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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드럼·정수 빨대…약자에 온정 건네는 ‘적정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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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여성들이 끌고 가는 ‘큐드럼’.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짊어질 때보다 힘을 덜 들이며 다량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  큐드럼 사이트 제공

아프리카 여성들이 끌고 가는 ‘큐드럼’. 머리에 이거나 어깨에 짊어질 때보다 힘을 덜 들이며 다량의 물을 운반할 수 있다. 큐드럼 사이트 제공


‘소프트웨어 왕국’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던 빌 게이츠 회장은 2008년 은퇴를 선언하고 부인과 함께 복지재단을 이끈다. 부자가 사회공헌에 힘쓰는 미국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이었다. 그런 게이츠가 내놓은 제안은 뜻밖이었다. 신형 화장실을 개발하자고 했기 때문이다. ‘윈도’라는 최첨단 기술문명의 핵심을 이끌던 게이츠가 뜬금없이 화장실에 눈길을 준 건 세계 인구의 3분의 1은 제대로 된 수세식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비롯됐다. 악취와 비위생으로 인한 생활수준 저하와 질병 창궐 가능성을 예방하자는 철학이 깔려 있다.

과학계는 즉각 응답했다. 거대한 상하수도 없이도 미생물이나 전기분해 등을 통해 깨끗하게 ‘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을 내놨다. 이때 활용된 기술은 최첨단도 아니었다. 기존 기술을 창의적으로 조합하고 저렴한 재료를 섞어 개발도상국에서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이른바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자본과 에너지 적게 쓰면서

개도국 시민들 복리 향상에 초점


적정기술은 1970년대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가 주창한 ‘중간기술’이라는 개념에서 나왔다. 대량 생산과 첨단 기술이 인류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자본과 에너지를 적게 쓰면서 특히 개발도상국 시민들의 복리 수준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적정기술의 대표적인 사례는 ‘큐드럼(Q drum)’이다. 상수도 시설이 미비한 아프리카에서는 식수를 길어오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 저수지나 우물에서 물을 채운 뒤 무거운 물통을 머리에 이거나 짊어지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다. 대개 식수 운반은 여성이나 어린이가 맡는다. 수십㎏의 무게를 오로지 자신의 근력으로 감당하며 이동한다. 공부 같은 좀 더 생산적인 활동에 들일 시간까지 빼앗긴다.

큐드럼은 도넛을 연상시킨다. 물을 채운 뒤 가운데 구멍에 끈을 연결해 끌면 바퀴처럼 스르륵 굴러간다. 물을 50ℓ나 담을 수 있지만 당연히 힘은 덜 든다. 수천년 전 발명된 바퀴의 원리가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셈이다. 또한 웅덩이에 막대를 닮은 작은 필터를 꽂아 깨끗해진 물을 빨아 마실 수 있는 ‘라이프 스트로(Life straw)’도 적정기술 사례다. 특히 재난 지역이거나 이에 준하는 곳에서 수인성 질병을 막는 역할을 한다. 홍성욱 한밭대 적정기술블록체인연구소장은 “기본적인 생존을 돕는 적정기술의 경우 국제기구나 비정부기구(NGO)가 다량으로 제품을 사들인 뒤 무상으로 보급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일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최대 목표인

이윤극대화와 일정 거리 두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과 공생


적정기술 중에선 의도가 잘 실현되지 않은 사례도 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어린이용 놀이기구와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는 기능을 합친 ‘플레이 펌프’가 일례다. 이는 2000년대에 아프리카 전역에 1800여대가 설치됐다. 처음엔 아이들도 놀게 해주면서 물까지 길어 올릴 수 있다며 획기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결국 성인 여성들이 하염없이 놀이기구를 돌리는 이상한 상황을 만들었다. 물을 길어야 할 때와 아이들이 놀고 싶을 때가 일치하지 않았고, 회전량에 비해 물을 퍼올리는 속도도 늦었던 것이다.

일부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적정기술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이윤 극대화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제1 목표와 일정 수준 거리를 두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또 다른 적정기술이 인간 사회에 온기를 불어넣을지 주목된다.

이정호 기자 r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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