 방식. 벽과 기둥, 바닥까지 활용해 벙커의 전방위로 빛을 투사한다.

원작의 평면성과는 확연히 다르다. 미디어아트는 입체감과 속도감, 율동성을 포함한 편집역량이 관건. ‘반 고흐’ 전에선 고흐가 10년 남짓 미친 듯 몰입했던 그 현장에 온전히 빠져들게 한다. 회화 800여점과 드로잉 1000여점을 단 32분짜리 영상으로 압축했으니, 그 밀도감은 상상할 수 있을 터. 붙들어두고 싶은 한 점 한 점이 섬광처럼 떠올랐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져가는 걸 지켜보는 과정은 필수다. 탄성과 탄식이 교차하는 자리란 소리다.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중 한 장면. 고흐의 ‘자화상’들이 벽을 타고 흐르고 있다. 90여개 프로젝터가 토해내는 영상, 70여개 스피커가 내뿜는 음악이 만든 ‘장관’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중 한 장면. 고흐의 ‘자화상’들이 벽을 타고 흐르고 있다. 90여개 프로젝터가 토해내는 영상, 70여개 스피커가 내뿜는 음악이 만든 ‘장관’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과 어둠의 갈림길

미디어아트의 핵심은 ‘빛’이다. 그림의 핵심이 ‘색’인 것과는 다르다. 다만 ‘색’을 제대로 구현하려는 ‘빛’의 노력은 상당하다. 다시 말해 한 작가의 고집스러운 집념과 결과물, 그 이상이 필요하단 얘기다. 최소한 십수명의 전문가가 협업을 이뤘다는데. 작품에 대한 이해를 감수하는 이, 전시시나리오를 만드는 이, 원작을 고해상도 이미지로 바꾸는 이, 음악을 덧입히는 이, 프로젝터와 스피커 등 첨단기술을 만지는 이 등등.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중 한 장면. ‘자화상’ 한 점을 바탕으로 고흐의 작품 속 강렬한 붓터치를 모아 재현한 마티에르가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의 벙커 반 고흐’ 전 중 한 장면. ‘자화상’ 한 점을 바탕으로 고흐의 작품 속 강렬한 붓터치를 모아 재현한 마티에르가 튀어나올 듯 생생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들이 이번 전시에서 방점을 찍은 건 ‘붓터치’란다. 오로지 금빛 찬란한 화면을 만드는 데 치중했던 ‘클림트’ 전에서 진일보했다고 할까. 김현정 사업총괄이사는 “고흐 작품의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며 “이를 위해 질감과 붓터치를 느끼게 하는 구성에 충실한 것”이라고 전했다. 고흐 특유의 강렬한 표현력을 한 획 한 획 살려냈다는 뜻이다.

찰나도 놓치지 않는다면 고흐의 걸작 대부분을 섭렵할 수 있다. 특히 푸른색과 노란색이 뒤엉킨 말기 유명작품이 대거 등장하는데. ‘씨 뿌리는 사람’(1888), ‘해바라기’(1888), ‘밤의 카페 테라스’(1888),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1888), ‘별이 빛나는 밤’(1889), ‘아를의 반 고흐의 방’(1889),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 등등. 푸르고 노란 일렁임에 현기증이 타고 올라도 그저 눈이 부시다고 할밖에. 이 색을, 아니 이 빛을 꺼내기 위해 일찌감치 어둠을 내려뒀던 건가. 깨고 나올 어둠이 깊을수록 빛이 찬란해질 테니.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이 ‘빛의 벙커’ 사방에서 흐르고 있다. 전시에는 고흐 특유의 푸른색과 노란색이 뒤엉킨 말기 유명작품이 대거 등장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빈센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이 ‘빛의 벙커’ 사방에서 흐르고 있다. 전시에는 고흐 특유의 푸른색과 노란색이 뒤엉킨 말기 유명작품이 대거 등장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실 빛과 어둠을 가르는 장치는 따로 있다. 음악이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룰리를 시작으로 에드바르드 그리그, 지아코모 푸치니, 마일즈 데이비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니오 비발디 등을 거쳐 요하네스 브람스까지, 클래식과 재즈를 넘나드는 장엄하고 서정적인 곡들이 빛 잔치에 화려한 조연을 기꺼이 맡았다.


덤도 있다. 메인인 고흐에 이은 폴 고갱(1848∼1903)이다. 고흐의 3분의 1쯤 되는 10분짜리 영상으로 제작했다. 시기적으로도 고흐와 가장 끈끈한 영향력을 주고받았다는, 후기 인상파인 고갱은 원시성 물씬 풍기는 사람과 풍광을 찾고 그리는 데 평생을 보냈다. 문명세계에 신물을 내며 떠난 남태평양 타히티섬의 밝고 강렬한 색채는 고흐와는 또 다른 차원. 참고로 지난 ‘클림트’ 전의 서브전에는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가 나섰더랬다.

‘빛의 벙커 폴 고갱’의 전시영상 중 일부. ‘반 고흐 전’에 이은 10분짜리 전시에선 원시성 물씬 풍기는 사람과 풍광을 평생 찾아다닌 고갱의 정수를 볼 수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의 벙커 폴 고갱’의 전시영상 중 일부. ‘반 고흐 전’에 이은 10분짜리 전시에선 원시성 물씬 풍기는 사람과 풍광을 평생 찾아다닌 고갱의 정수를 볼 수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가기간 통신망 시설의 화려한 변신

한반도에 뜬금없는 비밀벙커가 한둘이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이상할 것 없는 공간이다. 목적도 분명했다. 국가기간 통신망 시설이었으니까. 1985년 설계를 시작, 1990년 착공한 뒤 2012년까지 한국통신 해저 광케이블센터와 서버기지로 쓰였단다. 그러다가 더 이상 쓸모를 잃은 공간을 두고 고민 끝에 민간에 공모했고, 이후 공연·전시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해왔다. ‘빛의 벙커’가 임대한 건 2017년 11월. 3000㎡(900평)에 달하는 공간을 리모델링해 90여개 프로젝터, 70여개 스피커를 소화하는 미디어아트 전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클림트’ 전은 그렇게 1년의 준비 끝에 쏘아올린 첫 작품이었다. 작품성·대중성 양쪽에서 만족할 성과를 보였는데, 유료관람객 55만명이란 기록을 쓰며 범상치 않은 출발을 보인 거다. 어찌 보면 후속작 ‘반 고흐’ 전은 의도한 한 수다. 적어도 선정이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으니까. 한국에서 그이는 이름 자체가 ‘빛’이니까. 물론 역작용도 있었을 터. 부담감이다. 이미 그이의 그림들이 어떻게 흐를지도 짐작할 수 있으니.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빛의 벙커’ 입구. 1985년 설계를 시작, 1990년 착공한 뒤 2012년까지 한국통신 해저 광케이블센터와 서버기지로 쓰였던 공간이다. ‘빛의 벙커’는 2017년 11월부터 임대해 지난해 개관전 ‘클림트’에 이어 올해 후속작 ‘반 고흐’ 전을 올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빛의 벙커’ 입구. 1985년 설계를 시작, 1990년 착공한 뒤 2012년까지 한국통신 해저 광케이블센터와 서버기지로 쓰였던 공간이다. ‘빛의 벙커’는 2017년 11월부터 임대해 지난해 개관전 ‘클림트’에 이어 올해 후속작 ‘반 고흐’ 전을 올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갈림길은 클림트가 만들지 않을까 싶다. 원체 강렬했던 첫 경험이 고흐의 감상을 방해할 수 있단 얘기다. 그들 각자를 보는 방식이 같을 수 없단 이해를 얻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단 뜻이기도 하고. 고흐의 생각과는 무관한 아티스트의 상상력에서도 호불호가 생길 수 있다. 여러 작품을 오버랩하고, 레이어를 만들고, 그림 속 인물에 동작을 붙이니 말이다. 가령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원작에서 산책하던 두 남녀가 전시에선 나란히 주저앉은 장면을 어찌 봐야 할까.

하나면 충분하다. 예술은 어차피 서로 달리 보는 방식을 일깨우는 행위가 아니던가. 벙커에 빛길을 냈다는 자체로도 이미 기발한 발상이니. 전시는 내년 10월 25일까지.

‘빛의 벙커’에서 투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1888)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연인으로 보이는 저 남녀는 원작에선 강변을 따라 산책 중이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빛의 벙커’에서 투사한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1888)을 정면에서 바라봤다. 연인으로 보이는 저 남녀는 원작에선 강변을 따라 산책 중이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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