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올랐지만 현실의 높은 벽 실감
‘문수권 세컨’에 집중하며 패션쇼 휴식
하고 싶은 것 100% 다 보여주는 게 꿈
‘문수권 세컨’에 집중하며 패션쇼 휴식
하고 싶은 것 100% 다 보여주는 게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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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니가 당신을 선택했다.’
2017년 5월 패션 디자이너 권문수(39)는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세계적 디자이너 조르조 아르마니(85)가 직접 후원하는 신진 디자이너 지원 프로그램에 대한민국 디자이너 최초로 발탁됐다는 소식이었다. 자축의 시간도 찰나, 현실 감각을 재정비하자 식은땀이 났다. 당장 한 달 후에 세계 3대 패션위크인 밀라노 패션위크에 컬렉션을 내놔야 했다. 토끼눈으로 나흘 밤을 지새워 3주 만에 옷을 만들었다.
밀라노에서 열린 패션쇼 당일 그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2011년 데뷔해 패션쇼라면 인이 박인 베테랑 디자이너였지만 밀라노 패션쇼는 의미가 남달랐다. 2014년 ‘올해의 신인 디자이너상(CFDK 주관)’을 받고, 세계 최대 남성복 수주회 피티워모에서 주목받는 신예로 뽑히는 등 이미 ‘정상’에 오른 그였지만 해묵은 설렘과 달랐다. 밀라노 패션쇼 데뷔는 ‘세계 3대 패션쇼’에 오르겠다는 20대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밀라노 패션쇼에 오른 해 권문수는 코리아패션대상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하며 커리어에 정점을 찍었다. 그런 그가 이듬해 ‘2018년 가을ㆍ겨울 서울 패션위크’를 끝으로 컬렉션 라인의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그를 서울 강남구 쇼룸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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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봄·여름 문수권 컬렉션 피날레.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후원을 받아 밀라노 패션위크에 섰다. |
▶패션의 가치에 눈을 뜨다=권문수에게 패션은 공기처럼 자연스러웠다. 어렸을 때부터 패션 업계 종사자인 아버지를 따라 상품 주문, 거래처 미팅, 파티 현장 등 해외출장에 동행해 ‘눈대중’으로 패션을 익혔다.
권문수가 패션에 눈을 뜬 건 20여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다. 고등학생 당시 아버지를 따라 생애 첫 해외 패션쇼를 관람한 그는 가슴을 드러낸 ‘토플리스’(topless) 차림의 모델을 보자 숨이 멎는듯 했다. 외설적이지 않고 경이롭게 느껴졌다. ‘이런 게 예술인가’ 싶었다.
이날의 잔상은 화상처럼 남아 훗날 패션에 대한 열정에 불을 지폈다. 꿈도 목적도 없이 살아오던 권문수는 군대에 입대한 후에야 남성복 디자이너가 돼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다 군대에 갔는데 죽을 맛이더라고요. 이유 없이 혼내고, 윽박지르는데 이보다 더 힘든 일은 없겠다 싶었어요. 제대 후 진로를 고민하다보니 결국 남성복 디자이너밖에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톰 브라운이 불어넣은 용기=권문수는 뉴욕에서 보낸 시기를 인생의 황금기로 꼽는다. 군 제대 후 샌프란시스코 AAU(Academy of Art University)에 입학한 그는 남성복 과정을 마치고 2008년 ‘패션의 용광로’인 뉴욕으로 넘어갔다. 짧은 영어로 써낸 인턴 지원서를 수십 군데 돌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빽’도 연줄도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자 완성도가 높은 포트폴리오를 눈여겨보는 회사가 생겼다. 그는 작은 브랜드에서부터 시작했다. 브랜드의 말단으로 일하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기회는 노력한 자에게 찾아왔다. 일감을 맡기러 간 단추 공장에서 그는 평소 동경하던 브랜드 ‘톰 브라운’ 의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려입은 남성을 만났다.
“용기를 내 말을 걸었는데 웬걸, 톰 브라운의 디자인 디렉터인 샘 로스롭이더라고요. 인턴으로 써달라고 강력하게 호소했죠. 그 만남을 계기로 톰 브라운에서 1년 동안 인턴으로 일했어요. 꿈만 같은 시간이었죠.”
권문수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특히 톰 브라운이 효율적으로 브랜드를 운영하는 방식을 눈여겨봤다. 당시 톰 브라운은 뉴욕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브랜드였지만 직원은 단 5명에 불과했다. 디자인, 영업, 마케팅 등을 소수 인원이 도맡았다. 권문수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브랜드를 꾸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인턴 마지막 날, 톰 브라운은 권문수를 사무실로 불러 추천서와 수트 한 벌을 선물로 건넸다. 수트는 몸에 어정쩡하게 맞았지만 “돈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소중한 선물”이었다. 추천서는 훗날 권문수가 헬무트랭, 로버트 겔러, 버클러 등 유명 브랜드에서 일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높고 차가운 현실의 벽=국내 패션산업은 신진 디자이너가 성장하기 어려운 구조다. 백화점과 같은 유통업체에 입점하려면 임대료를 포함해 재고처리, 인테리어 등 각종 수수료 부담을 떠안아야 한다. 국내에선 이런 ‘위탁 판매’가 일반적인 반면, 해외에선 디자이너가 주문 받은 제품만큼만 생산해 유통업체에 공급하는 ‘홀세일(도매)’ 구조가 정착돼 있다.
권문수가 일찌감치 해외에 진출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1년 남성복 브랜드 문수권을 낸 지 1년 만에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편집숍 5곳에 입점했다. 그 이후 파리 캡슐쇼, 베를린 캡슐쇼 등에 참가했고 일본, 홍콩에도 진출했다. 해외에서 인지도를 쌓자 국내 패션업계도 그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머지않아 국내 신진 디자이너들을 소개하는 서울패션위크 ‘제네레이션 넥스트(GN)’에 참가하라는 러브콜을 받았다. 그렇게 권문수는 2013년부터 서울패션위크에 오르며 브랜드 규모를 키웠고, 어느덧 정교한 재단을 바탕으로 감각적인 컬렉션을 선보이는 중견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이미 성공한 디자이너 반열에 오른 그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해외 세일즈에 주력했으나 장기 불황으로 문 닫는 거래처가 늘었다. 고정 비용으로 나가는 해외 체류비용, 해외 쇼룸 유지비용 등도 부담이 됐다. 국내에서도 백화점 편집숍과 홀세일 방식으로 계약하는 성과를 냈으나 이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해외와 국내를 모두 잡으려다 둘 다 놓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매년 두 번 치르는 패션쇼로 인해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패션쇼에 오르기 위해서는 샘플비, 참가비, 캐스팅 비, 연출 비용 등 한 시즌에 몇 천만 원을 감당해야 했다. 해외 세일즈로 고정적 수입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패션쇼에 투자하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다시 한 번, 옹골찬 디자이너로=권문수는 원점에서 다시 ‘디자이너’의 삶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20대에는 어떤 창조적인 디자인이든 단숨에 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창의적 발상을 요구하는 디자이너와 현실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대표 역할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다 보면 재정적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요. 옷에 공을 들이면 들일수록 원가가 비싸져 대중적이지 못한 옷이 돼버려요. 단가를 맞추려고 하다 보니 원단 하나를 써도 가격을 생각하게 되고, 정작 머릿속에 그렸던 디자인은 뒷전이 되죠. 결과적으로 스스로의 가능성을 축소시켜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없게 돼요.”
권문수는 심사숙고 끝에 잠시 컬렉션 라인인 문수권의 휴식기를 갖기로 했다. 5년 동안 빠지지 않고 치렀던 서울패션위크도 당분간 쉬기로 했다. 재정적 안정을 갖춘 후에 더 속이 꽉 찬 디자이너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그는 당분간 2016년 론칭한 세컨드 브랜드 ‘문수권 세컨(MSKN2ND)’에 집중할 계획이다. 컬렉션 라인과 비교해 디자인이 실용적이고 가격대가 낮아 대중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브랜드다. 패션쇼나 해외 세일즈를 진행하지 않아 수익 창출에 전념할 수 있다. 잘만 성장시키면, 향후 컬렉션 라인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는 ‘캐시카우’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권문수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컬렉션 라인의 복귀를 그리며 말했다.
“패션쇼를 하면서도 늘 갈증이 있었어요. 시도해보고 싶은 건 있었지만 비용 때문에 망설였죠. 갖고 있는 조건에서 200%의 결과물을 보여줬지만, 하고 싶은 것을 100% 다 하지는 못했어요. 제가 여유를 되찾은 후에 다시 돌아온다면 그 때는 100%를 보여주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습니다.”
박로명 기자/dod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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