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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당신의 머리, 푹 쉬셨나요

조선일보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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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휴가 갔다 왔는데 심신이 찌뿌드드, 직장인 절반이 '休유증'
휴가마저 남들과 비교하는 한국, 지친 몸과 마음 다독여야 할 시간에 인증샷 열 올리니…
일러스트= 안병현

일러스트= 안병현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휴가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 불과 며칠 전인데 쉬긴 쉬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가물가물. 오히려 온몸이 쑤시고 천근만근 무겁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라 했던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고,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던 휴가 뒤 몰려오는 후유증, '휴(休)유증'이 기승부린다.

의류 브랜드 디자이너 최경희(35)씨는 여름휴가 후 회사 복귀 첫날부터 오후 반차를 냈다. 그녀는 이번 여름휴가 때 엄마와 방학을 맞은 조카들을 데리고 괌 여행을 다녀왔다. "회사 다니느라 가족에게 소홀했던 터라 '가족을 위한 휴가'를 보내겠단 비장한 계획을 세우고 가족 여행을 추진했어요. 가이드에 보호자 역할까지 하느라 정작 저는 제대로 쉴 틈이 없었어요." 여행 내내 타국에서 생길지 모르는 돌발 상황에 긴장해서인지 몸살까지 났다.

많은 휴식 전문가는 ‘비우는 휴가’를 권한다. 사진은 산사에서 명상하며 휴식하는 모습.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많은 휴식 전문가는 ‘비우는 휴가’를 권한다. 사진은 산사에서 명상하며 휴식하는 모습. /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초등학생 자녀를 둔 워킹맘 김민주(44)씨 역시 여름휴가가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 중 하나. 방학 맞은 아이들과 '놀아주느라' 자신만의 휴식 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지난 5월 연휴를 이용해 이른 휴가를 다녀왔지만, 막상 남들 다 노는 여름휴가가 되니 집에만 있기에 아이들에게 미안해 급히 여행 계획을 잡았다. 가까운 일본으로 휴가를 다녀왔다. "여행 짐 챙기는 것부터 다녀와 정리하는 것까지, 일주일 휴가 내내 휴식다운 휴식을 하지 못했어요." 김씨는 "직장인들끼리 우스개로 '회사에 나와서 쉰다'고 하는데 정말 빨리 출근하고 싶더라"라고 털어놨다.

중견기업 홍보 담당자인 김상현(46)씨는 한마디로 "영혼 털린 여름휴가를 보냈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건 의미 있죠. 그런데 집안일 하느라 못 놀았던 아내가 하고 싶었던 걸 일주일 동안 다 하느라 아이돌그룹의 '살인 스케줄'을 경험했어요(웃음)." 그는 "9일의 휴가 기간 중 낮잠 한번 자본 적 없다"고 했다. 아침 일찍 아이들과 조조영화 보는 것을 시작으로, 2박 3일은 폭염 속 캠핑, 주말엔 양가 어르신들 각각 모시고 근교 계곡 맛집 가서 몸보신시켜 드렸다. 휴가 마지막 날까지 빠듯한 일정 속에 '열일'하며 보냈다. "매년 휴가 땐 좀 쉬어야지 굳게 마음먹는데 막상 휴가 시작되면 쉬는 게 아까워지더라고요. 평소 못했던 거 하느라 바삐 다니다가 이번 휴가엔 폭염으로 온열병까지 얻어왔네요."

friday가 지난 8~9일 이틀간 SM C&C의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를 통해 전국 성인 남녀 406명을 대상으로 '여름휴가 후유증'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한 결과 '휴가 때 충분히 쉬었나?'란 질문에 42.1%가 '충분히 쉬지 못했다', 32.3%가 '쉬었으나 쉰 것 같지 않다', 8.1%가 '전혀 쉬지 못했다'고 답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닌' 여름휴가를 보낸 사람들이 82.5%나 됐다. '충분히 쉬었다'고 답한 사람은 17.5%에 그쳤다.

적지 않은 사람이 휴가 전엔 '번 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신체적 정신적 피로 때문에 무기력해지는 현상)'을 경험하고, 여름휴가 후엔 '바캉스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통계도 나왔다.


1년 중 공식적으로 장기 휴식을 가질 수 있는 여름휴가에 우리는 과연 제대로 쉬고 있을까. 근로시간 주 52시간을 실시한 한 달 후 바로 이어진 여름휴가다. 어느 때보다 '휴식 권하는 사회'속 과연 당신의 휴가는 안녕하신지?

여름휴가 후 남은 건 새까맣게 그은 피부만이 아니다. 수면 부족, 여행 등으로 쌓인 육체 피로뿐 아니라 정신적 스트레스도 휴가 전과 별반 차이가 없다. 휴가 후 더 심해졌다고 느끼는 이도 상당수다. 올여름엔 기록적인 폭염까지 더해져 온전한 휴식을 방해받았다.

여름휴가 대신 흔히 쓰는 바캉스(vacance)의 어원인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비우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늘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채우기보다 비우는 시간인 바캉스의 현주소는 어떨까.


디지털 기기를 내려두고 숲 체험하며 자연과 대면하는 사람들. / 김영근 기자

디지털 기기를 내려두고 숲 체험하며 자연과 대면하는 사람들. / 김영근 기자


혼자 쉴 수 있는 휴식 시간 부족

friday가 실시한 '여름휴가 후유증' 설문 조사에서 '여름휴가를 어떻게 보냈는지'란 질문에 '휴식 위주'라고 답한 사람은 전체 406명 중 37.9%였다. 33.7%가 '관광·여행', 17.5% '집 안 정리·건강 체크 등 평소 밀린 숙제 해결', 8.9%가 '취미 활동', 2%가 '기타'라고 답했다. '충분히 쉬지 못한 이유'로는 '가족과 지내다 보니 혼자만의 휴식 시간이 부족해서'라고 답한 사람이 26%로 가장 많았다.

보험설계사 이성규(40·가명)씨는 평소 업무 특성상 대인관계에 피로도가 높은 편이다. "휴가 땐 좀 편히 쉬고 싶었지만 소파에 누워 있으면 아내 눈치 보이고, 아이들도 나만 기다리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결국 가족 모두 잠든 후에나 혼자만의 시간이 생기니 잠드는 게 아쉬워 자꾸 취침 시간이 늦어지고 휴가 내내 수면 부족에 시달리게 됐다"고 털어놨다.

대가족 여행이나 동반 여행에서 휴식은 뒤로 밀린다. 지난 여름휴가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강원도 양양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이은정(38·가명)씨는 "여름휴가가 '명절' 같았다"고 얘기했다. 맞벌이 부부인 이씨에게 네 살배기 아들을 돌봐주시는 시어머니는 늘 고마운 존재지만 '어른'을 모시고 휴가를 떠나니 숙소, 식사, 코스 등을 모두 시어머니 위주로 맞춰야 했다. "직장인들에게 여름휴가는 '일상 탈출구' 같은 시간이고 일탈해 볼 기회인데 '시어머님 코스'에 이렇다 할 일탈은 없었죠."


여름휴가 후 동반 여행 등으로 가족 불화가 생긴 경우도 적지 않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휴가 때 가족 간 다툼이나 불화가 생겨 상담하러 오는 사례도 많다"며 "짜증이 늘어나는 더운 날씨에 여럿이 함께 보내는 여름휴가는 자칫 정신을 지치게 할 수 있다"고 했다.


휴가 발목 잡는 일

'마무리 못한 일이나 휴가 후 해야 할 일에 대한 부담감'(22.4%), '휴가 중 업무의 연속'(11.3%)도 충분히 못 쉬는 원인으로 꼽혔다. 휴가와 일의 분리가 어렵다고 느꼈다는 얘기다.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후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로 일과 삶의 균형)'이 강조되면서 휴식을 권하는 사회적 분위기는 조성되고 있지만, 일과 휴식의 방식에 있어선 큰 차이를 못 느끼겠다는 게 직장인들의 공통 의견이다.

PR매니저인 이나래(34)씨는 휴가지였던 제주 바닷가에서도 클라이언트로부터 '카톡'을 받아야 했다. 이씨는 "몸은 휴양지에 있으나 머리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연차를 쓴 게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했다. 카톡만 보고 있다 남편과도 다퉜다.

업무 분담이 확실한 직업이나 성과제가 있는 직업의 경우 길게 쉬는 여름휴가가 더 부담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대형 온라인 쇼핑몰 관리직인 이경선(37)씨도 "여름휴가를 앞두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며칠 밤샘하다시피 야근을 하고 번 아웃 상태에서 여름휴가에 들어갔지만 노트북을 짊어지고 다니며 고객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 홈페이지 관리 등을 지속적으로 해야 했다"고 했다. "남들 놀 때 놀지 못한다는 생각에 더 스트레스받고 피로가 쌓이는 것 같아요." 혼자 쉴 시간이 부족하고 일과의 분리가 쉽지 않은 휴가는 역효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여름휴가 후유증' 설문 중 '휴가 후 컨디션 상태' 결과도 눈여겨볼 만하다. '휴가 전과 별 차이가 없는 상태'가 49.5%였고, '휴가 전보다 피로가 더욱 누적된 상태'라고 답한 사람이 33.3%였다. '충분히 쉬어 컨디션이 좋다'고 답한 사람은 17.2%에 불과했다.

SNS 휴가 인증… 휴가가 괴로워

편집디자이너 이은영(28·가명)씨는 여름휴가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집 밖에서 지냈다. 이미 지난 7월 초 이른 여름휴가를 다녀왔던 이씨는 휴가객이 몰리는 7말 8초(7월 말~8월 초)엔 '방콕'(집에서 보내는 것)하기로 했다. 문제는 소셜미디어였다. "그냥 집에서 푹 쉬려고 계획했다가도 지인들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에 올라온 여름휴가지 사진을 보다 보면 '지금 아니면 언제 놀겠나' 싶어 또다시 몸을 일으킨 날도 있었죠." 매일 지인들과 어울려 최선을 다해 놀았다는 이씨는 "덕분에 체력은 바닥났고 계획에 없던 추가 지출로 카드 빚만 늘었다"고 푸념했다.

반면 확실히 인터넷을 차단하고 휴식 그 자체에 집중한 경우 휴가 만족도가 높았다. 광고기획자인 강은영(45)씨 가족은 여름휴가를 3박 4일간 무선인터넷도 되지 않는 강원도 평창의 한 숙소에서 보냈다. TV와 컴퓨터 대신 오디오와 몇 권의 책만 있는 숙소였다. "휴가 전 가족이 모여 보고 싶은 책을 주문해 가지고 갔어요. 휴대전화도 잘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니 아이들이 불만이 많았지만, 덕분에 대화도 많이 나누고 근처 숲속에서 빈둥거리거나 멍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혼쉼(혼자 쉼)' '뇌 휴식' 주목

쉼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알면서도 '집 떠나서 고생' 하기 일쑤다. 평소 가보지 못했던 곳으로 가고, 해보지 못했던 경험·체험·여가 활동으로 채우게 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많은 직장인이 여름휴가 후 쉰 것 같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휴식 시간의 부재(不在)보다 "쉬는 방법을 몰라서" "쉬는 방법이 잘못돼서"라고 입을 모았다.

'휴식을 처방하는 의사' 이시형 박사는 "휴식이라면 몸의 피로만 생각하고 쉬고, 자고, 스파를 받는 등 몸의 이완을 하는 노력에만 집중하는데 이런 것들은 몸의 피로를 푸는 데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뇌의 피로는 남아 있기 때문에 쉬어도 피곤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도시인들의 피로는 몸이 아니라 뇌가 피로한 것"이라는 게 이 박사의 얘기다.

'휴식 수업'을 펴낸 '섬마을 젊은 한의사' 김찬씨는 "휴식이 지나치게 수동적인 형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대인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외부의 물질적인 것이나 서비스가 치유해줄 것이라고 기대한다"며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명상의 기회가 사라질수록 휴식에 대한 로망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했다.

"아직 경쟁 위주인 발전국가의 정서가 사회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제적인 풍요로움이 최상의 가치라 여기는 사회에선 쉬는 것에서도 남보다 앞서려는 욕구가 강하다"며 "최근엔 소셜미디어로 휴가의 면면이 공유되는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쉬는 것마저도 비교의 대상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유럽문화탐사'의 저자인 재영(在英) 칼럼니스트 권석하씨는 "한국의 휴가문화는 일상, 일과의 완벽한 분리가 되지 않는 게 문제"라며 "영국인들의 경우 메신저나 소셜미디어에 휴가 기간을 써놓고 그 기간만큼은 방해받지 않고 완벽한 휴식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독일의 명상가이자 경영컨설턴트인 니콜레 슈테른은 휴식에 대한 저서 '혼자 쉬고 싶다'에서 "우리는 일하기 위해 쉬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쉬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혼쉼(혼자 쉬는 것)'을 강조했다. 휴식 권하는 시대, 온전한 휴식을 사수하는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

[박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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