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세 일본의 나가사키 등에는 모잠비크·고아·말라카·명나라·조선·일본 출신의 노예와 자유인, 상인, 용병들이 뒤섞여 살았다. 당시 일본의 다인종적 상황은 항구와 대도시 풍경을 묘사한 남만병풍(南蠻屛風)이라는 풍속화 병풍들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남만은 남쪽에서 온 오랑캐, 즉 유럽인을 가리킨다. 위키피디아 |
오늘 소개할 책은 포르투갈·에스파냐 사람들이 온 지구의 바다를 석권하던 시기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 일본인·중국인·조선인 노예들의 실상을 밝힌 오카 미호코와 루시오 데 소자의 공저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 - 아시아, 신대륙, 유럽>(주오코론신샤, 2017·사진)이다. 책의 공저자 가운데 하나인 루시오 데 소자는 같은 테마를 <근세 일본의 포르투갈 노예 무역 - 상인, 예수회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노예>(BRILL, 2018)로 출간했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출신자들이 다루던 무역 물품 가운데 노예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고, 이 시기의 노예 무역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 <대항해시대의 일본인 노예>는 일본인 노예 세 사람이 멕시코시티의 재판소에서 자신들 일생을 증언한 문서를 발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15세기 초, 이베리아 세력은 동아프리카의 모잠비크에서 인도의 고아,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명나라의 마카오, 일본의 나가사키, 남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현지 세력을 공격하고 요새를 세운 뒤 현지 출신 노예를 사고팔았다. 이들은 아메리카 대륙 이외 지역에서는 직접 노예 사냥을 하기보다는 그 지역에서 발생한 노예를 중개무역으로 구입하는 형태를 취했다.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시공사, 2012)에서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세력은 이베리아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내륙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 주민들을 유럽인들에게 팔았다. 물론 이것은, 흑인 노예가 대규모로 거래된 책임을 아프리카인들에게 돌리고 유럽인들에게는 죄가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위 인용문에서 지적하고 있듯이, 유럽인들이 일반적인 상품 대신 노예를 원하게 되자, 유럽인들 수요에 맞춰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발달한 사회가 노예 사냥을 시작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와 마찬가지로 내란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던 일본에서도 노예가 대량으로 발생했다. 전국시대(센고쿠지다이)라 불리는 일본의 내란기에는 유력한 영주들이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그 지역 백성을 노예로 만드는 일이 흔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후지키 히사시의 <잡병들의 전쟁터: 중세의 용병과 노예 사냥>(아사히신문사, 1995) 등에 의해 전국시대 일본의 노예 사냥 실상이 밝혀져 있다.
이윽고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Francisco Javier)가 1549년 일본에 도착하면서 유럽과 일본의 교류가 시작되자, 일본인 노예는 나가사키-마카오-말라카-고아-리스본 루트, 또는 나가사키-마카오-마닐라-아카풀코 루트로 전 세계로 팔려갔다. 같은 시기 명나라 해안 지역에서 후기 왜구(後期倭寇)라 불리는 다민족 해적집단에 생포된 중국인들도 일단 나가사키로 잡혀온 뒤에 일본인 노예와 동일한 루트를 따랐다. 그리고 1592~1598년 임진왜란 시기에는 조선인 포로들이 마찬가지로 위의 루트를 따라 세계로 팔려갔다.
소련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것은 분명히 비극이지만, 같은 시기 연해주의 중국인 수만명은 시베리아로 끌려가 사라졌고 크림반도의 타타르인도 거의 전부가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이주됐다. 스탈린 자신의 출신 지역인 조지아에서도 수만명이 살해되거나 굴락(gulag·노동수용소)으로 보내졌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포로가 발생한 것은 비극이지만, 이는 당시 인도양·남중국해·동중국해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던 거대한 비극의 일부였다.
루시오 데 소자의 <근세 일본의 포르투갈 노예 무역 - 상인, 예수회와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 노예> 표지. |
당시 나가사키에는 모잠비크, 고아, 말라카, 벵골, 시암, 명나라, 조선, 일본 등 인도양·남중국해·동중국해 연안 지역 출신 노예와 자유인, 상인과 용병들이 뒤섞여 살고 있었다. 일본의 전국 통일을 거의 완수한 오다 노부나가는 유럽인 선교사가 데려온 모잠비크 출신 흑인 노예에게 야스케(彌助)라는 이름을 주고 부하로 삼기도 했다. 흑인 사무라이 야스케는 오다가 교토의 사찰 혼노지에서 부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습격당했을 때에도 끝까지 오다의 곁을 지켰다. 아케치는 야스케가 일본인도 아니고 또 흑인이어서 동물 같은 존재이므로 죽일 필요가 없다고 하여 살려주었다고 한다. 이 시기 일본의 다인종적 상황은 당시 일본의 항구와 대도시 풍경을 묘사한 남만병풍(南蠻屛風)이라는 풍속화 병풍들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남만이란 남쪽에서 온 오랑캐, 즉 유럽인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이베리아 상인들은 전 세계적 규모로 노예 무역을 수행했고, 그 무역의 흔적은 전 세계 도서관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일본인 노예들이 멕시코시티의 재판장에서 스스로의 처지를 밝힌 문서가 있어 주목된다. 그 주인공은 가스파르 페르난데스 하폰이라는 1577년생 노예다. 분고(오늘날의 규슈 동북쪽 오이타현)에서 태어난 가스파르는 8살 내지는 10살 때 노예상인에게 유괴되어 나가사키로 끌려갔다. 가스파르를 구입한 사람은 가톨릭교도로 개종한 포르투갈 비제우 출신 유대교도 상인인 루이 페레스였다. 당시 노예들이 거래될 때는 그 거래가 합법적임을 증명하는 문서를 교회에서 발급받았는데, 가스파르의 거래에 대한 증명서를 발급해준 나가사키 예수회 신부 안토니오 로페스는 그가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던 듯 “이 거래는 위법하다”고 덧붙였다.
루이 페레스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이단심문에 넘기고 재산을 압류하는 등 유대인 탄압이 포르투갈에서 극심해지자 인도의 고아, 명나라의 마카오 등을 거쳐 나가사키까지 도망쳐 왔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일본인 가톨릭교도들이 유대인 출신 페레스 집안을 핍박하고, 포르투갈에서 파견된 이단심문관이 1591년 8월19일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이들 가족은 필리핀 마닐라로 탈출했다. 마닐라에서 머물던 시기에 페레스 가족은 기존의 벵골·일본인 노예에 추가하여 일본인 노예 두 사람과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를 구입했다. 시기적으로 보아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는 임진왜란의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되팔려서 마닐라에 건너와 있었을 것이다.
유럽에서 도망친 유대인의 멕시코 ‘이단심문’ 재판에 증인으로 선 일본인 노예기록 등 담겨
이윽고 페레스 가족의 정체가 드러나자, 마닐라의 이단심문소는 일본인 노예 가스파르와 조선인 노예 가스파르, 그리고 벵골인 노예 파울로를 불러 주인 집안의 행적을 고발하게 했다. 세 사람 가운데 일본인·조선인 가스파르는 페레스 집안 사람들이 비밀히 유대교 의식을 치른다고 증언했고, 벵골인 노예는 이와 정반대 증언을 하며 주인 집안을 옹호했다. 멀쩡히 살던 집에서 납치돼 팔려온 일본인 가스파르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포로가 된 조선인 가스파르 모두 포르투갈인 주인 집안을 옹호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던 듯하다. 마침내 페레스 집안은 이단 판결을 받아 전 재산이 몰수됐고, 루이 페레스는 마닐라에서 멕시코의 아카풀코로 이송되던 중 배에서 사망했다. 압류된 재산 목록에 조선인 가스파르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마닐라에서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매된 것 같다.
동료 노예 중에는 임진왜란 포로로 추정되는 조선인도…
대항해 시기 횡행했던 노예무역의 비극 여실히
일본인 노예 가스파르는 원래 12년 근무 후 자유인이 된다는 조건이었지만, 루이 페레스의 재산을 몰수한 멕시코의 이단심판관이 슬쩍 “종신 노예”로 바꾸어 서류를 작성하는 바람에 가스파르가 소송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일본인 노예가 스스로의 처지를 밝힌 희귀한 문서가 태어난 것이다. 1604년 6월5일, 재판소는 가스파르와 또 한 명의 일본인 노예인 벤투라가 자유인 신분이라고 판결했다.
16~17세기 다국적 상인·노예·자유인·용병들이 뒤섞여 살았던 나가사키,
주요 노예 공급처이자 수요지
이상과 같이 일본은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전기에 걸쳐 노예의 세계적인 유력한 공급처이자 수요지였고, 유럽에서 탄압받는 유대인들의 임시 도피처이기도 했다. 그 100년 사이의 7년간, 조선인들이 임진왜란 포로로 나가사키, 히라도 등에서 마닐라 등을 거쳐 세계로 판매되었다. 유럽에서 무기를 구매한 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부족이 내륙의 약한 지역에서 노예를 잡아 유럽에 판매한 것처럼, 유럽산 조총으로 무장하고 전함까지 구입하려 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과 명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예수회 신부 조반니 니콜로가 그린 오다 노부나가. 위키피디아 |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한 뒤에도, 세계 곳곳에는 일본인 노예 및 일본인 부모를 둔 혼혈아들이 존재했다. 1607~1613년 페루 리마의 주민대장에는 인도 고아 출신의 “포르투갈 인디오”가 56명, 마닐라·마카오·말라카 등에서 온 “중국 인디오”가 38명, 나가사키에서 건너온 “일본 인디오”가 20명 있다고 적혀 있다. 1625년 마카오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유럽계 남성 358명, 혼혈 남성 411명, 외국인 75명으로, 일본·중국·말레이·조선·인도인과의 혼혈이 마카오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오늘날 일본 시민들이 노예였던 조상들에 무심하듯,
한국이 조선시대 노비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다루듯
두 나라 모두 산업실습생으로 근무하는
다양한 국적의 젊은이들이 겪는 산업재해와 인권 문제를 모른 척
오늘날 일본 시민은 이들 중·근세 일본인 노예 및 그 혼혈에 대해 잘 모른다. 조상들이 같은 일본인을 노예로 삼고 유럽 상인들에게 팔았을 리가 없다는 사회적 통념 때문이다. 한국 시민들이 조선시대 노비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두 나라 시민들이 전근대의 노예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그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은, 현재 두 나라에서 근무하고 있는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산업실습생들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거나 간과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을 이단으로 몰아붙여 재산을 압류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알프레두 로케 가메이루 ‘유대인 추방’(1917). 위키피디아 |
중세 일본의 노예는 계약한 근무기간을 채우거나 주인이 죽으면 대개 자유인이 되었지만, 오늘날 일본과 한국에서 일하는 산업실습생들은 근무기간이 끝나면 추방된다는 점에서 조건이 더 나쁘다. 중세 포르투갈 정부에서는 노예가 나이 들거나 치료받아야 할 때에는 해당 지역의 구빈원(misericordia) 원장과 수도사들이 이들을 병원에 입원시킬 것을 의무화했다. 이에 반해 현재 일본과 한국에서는 영세 기업과 농촌에서 미등록 외국인들을 고용하면서 최저임금이나 휴일도 지키지 않고, 안전도구를 지급하지 않아 심각한 부상을 입어도 제대로 산재처리를 해주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은 사회와 기업의 조직적 살인”…
지금의 일본·한국은 유럽인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이렇듯 일본과 한국의 외국인 산업실습생과 외주노동자들(한국은 2004년 산업연수생제 대신 고용허가제로 변경)은 중세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상품으로서 거래된 일본인·조선인 노예 이상으로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고, 이들은 죽음으로써 이에 저항하고 있다. 일본 법무성 내부자료에 따르면 2015~2017년 외국인 기능실습생 69명이 자살·동사(凍死) 등으로 사망했다고 하며(Harbro Business 2018년 12월10일자 ‘기능실습생의 다수 사망 충격.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은 어떻게 생각하나’), 2009~2018년 한국에서 자살한 네팔인 노동자만 43명에 이른다고 한다(서울신문 2019년 9월23일자 ‘2019 이주민 리포트: 코리안드림의 배신 <1>이방인의 비극’). 이러한 상황에 대해 포천 이주노동자센터의 김달성 목사는 “한국에서 산재 사망은 죽음이 아니라 죽임이다. 사회의 조직적 살인이다. 기업의 살인 범죄다. 국가가 법·제도로 뒷받침하는 기업 살인”이라고 비판한다. 과연 현대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유럽인의 노예 무역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 필자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문헌학자이자 인문저술가이다. 2010년 일본에서 간행한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가사마쇼인)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했다. 2011년 2인 공저 <히데요시의 대외 전쟁>(가사마쇼인)은 일본 도서관협회 추천도서로 선정됐다. 10여종의 단행본, 공저, 번역서 등을 출간했다.
김시덕 | 문헌학자
▶ 최신 뉴스 ▶ 두고 두고 읽는 뉴스 ▶ 인기 무료만화
©경향신문( 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