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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정임의 '먹고 사랑하고 떠나라']〈24〉 남미 페루 잉카 수도 쿠스코 맥주 쿠스케냐와 마추픽추 산골 마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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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도르라는 이름의 비행기에서 내리자 정오의 태양이 빨간 기와지붕 위로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리마에서 남쪽 해안가 나스카로 이어지던 남태평양 연안의 뿌윰했던 대기가 안데스 고산지대에 이르니 말끔히 걷히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공항을 빠져나와 몇 걸음 햇빛 속을 걸었다. 고산증에 대비해 리마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삼킨 작은 알약의 효과 때문일까. 빛의 걸음걸이처럼 중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망각의 빛 속에 빠져든 듯, 나는 어디에서 왔는지, 이후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생각도 작동하지 않았다.

안데스 산중 고지(高地)의 강렬한 태양빛만이 정수리 위로 거침없이 내리쬐었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붙잡혀 서 있었을 것이다. 광장 가장자리에 대기 중이던 차에 올랐다. 한낮인데도 버스 안이 캄캄했다. 빛을 차단하기 위해 창마다 두터운 커튼이 둘러쳐져 있었다. 나는 맹렬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에 맞서 커튼 틈새로 방금 지나온 광장을 내다보았다. 그러니까 이곳이 태양신을 숭배하는 잉카인들의 황금빛 고도(古都), 그들의 언어 케추아어로 ‘세계의 배꼽’이라 부르는, 해발 3399m에 위치한 쿠스코(Cuzco)였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 해발 3399m 안데스 산지에 위치한다.

잉카 제국의 옛 수도 쿠스코. 해발 3399m 안데스 산지에 위치한다.


공항을 벗어나자 곧바로 시내였다. 리마에서 버스로 20시간, 안데스 산악 지대를 굽이굽이 돌아와야 하지만, 비행기로는 한 시간 반여 소요되었다. 차는 잉카의 정복왕 파차쿠티 동상을 지나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산토도밍고 교회 앞에 도착했다. 시내는 방사선으로 형성되어 있었고, 너머로 병풍처럼 산이 둘러쳐져 있었다. 교회보다 높은 건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 집들은 햇빛이 강한 지역 특유의 빨간 기와지붕과 검붉은 돌벽으로 지어져 있었다. 7월이었으나 남반구의 계절로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이었다. 교회 입구 잔디는 푸릇푸릇했지만 초목이 울창하지 않아 멀리 산구릉의 집들까지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민둥산 언덕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l Peru!’ 그렇다. 여기는 페루, 땅에 무엇인가를 새기기 좋아하는 잉카인들이 사는 곳. 지난 며칠간 나를 사로잡았던 지상화 유적지 나스카 라인의 수많은 형상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코리간차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잉카인 할머니.

코리간차에서 내려오는 길에 만난 잉카인 할머니.


쿠스코는 마추픽추를 꿈꾸는 여행자들의 관문이다. 마추픽추에 오르기 위해서는 우선 쿠스코를 중심으로 한 해발 3000m 내외의 고산지대 풍토에 적응해야 한다. 숙소가 있는 우루밤바(2280m) 계곡으로 내려가기 전에 쿠스코 시내를 돌아보았다. 13세기에 형성돼 16세기에 남미 잉카족을 대표하는 제국으로 절정을 이루었던 이곳은 스페인 침략자들이 들이닥치기 전까지 신전과 궁전을 황금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런데 잉카인들이 힘과 영원을 비는 이 황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재앙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했다. 황금을 찾아 한 손엔 십자가, 다른 한 손에 총을 든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무력하게 도시를 빼앗겼다. 쿠스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관광 명소들, 곧 바로크식으로 웅장하게 지어진 산토도밍고 교회와 아르마스광장의 대성당과 라 콤파니아 데 헤수스 교회 등은 모두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유물이다. 산토도밍고 교회는 원래 잉카인들의 혼인 태양 신전이 있던 곳(코리간차)이고, 대성당 역시 잉카인들의 신전, 헤수스 교회는 원래 잉카 왕의 궁전이다.

전통 의상을 입은 잉카의 소녀들.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 서 있다가 사진에 찍히면 영락없이 돈을 요구한다.

전통 의상을 입은 잉카의 소녀들. 여행자들이 모이는 곳에 서 있다가 사진에 찍히면 영락없이 돈을 요구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쿠스코는 거대한 퓨마 형상을 띤다. 잉카인들에 따르면, 하늘은 매가 지배하고 땅은 퓨마가 지배한다. 퓨마의 허리에 해당되는 코리칸차(현 산토도밍고 교회)는 잉카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로 태양의 주신을 모시는 성소(聖所)이다. 그러나 옛 황금 궁전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스페인 양식으로 탈바꿈되었다. 직선과 곡선의 단아함이 돋보이는 산토도밍고 교회를 둘러보는 것은 이면에 코리칸차라는 잉카인의 숨은 신과 혼을 속으로 더듬는 기이한 순례였다. 페루는 무기 소지가 허용된 나라. 종종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게릴라들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아르마스광장에서는 소매치기 사건이 빈발한다. 여행의 본질인 자유로운 떠돌기와 감상이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길목마다 민속 옷을 차려 입고 조금만이라도 사진에 찍히면 악착같이 손을 내미는 어린 잉카 소녀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 광장을 걸어나올 때 느꼈던 무중력 상태가 서서히 풀린 탓인지, 언뜻 단단하고 웅숭깊어 보이는 쿠스코의 모든 것이 나를 서글프게 했다.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의 우루밤바로 가는 길, 어둠이 내렸다.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내려 가니 숨바꼭질하듯 산골 마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드문드문 집집이 불빛이 터졌고, 멀어지는 불빛을 바라보며 페루에 온 지 며칠이나 되었나 헤아려보았다. 우루밤바(Urubamba, 해발 2280m)에서 밤을 보내고 날이 밝으면 마추픽추로 향할 것이다. 숙소에 다다르자 사방이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어두웠다. 조명을 받은 벽에 붉은색으로 산 아우구스틴 호텔(San Augustin Hotel)이라고 씌어 있었다. 옛 수녀원을 개조한 호텔이었다. 이곳에서 마추픽추 등반 전후, 이틀을 묵을 것이다.

우루밤바 산 오구스틴 호텔.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의 우루밤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마추픽추로 향한다.

우루밤바 산 오구스틴 호텔. 성스러운 계곡이라는 뜻의 우루밤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마추픽추로 향한다.


입구로 들어서자 뜰에 레몬 나무가 반기듯 서 있었다. 내가 묵을 방은 안채, 뜰을 가운데 두고 디귿 형태로 지어진 2층 건물의 2층이었다. 여장을 풀고, 정원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들어가니 저녁 식사로 페루 전통 음식 뷔페가 준비되어 있었다. 안데스 고지 계곡에서의 첫 밤을 위해, 쿠스코 특산 맥주 쿠스케냐로 건배를 했다. 여느 맥주와는 다른, 톡 쏘는 맛이 독특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레몬 나무가 서 있는 입구 뜰로 나왔다. 문을 나서자 형체를 분간할 수 없는 산이 거리를 두고 병풍처럼 버티고 있었다. 그 위 까만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질 듯 와글와글했다. 누군가 “남십자성이다!”라고 외쳤다. 내가 살고 있는 북반구에서는 보이지 않고, 항해시대 남반구 바다를 건너던 서구인들에게 중요한 표적 역할을 했던 의미심장한 별. 오후에 코리간차 벽 한쪽에서 본, 잉카인들이 그려놓은 별무리가 떠올랐다. 일행인 J 시인이 별무리 앞에 오래 서 있었고, 나는 J 시인이 지나가자 사진을 한 컷 찍었다. 그때 렌즈에 포착된 별무리를 우루밤바 계곡에서 확인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루밤바의 페루 전통 뷔페 저녁 식탁.

우루밤바의 페루 전통 뷔페 저녁 식탁.


뜻밖에 남십자성을 보았기 때문일까. 상쾌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고산증세가 느껴지면 따뜻한 마테차가 방으로 배달되었다. 새벽에 무리 없이 일어났다. 마추픽추행 열차를 타기 위해 한 시간여 차를 타고 우루밤바 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하자 마추픽추행 블루 트레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역 입구에는 간이 커피집과 기념품 가게가 즐비했다. 태양이 높이 떠올랐고, 빛을 등지고 키 작은 아낙이 마을에서부터 걸어왔다. 점점 가까워져서 바라보니, 그녀의 머리는 색색의 모자가 겹으로 씌워져 있었다. 계곡마다 숙소에서 밤을 보낸 여행자들이 열차를 타기 위해 속속 플랫폼에 모여들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낯선 얼굴이었지만, 그 순간 마추픽추행 열차를 함께 탄다는 사실로 설레면서도 친숙한 표정들이었다. 머리 위에 산처럼 쌓아올린 모자 장수 여인을 남겨놓고 파란 기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는 오얀타이탐보를 거쳐 아구아스 칼리엔테스라는 작은 역. 산 중간중간 트레일 코스가 보였다. 산과 산 사이에 난 철길로 한 시간 반여를 달린 끝에 마추픽추역에 닿았다. 열차에서 내리자 공항에서처럼 햇빛이 와락 쏟아지며 반겼다. 잉카인들이 환영하듯 숙소 피켓을 들고 손님들을 마중 나와 있었다. 승객이 모두 하차한 뒤 파란 기차는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마을 뒤로 천천히 사라졌다.

기차 종착지 마추픽추 아랫마을.

기차 종착지 마추픽추 아랫마을.


마추픽추는 케추아어로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해발 2400m에 세워진 잉카 제국의 옛 도시로, 아랫마을에서 보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도시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 공중 도시를 둘러보기 위해서는 한 차례 더 차를 타야 하는데, 등산객과 트레킹족은 직접 오르기도 한다. 굽이굽이 곡예운전을 하며 올라가면서 운전기사가 이 길에 대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일명 굿바이 보이. 한 굽이 돌 때마다 소년이 나타나 ‘굿바이’ 인사를 건네는데, 버스가 다 내려오면 어느새 소년이 먼저 내려와 ‘굿바이’ 손을 흔든다는 것. 여행자들은 소년의 빠른 걸음에 대한 감탄과 동시에 솟구치는 측은지심으로 달러를 준다는 것. 버스보다 빠르게 마추픽추를 내려오는 이들 ‘굿바이 소년’에 대한 애틋한 일화를 뒤로하고, 마침내 차에서 내려 마추픽추 입구에 이르렀다. 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다행히 먹구름은 아니었다. 마추픽추 지도를 받아 한걸음 내디뎠다.


마추픽추(늙은 봉우리) 정상에 섰다. 구름이 동쪽으로 밀려가면서 파란 하늘이 열렸다. 구름에 가렸던 해가 서서히 본 모습을 드러내었다. ‘젊은 봉우리’라는 뜻의 와이나픽추가 건너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 아래 잉카의 신비로운 계획도시 유적이 펼쳐져 있었다. 잉카인들은 해발 2400m의 높은 곳에 왜, 그리고 어떻게 돌을 운반해 도시를 건설할 생각을 했을까. 눈앞에 두고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나는 받아든 지도에 표시된 대로 제일 먼저 도시 남쪽에 있는 태양 신전을 찾았다. 그리고 독수리 형상의 콘도르 신전과 우물, 수로(水路) 등의 위치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미국의 역사학자 하이럼 빙엄이 발견한 것은 1911년. 건설 시기는 15세기 중반, 스페인 식민지 시대(추정). 결국 마추픽추는 400년 동안 주위의 높은 산봉우리들에 가려져 세상에 없는 존재였다. 망지기의 집인 정상에서 아래로, 다시 서쪽 농지 지역까지 두 발로 밟는 동안 두 시간 가까이 흘렀다. 석양빛이 비스듬하게 서쪽 사면을 고즈넉하게 비추고 있었다.

해발 2400m 고지에 세워진 잉카 제국 도시 마추픽추. 아래에서는 구름이 걸쳐져 있어 공중 도시로도 불린다.

해발 2400m 고지에 세워진 잉카 제국 도시 마추픽추. 아래에서는 구름이 걸쳐져 있어 공중 도시로도 불린다.


마추픽추를 다 내려올 동안 굿바이 소년은 만나지 못했다. 대신 ‘엘 콘도르 파사’의 팬플루트 선율이 차 안에 흘렀다. 소녀적 오빠의 방에서 사이먼과 가펑클의 노래로 흘러나오던 가사를 가만히 읊조렸다. “멀리 항해를 떠나겠어…인간은 땅에 머물러 있다가 세상에 가장 슬픈 소리를 들려주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의 입자가 퍼지듯 몸에서 힘이 새어나갔다. 힘이 빠져나갈수록 땅 밑으로 가라앉듯 몸이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고산증세였다. 이틀 동안 유지된다는 알약의 효능이 그새 떨어진 모양이었다. 마을로 내려오니 기찻길 옆 식당에 근사한 저녁 뷔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추픽추에서의 저녁식사를 위해 고산증을 약화시켜준다는 마테차를 한 모금 마셨다. 코카잎에서 우려낸 떫고 씁쓸한 맛의 마테차, 비록 밤새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산증의 두통과 불면을 잠재우지는 못했지만, 마추픽추에서 음미한 잊을 수 없는 맛이었다.

소설가·동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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