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로 건너뛰기
뉴스
서울
맑음 / -3.9 °
조선일보 언론사 이미지

[장석남의 시로 가꾸는 정원] [25] 깊은 우물

조선일보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원문보기
깊은 우물 그 우물은 깊었다. 찬물이 고여 있었다. 우물 안쪽으로 쌓아올린 돌 틈에선 검푸른 이끼가 자라고, 이끼에 서린 물방울이 툭 떨어져 투명한 소리로 울리곤 하였다. 한나절 우물에 귀를 대고 있으면 떨어진 물방울 소리들이 소리끼리 어우러져 한 편의 시로 울리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우물은 우물가에 닭의장풀이며 여뀌, 질경이풀들도 기르면서 자잘하고 여린 꽃들로 박새나 노랑턱멧새들을 불러 지저귀게 하였다. 그 우물은 깊었다. 하늘을 향해 까마득한 바닥까지 열어놓고 있었다.

―이건청 (1942~ )


한솥밥을 먹는 사람을 식구(食口)라 하고 한 우물을 먹는 사람을 일컬어 이웃이라고 했던가요? 우물은 한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근원이었습니다. 한 마을의 개방된 공용 부엌이요, 회관이요, 광장이기도 했습니다.

때로 우물은 가장 심오한 사원이기도 합니다. 이 시는 사원과 같은 고요하고도 찬란한 세계를 우주의 깊이로 얘기해 줍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듣게 되는 우물 속의 물방울 소리야말로 가장 차고 투명한 울림의 시라고 얘기합니다.

‘닭의장풀’ 등속의 풀과 ‘박새’ 등등의 새들까지 불러들이는 우물은 마침내 까마득한 바닥을 열어서 아득한 하늘을 받아들입니다. 이토록 투명하고 깊은 우물과 같은, 우주를 열어놓은 큰 어른을 우리는 지금 알지 못합니다. 만나고 싶습니다.

[장석남 시인·한양여대 교수]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info icon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AI 이슈 트렌드

실시간
  1. 1손흥민 유로파리그 우승
    손흥민 유로파리그 우승
  2. 2이민지 3점슛
    이민지 3점슛
  3. 3제주항공 참사 진상규명
    제주항공 참사 진상규명
  4. 4통일교 로비 의혹
    통일교 로비 의혹
  5. 5한국전력 현대캐피탈 베논
    한국전력 현대캐피탈 베논

조선일보 하이라이트

파워링크

광고
링크등록

당신만의 뉴스 Pick

쇼핑 핫아이템

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