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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삶]미국의 어두운 밤을 받아들일 즈음, 깨달았다 연구는 더 밝아졌고 난 과학을 사랑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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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한의 ‘연구실 가는 길’
한국의 환한 백색 전등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은은한 무드등뿐인 미국의 저녁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하는 단순한 삶에 익숙해지니 그 어둠이 편안해졌고, 전보다 훨씬 가족과 연구에 몰입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대한 제공

한국의 환한 백색 전등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은은한 무드등뿐인 미국의 저녁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휴식하는 단순한 삶에 익숙해지니 그 어둠이 편안해졌고, 전보다 훨씬 가족과 연구에 몰입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이대한 제공


미국 생활을 시작하고 예상치 못하게 적응해야 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조명’이었다. 환한 대낮에 둘러보고 마음에 들어 입주한 새 보금자리의 밤은 너무나도 어두침침했다. 낮에는 미처 살펴볼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당황스럽게도 거실이나 방 천장 어디에서도 전등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부엌이나 화장실에 달린 전등의 불빛은 노르스름했고, 그마저도 조도가 낮았다.

어쩔 수 없이 찾아간 상점의 조명 코너에도 누리끼리한 조명 일색이었다. 스탠드 조명 두 개를 사서 각각 거실과 방에 설치하니 밤에 사물을 식별할 정도는 되었지만, 밝고 하얀 한국의 전등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여전히 저녁 내내 눈이 침침해진 것처럼 불편했다. 시야가 또렷하지 않으니 정신도 흐리멍텅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둡고 텅 빈 집에서 홀로 지내다 보니 날이 갈수록 우울하고 무기력해져갔다.

미국에 오기 전까지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아침형 인간보다는 저녁형 인간에 가까운 편이었다. 아침 잠이 많은 편이었고 보통 새벽 한두 시쯤 잠드는 것이 일상이었다. 저녁 시간은 나에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이 아니라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부산스러운 낮 시간과 달리 한산한 저녁 시간의 연구실은 집중력이 요구되는 실험을 하거나 인기 있는 실험기기를 마음껏 사용하기에 좋았다. 야근 환경을 즐기다 보니 저녁 시간에 본격적인 실험을 시작하는 날이 적지 않았고, 아침에 연구실에 나와 밤늦게 막차를 타고 퇴근하는 날이 많았다.

야근을 하지 않는 날에도 저녁 일찍 집에 들어오는 일은 드물었다. 서울에는 만날 사람도, 먹을 음식도, 마실 술도, 배울 지식도, 즐길 문화도 너무 많았고,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보통 매주 두어 개의 저녁 약속이 잡혀 있었고, 대개 술이 곁들였다. 강연, 공연, 전시회, 집회 등 여러 행사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종종 스스로 행사를 기획하거나 진행하기도 했다.

번잡한 저녁 시간은 방황하는 내 영혼의 발버둥이기도 했다. 20대 청년으로서 나는 때론 홀로, 때론 함께 고민하고 방황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긴 어디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세상은 왜 정의롭지 못한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하는 과학으로부터는 내 삶과 내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설명을 얻기가 어려웠다.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살아가기 위해 나를 과학자 혹은 대학원생이라는 정체성에만 가둬둘 순 없었다.

나는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이 아니라 하나의 틀로 규정할 수 없는 분인(dividual)이 되려 했다. 연구 외에 내가 펼치는 다양한 활동들이 나를 심오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고, 내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고 믿었다. 나의 저녁은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아름다움의 이유를 탐구하는 시간이었다. 해가 지면 문학, 음악, 미술과 더 가까워지려 했고, 종종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기도 했다. 사유가 깊은 어른들을 만나 과학으로부터 얻은 우주와 생명에 대한 이해를 철학적, 미학적, 신학적 차원으로 확장해 보려고도 했다.


공동체 생활에도 열정적이었다. 나는 내가 맺은 모든 관계라고 믿었고, 공동체 속에서 더 깊고 넓은 존재로 거듭난다고 확신했다. 좋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었고, 사랑하는 공동체를 위해선 나의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를 찾아주면 감사하며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진실한 타인과 진심을 다하여 관계를 맺는 것이 삶의 가장 귀한 경험이자 큰 기쁨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에서의 저녁은 일하고,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며, 사랑하고 연대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저녁이 있는 삶’은 나에게 ‘휴식이 있는 삶’이라기보다는 ‘내 존재를 풍성하게 하는 삶’에 더 가까웠다.


그렇게 반짝거리던 내 청춘의 저녁은 미국에서 맞닥뜨린 어둠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삶을 풍성하게 채우던 활동과 관계들로부터 단절되면서 나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었다. 따뜻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던 삶의 온기가 흩어진 자리는 서늘하고 쓸쓸했다. 낯선 연구실에서 하루를 보내고 어두운 집으로 돌아오는 깜깜한 길 위에서 나는 몇 번이고 되뇌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얻으려 나는 여기까지 흘러왔나.

다행히 미국에 온 지 두 달 만에 아내가 합류하면서 어떤 조명보다도 환한 불빛이 켜졌다. 고독을 버텨내야 했던 저녁은 신혼의 시간이 되었고, 노르스름하던 전등도 비로소 무드등이 되었다. 조그마한 식탁을 창가로 옮겨 함께 석양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기도 했다. 결혼한 지 1년 정도 지나서야 우리 부부는 온전한 신혼을 맞이한 것 같았다. 미국에 오기 전 몇 달 동안 신혼 생활을 했지만, 졸업 준비와 송별 모임 등으로 바쁘게 보내느라 둘만의 저녁 시간을 보내지 못할 때가 많았다.

타지에서의 삶을 걱정했던 아내도 새로운 생활을 마음에 들어 했다. 무엇보다 내가 일찍 퇴근하고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 좋아했다. 늦게까지 술자리에서 귀가하지 않는 남편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도 아내도 모두 친구들로부터 물리적으로 멀어졌지만, 대신 우리 부부는 그 빈자리를 채워주며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낯선 땅에서 함께 고립된 만큼 더 가까워졌다.


아내의 존재 덕분에 소박하고 단순한 삶에도 점차 적응해나갔다. 낮에는 외국인 노동자로, 저녁에는 남편으로 살아가는 삶이 익숙해졌다. 어두침침한 조명도 편안해졌다. 눈이 침침해지니 정신이 흐리멍텅해졌고, 정신이 흐리멍텅해지니 잠이 찾아왔다. 나쁘지 않은 전개였다. 답답하기만 하던 누런 조명들의 존재 이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저녁을 활동 시간이 아니라 휴식 시간으로 여기는 문화라면 정신을 깨우는 백색등은 가정집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편 밤이 더 어두워진 만큼 낮은 한층 밝아졌다. 기상 시간이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거의 매일 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만큼 일과 시간 중에 맑은 정신으로 일할 수 있었다. 특히 술을 마시는 날과 음주량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숙취와 피로로 골골대는 시간이 거의 사라졌다.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연구 진행속도는 오히려 더 빨라졌다.

한국에서는 다채롭게 펼쳐냈던 관심사들의 판로가 막히면서 상대적으로 연구에 대한 집중도도 높아졌다. 과학자로서의 내 정체성에 대해서도 더 치열하게 고민하게 됐다. 내가 왜 과학을 하는지, 과학을 한다면 어떤 과학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친구들로부터 멀어진 만큼 아내와 친해졌듯, 다른 모든 활동이 줄어든 만큼 과학이 삶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늘어났다.

그러면서 ‘과학이 나를 필요로 하는가’와 ‘나는 과학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질문에 부딪히게 됐다. 이전에는 나를 구성하는 많은 요소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내 삶의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된 과학과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 질문은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나도 모르게 과학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아마도 한국이라는 작은 우물 안에서 자신의 학문이 얼마나 얕은지 깨닫지 못했던 무지에서 비롯된 교만이었을 테다.

하지만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과학이 나를 원한다는 믿음이 착각에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세상에 좋은 연구를 하는 과학자는 너무 많고, 반면 그들이 과학을 이어갈 수 있는 자리는 턱없이 적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어느 저녁,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나는 어렵게 객관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과학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안타깝지만 과학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갈 것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결론은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졌다. 나는 과학을 필요로 하는가. 오랜 번민 끝에 나는 이 질문에 대한 결론에도 다다랐다. 그렇다. 과학은 나 없이도 잘 굴러가겠지만, 과학 없는 나는 그럴 수 없다. 과학에 대한 내 사랑은 짝사랑이다. 짝사랑은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서 되돌려주는 조건부의 사랑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가 나를 사랑하느냐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할 수 있느냐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함께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과학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현실은 이 길을 그만두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지만, 나는 과학이 나를 떠나기 전까지 내가 과학을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의 나는 켤 수 있는 모든 빛을 밝혀 나의 저녁을 환히 비추려 했다. 어둠에 가려진 모든 것을 알고 싶었고, 모든 것을 하고 싶었고, 모두를 사랑하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 몸부림은 내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그런 한국에서의 삶에서 단절되며 강제된 미국에서의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 속에서, 내 삶의 부피는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대신 그만큼 밀도가 높아졌다. 미국에 가면 연구에 몰입하게 될 것이고, 내가 평생 과학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인지를 시험해볼 수 있을 것이라는 나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내가 앞으로 과학자로서 계속 살아간다면, 과학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는 과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미국의 어두운 저녁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필자 이대한

벌레 유전학자. 예쁜꼬마선충(노벨상도 여럿 배출한, 이 동네에서 나름 유명한 벌레다)이라는 작은 벌레를 연구하며 청춘과 박사학위를 맞바꿨다. 연구 말고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었지만, 박사가 되었음에도 생명과 생물학에 대해 너무나도 무지하다는 부끄러움 때문에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박사후연구원(포닥)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양 건너 미국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대에서 여전히 벌레를 연구하고 있다.


<이대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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