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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주름잡은 소그드인 중국 시안 산시역사박물관에 있는 낙타를 탄 소그드인상. 소그드인은 돌궐제국 이후 실크로드를 주름잡았다. |
필자는 정수일(鄭守一) 선생께 빚이 많다. 지금까지 길 위에서 거의 스무 해를 보내고 있는 까닭을 안에서 미는 힘과 밖에서 끄는 힘 반반으로 뭉뚱그린다면, 그 바깥 힘의 반은 선생이 번역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다. 한 모로코 여행가를 통해 길 위의 삶이 그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나름대로 충만한 삶임을 어렴풋이 알았다. 선생이 간난의 옥고를 치르며 정리한 <실크로드 사전>을 선보였을 때, 분단의 무게에 눌려 감옥에 갇혀서도 길을 잇고자 하는 노학자의 노고가 글자 하나하나로 전해졌다. 그에게 실크로드는 삶 자체였을 것이다. 덕분에 실크로드가 이제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다.
선생과 같은 대학자가 아니더라도 사실 누구나 맘만 먹으면 자신만의 실크로드사를 쓸 수가 있다. 실크로드는 이미 우리 세포 안까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편에서 필자는 너무나 방대하여 개인이 정리할 수조차 없고, 책상물림의 좁은 소견으로 담기에 턱없이 웅장한 실크로드의 서사를 끝까지 따라가는 대신, 개인의 실크로드 소사(小史)를 써볼까 한다. 우리 모두 역사서사의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인 까닭에, 역사를 비틀지 않는 범위에서 좀 더 창의적인 소비를 고민할 필요가 있을 테니까.
■ 실크로드- 세계관을 바꾸다
2000년간 지구상 최대의 교역로
비단은 서쪽으로, 면화는 동쪽으로
세계 사람들의 생활을 바꿔놓아
선조들이 먼저 몸을 희생한 덕분에
현대인은 먼 타국의 질병에도 면역
실크로드는 최소한 2000년 동안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교역로였다. 8세기 말 위구르와 당(唐)의 견마(絹馬)무역이 극성했을 때 위구르가 한 해에 10만필의 말을 끌고 왔다고 한다.
말의 가격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비단 40필에 달했다. 초원에서 비단 400만필은 애초에 필요가 없으니 이것들은 거의 북방 실크로드를 따라 서방으로 수출되었을 것이다. 이 막대한 교역량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경제대국 당을 일시 채무불이행 상황에 빠트릴 정도였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물품이 페르시아~인도~로마로 직접 넘어가는 형태와 유목민들이 견마무역이나 중국에서 조공으로 받은 물품을 중계하는 형태로 크게 나눌 수 있고, 길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었고 시기에 따라 중요성이 달라졌지만 크게 천산산맥의 남북로를 통과하여 동서로 이어졌다. 이 길은 장건이 서역과 교통하여 흉노의 우측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출사하고(서기전 139년 첫 출사) 한나라 군대가 파미르 고원 서쪽에 등장하기 훨씬 전에 존재했다.
그보다 최소한 200년 전의 알타이 파리리크 무덤에서는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거울과 함께 초(楚)나라의 비단이 출토되었다. 아름다운 무늬가 놓인 초의 비단을 중계한 이가 아마 유목월지였을 것이다. 대신 알타이의 금기들이 중원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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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타이에 전해진 초나라 비단 서기전 4세기경 파지리크에서 사용한 초나라식 비단. 진(秦)나라가 중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에르미타주박물관 |
이 길은 역사의 깊이만큼 상호적이다. 장건이 출사하기 최소한 4000년 전에 이미 채도(彩陶)가 기술 이동으로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몇 천년 전에 중국의 원시토기 기술이 역시 비슷한 길을 따라 서방으로 갔을지 모른다. 서기전 2000년 무렵에 역시 이 길을 따라 청동 제조 기술이 중원으로 넘어왔고, 다시 1000년이 흐르면 비단을 위시한 중국의 물품이 이 길을 따라 서로 갔다. 중국에 통일제국이 선 후에는 기술과 생산력의 역전현상이 벌어져 동에서 서로 가는 품목이 더 많아진 듯하다. 유리 제작 기술은 서방에서 왔지만 그 기술의 후예인 화약은 동방에서 갔고 제지, 나침반, 인쇄술 등이 모두 서방으로 전해졌다.
인도 측의 기록이 소략하여 아직 전모가 밝혀지지 않지만 목화 생산의 역사를 다 밝힌다면 실크로드의 의미는 훨씬 커질 것이다. 비단이 서쪽 사람들을 따듯하게 했다면 인도에서 씨앗과 함께 들어온 면화(棉花)는 동방 인민의 겨울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안타깝게도 한반도는 이 면화의 길에 뒤늦게 동참한 듯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길에 과감하게 동참하지 못한 결과 인민들이 추웠다. 실크로드를 오간 동식물 목록은 화려하다. 호두를 포함한 각종 견과류, 포도, 사과, 살구, 여러 박 종류 등 식물은 동서의 식탁을 풍부하게 했고, 종마와 낙타는 인간의 노고를 덜어 주었다. 온갖 동식물을 따라 물론 병균도 오갔기에 오늘날 인류는 장거리 여행을 해도 현지의 전염성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모두 실크로드를 오가던 선조들이 몸을 희생하며 얻은 면역력 덕이다.
음악, 회화, 서사 분야를 주제로 책을 쓰면 항목마다 수십권을 쓸 수 있다. 위대한 종교와 사상, 제도의 전파는 동서 세계를 동시에 풍부하게 바꾸어 나갔다. 결국 이 길 덕에 동서남북 세계가 모두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그전에 동은 서쪽 끝에 왕모가 사는 신산이 있나보다 했고, 서는 알타이 산맥 동쪽을 괴수들이 사는 황무지로 생각했다. 물론 이 거대한 교통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한 이들은 바로 유목민이다.
그럼 실크로드는 머나먼 동서남북 열강 이야기에 불과할까? 오히려 그 정반대다. 이 길은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한반도 개개인의 운명을 바꾸었으며, 우리들 또한 그길을 늘리는 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필자의 가족 또한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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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라 불상 서쪽으로 옮겨가 쿠샨왕국을 세운 월지인들이 남긴 간다라불상. |
■ 아버지의 실크로드- 끝나지 않은 길
내 고향은 이육사와 같은 경북 안동이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라는 구절을 두고 중·고교 스승들은 저마다 의견을 보탰다. ‘그 시절 안동에 청포도가 있었는가’부터 의견이 갈렸다. 육사의 추종자로서 언젠가 평전을 쓰겠다고 다짐한 바 있어 관련된 옛 시가를 찾다가 <목은시고(牧隱詩稿)>에서 ‘청포도(水精葡萄)’라는 시를 발견했다.
“한 조각 맑은 얼음과 수정이 엉겨 정교한 물질을 만들었으니 허공처럼 밝구나(一段淸氷與水精, 結成微質似空明)”
청포도와 하늘(空)의 심상을 연결시킨 두 시는 왠지 비슷해 보이지만, 육사 시의 형상화 수준이 훨씬 높고 사상적으로도 웅장하여 둘은 풍격이 다른 시다. 그럼에도 두 시가 비슷해 보이는 까닭은, 목은과 육사가 모두 지극히 이국적인 사물을 통해 현실을 훌쩍 넘고 싶은 열망을 표출했기 때문일 것이다. 육사는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먹으면 두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하고, 목은은 “(포도) 홀로 중화의 맛을 체득한 것이 제일 가엽다(最憐獨得中和味)”고 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청포도’가 없었으면 주류의 눈밖에 난 목은과 일제와 싸우던 육사는 더욱 허기졌을 것이다.
필자는 손바닥만 한 평지도 거의 없는 안동 길안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뒷밭 끄트머리에 늙은 포도나무가 몇 그루 있고, 가을이면 홍옥사과가 빨갛게 익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릴 적 할아버지를 여읜 후 먹는 것이 한이 된 아버지는 결혼 후 집과 밭 주위에 과수를 빼놓지 않고 심었다. 그 덕에 필자는 과자는 못 먹었지만 가을이면 과일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특히 포도 한 송이를 가지면 친구들에게 몇 알씩 나눠줄 수 있는 ‘특권층’이 될 수 있었다. 이 포도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으로 오고 다시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은 대학에 들어간 후에야 알았다.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궁벽한 시골 소년이 가을이면 포도송이를 들고 다녔으니 목은과 육사처럼 필자도 분명 실크로드의 수혜자였다. 그러나 정작 삶을 바꾼 것은 포도가 아니라 사과였다.
길이 끝나는 마을. 외지에서 들어오는 차는 마을 입구 조그만 공터에서 어렵사리 머리를 돌렸다. 열 살이 되기 전부터 지게를 진 아버지는 꼭 과일을 갈망하듯이 길을 숭배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열 몇가구 주민들에게 구릉에 있는 밭으로 연결되는 길을 만들자고 설득했다. 하지만 길이 끊어진 곳의 비탈밭에 의지해 사는 사람들은 부지런했지만 고루했다. 평생 지게에 익숙하고, 자기 땅 몇평이 길에 들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몇몇은 반대했지만, 중론은 아버지 편이었던 듯하다. 아버지는 제일 먼저 땅을 길에 넣었다. 그러나 그때 중장비는 파석기를 단 날렵한 굴삭기가 아니라 둔한 불도저였다. 불도저의 날은 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툭툭 부러졌고, 밤이면 불만을 토로하러 온 사람들 때문에 집 안은 전쟁터였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달래고 어르다가도 그 과격한 성품을 이기지 못하고 호통을 치며 싸우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소위 ‘정치적인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다 바위 구간을 돌파하자 진흙 구간이 나타났고 불도저는 일사천리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마을과 농경지를 잇는 길이 생겼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대과종 사과는
카자흐스탄 천산산맥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
우리가 누리는 실크로드의 과실
먼 옛날 동서 열강 이야기가 아닌
수많은 개인의 분투가 이어진 결과
필자는 작년에 사과에 관한 놀라운 논문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가 먹고 있는 대과종 사과는 카자흐스탄 천산산맥 북록의 야생사과(학명 Malus sieversii)에서 출발해 실크로드를 따라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미·중 공동연구팀은 117종의 방대한 사과 게놈을 연구한 후 2017년 이 결과를 발표했다. 문제의 사과는 푸석푸석했고 맛도 밍밍했지만 크고 아름다웠기에, 실크로드를 오가는 이들이 과육을 먹고 씨를 버리거나 일부러 심으면서 동서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작지만 과육이 단단하고 신맛이 나는 다른 야생사과들과 교배되고, 사람들이 사과의 가치를 알아보고 선별 육종하면서 대를 거듭해 더욱 알이 크고 맛있는 과일이 되었다는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유전학 저널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즈 웹 https://www.nature.com/articles/s41467-017-00336-7 참고). 오늘날 사과는 바나나와 수박과 함께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과일이며, 단위면적당 생산열량이 곡물을 능가하는 경이로운 작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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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비단 생산국 불가리아 소피아의 거대한 뽕나무 아래에 선 필자. 불가리아는 20세기 말까지 유럽에서 1인당 비단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
바로 그 과일이 내 고향 안동의 운명을 바꾼 작물이다. 어릴 적 사과 과수원은 큰 들판에만 있었고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데다 가끔 개가 지키기도 해서 서리할 엄두도 못 냈다. 우리 집의 홍옥은 예뻤지만 큰 들판에 있는 부사사과에 비하면 크기도 초라하고 덜 달았다. 부사사과는 말하자면 카자흐스탄 천산 자락에 서 있던 특출한 나무에서 열린 특출한 열매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고고하고 큰 열매는 산비탈에서는 자라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길을 닦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그 나무를 구해와 비탈밭을 채우기 시작했다. 모두들 산비탈에는 사과가 안된다고 입을 모았지만 ‘지구온난화’로 들판의 사과밭보다 언덕 사과밭의 소출이 좋았다. 그리고 몇해 후 사과나무는 새로 닦은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갔다. 길이 없으면 과수 재배는 어림도 없다. 천하장사라도 사과를 지게에 지고 다닐 수는 없다. 그 결과 우리 동네 구릉은 가을이면 온통 붉게 변한다. 그 덕에 시골 동네는 부촌이 되었다. 정말 실크로드는 각자의 집 앞까지 닿았고, 그 과실을 우리 모두가 먹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이렇게 개인적인 실크로드 소사를 한번 구성한 것은 거대 서사를 독점하여 역사를 국가나 이념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어용학문에 대항하는 한 방식이다. 현재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실크로드 프로젝트(일대일로·一帶一路)가 그렇듯, 서사 독점은 역사의 주체인 개인을 역사에서 소외시킨다. 비록 배우지 못했음에도 실크로드를 조금이나마 늘리고자 분투하고 그 과실을 이웃과 나눴던 아버지·어머니께 이 글을 바친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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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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