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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개고생…동티모르 독립여행] 2편-신성한 산과 섬 걷고 오르고 유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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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행군의 연속이다. 가만히 앉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데도 동티모르에선 체력을 요한다.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엉덩이가 의자에 붙을 새가 없다. 신성함이 깃든 동티모르의 산과 섬, 아타우루섬과 마우비세, 자코섬까지.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성한 여행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섬으로 가는 길

또다시 이동경로가 바뀌었다. 마우비세(Maubisse)행을 뒤로 미루고, 아타우루섬(Atauro Island)으로 행선지를 변경했다. 딜리항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 9시, 단 한 차례 아타우루행 배가 운항한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사실 아타우루행 선박 운항에서는 세 가지 옵션이 여행자에게 주어진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나크로마 페리(Nakroma Ferry)를 타는 것, 다른 하나는 매주 목요일부터 월요일까지 하루에 한번 드래곤 스타 선박회사(Dragon Star Shipping)에서 운항하는 쾌속선 패스트 페리(Fast Ferry)를 타는 것, 마지막 하나는 요일이나 시간에 상관없이 선장을 포함한 개인용 배를 빌려 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현지인들은 첫 번째 옵션에, 여행자들은 두 번째 옵션에 몰린다. 토요일 오전 나크로마 페리를 타고 섬에 들어가 이틀 밤을 보낸 뒤 월요일 오후 패스트 페리를 타고 딜리로 돌아오는 일정을 세웠다. 두 가지 옵션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완벽한 계획이다.

그러나 계획은 또 다시 변경되었다. ‘일찍 서두르면 당일에도 표를 구할 수 있다’는 호스텔 직원의 말과 달리, 딜리항 입구에 도착하자 출입문 주변을 에워싼 인파가 여행자를 먼저 반겼다. 나크로마 페리 티켓이 이미 동이 났다는 선박회사 관계자의 말에도 인파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수는 더 늘어났다. 상황을 보아하니 인파에 섞여 무턱대고 기다려봤자 닫힌 출입문을 여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저만치 ‘드래곤, 드래곤’을 외치는 목소리에서 구원을 기대하는 게 어쩌면 현명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여행자의 손에 두 번째 옵션카드가 쥐어졌다. 나크로마 페리보다 티켓 가격이 2배가 넘는 패스트 페리는 정시 출항과 입항, 1시간만에 주파하는 빠른 속도를 자랑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막바지 탑승을 마친 몇몇 현지인들까지 모두 착석하자 배는 드디어 돛을 올렸다. 얼마 안가 요란한 엔진소리가 고요한 동티모르의 바다를 가로지른다. 바쁠 것 하나 없는 이 푸른 바다를 배는 서둘러 지나친다. 최신식은 늘 그렇듯 쉼이 없다.

아타우루항 선착장

아타우루항 선착장


▶동티모르의 보물섬, 아타우루섬

아타우루섬은 동티모르 수도 딜리에서 북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타원형 모양의 이 섬은 면적 105㎢로 길이 25㎞, 넓이 9㎞의 작은 섬이다. 거친 산악지역과 매우 좁은 해안 평원으로 이뤄져 있으며, 해발 999m의 가장 높은 산인 마누코코(Manucoco)가 섬의 남동쪽에 자리한다. 아타우루섬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른 초원과 유칼립투스 대초원, 산봉우리와 계곡의 반 열대 산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풍경과 식물이 산재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 섬은 세계 최고의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 세계에서 중요한 어류 번식지로 손꼽힌다.


크고 작은 언덕, 자갈이 촘촘히 박힌 비포장도로와 연결된 작은 마을에는 주로 어부와 농부로 생계를 꾸려 살아가는 주민들이 살고 있다. 섬의 인구는 약 만 명이다. 섬의 주요 마을로는 동쪽 해안을 따라 자리한 마키리(Makili)와 빌라(Vila), 벨로이(Beloi), 비켈리-팔라(Bikeli-Pala)가 있으며, 남쪽 해안에는 베라우(Berau), 서쪽 해안에는 아다라(Adara)가 대표적이다. 주변 도시와 섬을 잇는 아타우루항은 동쪽 해안 중간지점 벨로이 마을에 위치한다.

섬에 가까워지자 배는 항구 선착장을 불과 몇 미터 앞두고 멈춰 섰다. 선착장에 돛을 내릴 수 없어 소형 배로 선착장까지 승객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다. 선박의 이층 데크에서 소형 배를 기다리는 동안 승객들은 푸른 낙원에 정신이 팔려 좀체 입을 다물 줄 모른다. 맑고 투명한 바다는 눈 깜짝할 새 여행자의 두 눈에 그 속을 훤히 들키고 만다. 살이 타 들어갈 듯한 강렬한 햇빛도 이 영롱한 바다 앞에선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참 넋을 잃고서야 선크림을 바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그것 또한 별것 아닌 사실이다.


▶외딴섬에도 웃음꽃이 핀다


최근 들어 아타우루섬은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주무대가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이 섬의 역할은 푸른 빛의 바다와는 사뭇 달랐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 아타우루섬은 본 섬과 지리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이유로 범죄자들과 정치범들을 수용하는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인도네시아 점령 기간에는 본 섬에서 추방된 저항 운동 지지자들과 그 가족들이 터를 닦고 살아왔다. 그러나 대다수의 추방자가 끝내 귀향하지 못하고 섬에서 사망하거나 생을 마감해야 했다. 독립 이후 새로운 환경을 가꾸고 적응하는 데에는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령 숭배의 신념이 섬 주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Adade’, ‘Humungili’, ‘Manroni’의 3개 씨족으로 구성된 주민들은 각각의 방언과 노래, 음악, 춤이 있다.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유입된 로마 카톨릭교는 섬의 토속 신앙과 한데 어우러져 섬 고유의 문화유산으로 자리잡았다. 각 마을마다 세워진 교회는 종교적 역할뿐 아니라 커뮤니티로서의 구실을 한다. 매주 토요일 아타우루항 인근에서 열리는 토요 장터는 이 섬의 가장 큰 사교적 행사다.

호텔에서 장터까지는 약 500m 거리. 10분도 채 안 되는 이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옷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이방인의 입장에선 어떻게도 표현이 안 되는 이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 아이들은 삼삼오오 고무줄 놀이를 하고, 공차기를 하고, 외국인을 쳐다보며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낸다. 장터에 좌판을 깐 어른들은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수다를 떨고, 한바탕 왁자지껄 이야기 꽃을 피운다. 더위는 이방인에게만 특별하다. 여행자의 머릿속에는 도무지 더위를 이길 방법이 없다. 엄마 따라 장터에 온 소녀는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아타우루항까지 3시간을 족히 걸어 왔다고 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낡아빠진 슬리퍼를 신고 크고 작은 언덕을 넘고 넘어 자갈밭을 걸어온 소녀는 장이 끝나면 다시 또 그 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소녀의 담담한 어조에서 이방인에게만 특별했던 무더위는 더는 사라지고 없다.

맑고 영롱한 바다를 유영하는 소년

맑고 영롱한 바다를 유영하는 소년


▶산과 바다와 생각의 섬


간밤에 쥐떼가 나타났다. 호텔 방 천장 위를 날쌔게 달음박질하던 쥐떼가 방 안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테이블에 놓인 비닐봉지와 한참을 부스럭거리며 씨름하던 이들의 흔적은 아침이 되어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봉지에 싸인 비스킷이 이들의 표적이었고, 비스킷 겉 포장지 한쪽에 미세한 구멍이 여럿 나 있었다. 그러나 비스킷은 안전했다. 목표물 획득에 실패한 이들은 오늘밤 또 부산한 움직임을 보일 것이 분명하다.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더욱이 ‘새로운 생태관광지(New Eco-tourism Destination)’라 불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섬에서, 찬란한 아침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면 말이다.

오전에는 할 일이 많다. 한낮의 불볕 더위가 찾아오기 전까지 유유히 해변산책에 시간을 내어주고, 바닷물에 몸을 맡겨 물속 세상 관찰에 힘을 써야 한다. 더 화려하고 신비한 세상을 원하는 여행자들은 하나둘 배에 몸을 실어 깊고 깊은 고요한 바다로 향한다. 섬에 위치한 대부분의 리조트나 호텔에서는 스노클링과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대여해주거나 투어상품을 운영한다. 암초나 고래상어와 함께 있는 참치, 고등어 같은 수생 물고기 종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고, 만타 가오리와 거북이, 운이 좋다면 인어의 기원으로 알려진 듀공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섬에는 교통수단이랄 게 딱히 없다. 오토바이를 소형 트럭처럼 개조해 만든 ‘툭툭(Tuk Tuk)’이 있지만 평지만 오갈 뿐 숱한 언덕을 넘나드는 역할은 하지 못한다. 섬 곳곳을 둘러보기 위한 가장 현명한 선택은 두 다리에 의존하는 것.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경로를 따라 몇 가지 트레킹 코스가 갖춰져 있다. 해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부터 다목적 마을과 산악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데, 가장 인기가 좋고 보편적으로 알려진 코스는 섬의 중부를 가로지르는 벨로이(Beloi) 마을에서 아다라(Adara) 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총 8.7㎞의 이 트레킹 코스에는 동굴과 교회, 여러 개의 전망포인트, 강 골짜기와 샘물 등의 유려한 자연풍경이 여행자를 기다린다. 로컬가이드에 대한 정보나 단체 트레킹 투어상품 정보는 이 섬의 오랜 터줏대감인 배리스 플레이스(Barry’s Place)에서 확인 가능하다. 단,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가 종이 위에 손 글씨로 간단하게 코스를 그려 넣은 약도 한 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명심할 것.

마우비세 Maubisse

▶트럭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드디어 버스라 불리는 ‘그 트럭’을 탄다. 딜리의 하나뿐인 시외버스정류장 티베시(Tibesi)에서 마우비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2톤짜리 트럭 짐칸 양쪽 가장자리, 얇고 긴 나무판자를 고정시켜 만든 좌석에 승객들이 나란히 앉았다. 폭 좁은 딱딱한 나무판자는 엉덩이 전체를 감싸기엔 역부족이다. 걸터앉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승객을 다 앉히기에도 나무판자의 역량은 부족해 보인다. 반쯤은 선 채로 덜커덩거리는 도로 위를 달린다. 나름의 안전장치라고 해봤자 여러 개의 철봉을 연결해 등받이와 손잡이를 마련해 놓은 것이 전부다.

딜리 주변을 완전히 벗어나 버스가 꼬불꼬불한 비포장도로를 오르고 또 오르는 동안 나무판자와 엉덩이의 마찰음은 더욱 커져갔고, 네 발 꽁꽁 묶여 좌석 밑에 갇힌 어린 송아지의 비명에 어느 누구 하나 동요하는 이가 없다. 출발 직후 닭을 품에 안고 잠이 든 한 로컬 주민은 도로사정이 여러 번 바뀌어도 여전히 꿈나라를 여행 중이다. 그와 함께 꿈쩍도 하지 않던 닭은 목적지에 다다르자 주인을 따라 감았던 눈을 뜨고 움직임을 보였다. 딜리에서 마우비세까지 70㎞, 이 완벽한 비포장도로는 4시간을 넘기고서야 막을 내렸다.

마우비세 시장 앞에 버스는 멈춰 섰다. 역시 어디를 가나 마을의 중심은 시장이다. 이곳에 닿기 직전 아일레우(Aileu) 마을에서 버스에 올랐던 리노(Ryno) 일행과 인사를 나눴다. 가방에 국기를 꽂고 기타를 들고 집을 나선 이들의 목적지는 해발 2986m 동티모르에서 가장 높은 산, 라멜라우(Ramelau)다. 산 주변 마을인 하토 불리코(Hato Builico)까지 15㎞를 걸어간 다음 거기서부터 산길을 따라 산 정상까지 가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다. 저녁 내내 걷다 숲 속 어딘가에 짐을 풀고 음악연주를 하고 눈을 붙인 뒤 해가 뜨기 전 정상에 올라 일출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들의 여정은 마무리가 될 것이었다. 아쉬워서 어찌하나 그들의 발걸음에 동참하지 못한 이 아쉬운 마음을 어찌 달래야 할까.

저 멀리 보이는 라멜라우산

저 멀리 보이는 라멜라우산


▶가장 높은 은혜로운 산이시여

마우비세는 해발 1400m의 울퉁불퉁한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동티모르 중부의 작은 마을이다. 올드 힐 타운(Old Hill Town)이라 불리는 이곳은 해안의 더위와 습도로부터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선선한 날씨가 특징이다. 35도를 웃돌던 딜리의 날씨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점퍼를 챙겨 입어야 하는 가을의 기온이 마을을 감싼다. 리노 일행이 향한 라멜라우산은 현지 언어로 타타마일라우(Tatamailau)라고도 칭하는데, 이는 ‘모두의 할아버지’라는 의미를 갖는다. 산 정상에는 1997년 인도네시아 점령 당시 설계된 3m 높이의 성모 마리아 동상이 세워져 있고,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산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특히 라멜라우산은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임신한 3월25일을 기념해 매년 많은 인파가 산 정상에 올라 축복받은 성모 마리아를 찾는 대표적인 성지순례장소다.

마우비세 여행을 마치고 며칠 후 리노 일행이 라멜라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몇 장 보내주었는데, 흐릿하고 희뿌연 풍경 너머로 보이는 산의 기운이 영 체감이 되지 않았다(그가 찍은 사진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사실 라멜라우산은 일출을 위한 장소이면서, 한편으론 일출을 기대할 만한 장소는 아니다. 시기에 상관없이 짙은 안개로 뒤덮인 날씨의 영향으로 밝고 선명한 하늘의 기운을 느끼기란 쉽지 않기 때문. 여행자 입장에선 아름다운 일출을 기대하겠지만 그보다 종교 및 문화적으로 신성시하는 산의 의미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일출을 보려면 적어도 새벽 2~3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동티모르의 건기 시즌인 5월에서 9월 사이가 공식적으로는 산에 오르기 적당한 시기다.


▶산골마을 언덕 꼭대기에서

라멜라우를 대신할 장소에 문제가 생겼다. 짧은 일정과 이동 동선을 고려해 산 정상에서의 일출 대신 마우비세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파우사다(Pousada) 호텔에 묵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서는 ‘리노베이션’이란 단어가 연거푸 반복됐다. 현재 호텔의 문은 닫혀져 있고 두어 달 개보수가 진행된다는 얘기였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대의 오래된 석조 벽으로 단장을 한 이 호텔은 마우비세의 큰 자랑거리 중 하나다. 오히려 이 호텔에 머물기 위해 마우비세를 찾는 여행자가 더 많을 정도다. 호텔 건물을 아우르는 널따란 정원에서 맞이하는 일출이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너 개밖에 되지 않는 이 마을의 숙박시설 중 교회 앞 이층집을 택했다.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외관과는 달리 오랫동안 사람의 흔적이 없었는지 내부는 귀곡산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다. 별이 촘촘히 밝힌 하늘과 마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이층 발코니라도 없었다면 산골마을에서의 기나긴 밤은 그 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음날 서둘러 언덕 꼭대기로 향했다. 파우사다 호텔이 자리한 언덕 꼭대기에서 일출을 사수했다. 짙은 구름과 자욱한 안개로 일출은 시시했지만 코끝을 차갑게 간질이는 새벽녘의 공기에서 제법 위로를 얻었다. 시장을 시작으로 경찰서, 공동묘지, 벼룩시장, 간이상점, 시멘트로 꾸며진 축구장을 차례로 지나쳐 동네 한 바퀴 산책을 마쳤다. 트럭 버스를 타고 비포장도로를 달려 다시 딜리로 돌아갈 시간이다. 동티모르에서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교통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딜리로 돌아온 뒤 다시 이동을 해야 한다. 여행은 다시 원점으로, 딜리로 향한다.

자코섬 Jaco Island

자코섬의 맑은 바다 ©Chris O’Neill, 자코섬의 첫 풍경 ©Chris O’Neill

자코섬의 맑은 바다 ©Chris O’Neill, 자코섬의 첫 풍경 ©Chris O’Neill


동티모르 동쪽의 맨 끝, 최동단에 아주 작은 섬이 있다. 지도를 크게 확대해 들여다 봐야만 찾을 수 있는 이 섬의 이름은 자코(Jaco Island). 면적 11㎢, 높이 약 100m로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다. 석회암으로 이뤄진 자코섬은 석회암 절벽과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으며, 다양한 야생동물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더 매력적인 이 섬은 동티모르를 찾는 여행자라면 누구나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일정상 포기해야 했던 자코섬 여행은 최근 이곳을 다녀온 여행자 크리스(Chris O’Neill)의 이야기로 대신한다. 그와의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Mini Interview


▷딜리에서 자코섬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는 게 사실인가?

두 가지 옵션이 있었다. 버스를 타거나 자동차 혹은 오토바이를 빌려 타거나. 생각할 것도 없이 전자를 택했지만 버스를 타고 얼마 안 가 바로 후회했다.

▷버스로 한번에 이동 가능한 거리는 아니다.

딜리에서 동쪽으로 250㎞ 떨어진 로스팔로스(Lospalos)까지 가는 버스탑승이 여정의 시작이었다. 버스 픽업이 새벽 2시30분에 이뤄졌다. 버스안내원 같아 보이는 남성은 로스팔로스까지 6~7시간 소요될 거라고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이후 버스는 2시간 가까이 딜리 전역을 돌며 승객을 태웠다. 좌석을 채운 건 사람뿐 아니라 여러 마리의 닭과 송아지, 새끼염소도 함께였다.

▷로스팔로스까지 얼마나 이동했나?

버스안내원에게 ‘몇 시간 걸리냐’는 내 질문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최악의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동안 동티모르는 거리상, 시간상의 예상이 전혀 들어맞지 않는 나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총 13시간이 걸렸다. 인생에 한번은 해볼만한 경험이었다.

▷다음 행선지는 어디였나?

우선 걸었다. 버스로부터의 해방을 자축하며 자유를 느끼며 걸었다. 5분 정도 지났을 때 투투알라(Tutuala)까지 간다는 트럭운전사를 만났다. 투투알라는 자코섬과 가장 인접한 마을로, 섬에 가려면 무조건 투투알라를 거쳐야 한다. 운전사는 하교한 학생들을 태워 그들 각자의 집에 데려다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동행을 허락했다.

▷뜻밖의 인연은 언제나 길 위에서 만난다.

하지만 ‘길 위에서’라는 말에는 꼭 좋은 인연만 만나리란 보장은 없다.

▷트럭운전사가 나쁜 인연이었나?

결과적으론 ‘아주 좋은 인연’이었지만 그걸 알기까지 꽤 진땀을 흘려야 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학생들이 모두 하차한 후 운전사는 낡고 오래된 집 앞에 차를 세웠는데, 그가 사는 집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가 들고 온 봉투에는 빵과 음료수 그리고 한 자루의 총이 담겨 있었다. 총을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복잡했다. 투투알라까지는 1시간을 더 달려야 하는데, ‘총의 표적이 내가 되면 어쩌나’하는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하필 그는 내 바로 뒤에 총을 세워놓았고 총의 과녁은 나를 직접적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트럭이 세게 흔들릴 때마다 들썩거리는 총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이러다 방전될 것만 같았다.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총의 위치와 과녁의 방향을 반대로 돌렸다.

▷총의 용도가 점점 궁금해진다.

용기를 내어 운전사에게 물었다. 서로의 언어는 달랐지만 손짓발짓은 효과적이었다. 그는 야생동물이나 위험인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총을 소지한다고 했다. 독립국이 되었지만 오랜 침략과 전쟁의 역사로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살아간다고 했다. 총은 그것을 대표하는 수단이다.

▷더디긴 해도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겠나. 자코섬에 가는 더딘 여정처럼.

투투알라에서 발루비치(Valu Bea ch)까지 마지막 여정만 남아 있었다. 발루비치는 자코섬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는 곳이다. 한데 발루비치까지는 8㎞ 거리. 험난한 산악지대에다 35도를 웃도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지만 선택은 하나뿐, 걷기 시작했다. 한 1㎞쯤 걸었을 때 뒤에서 차량소리가 들려왔고 그 차를 잡아탔다. 운전사는 나를 발루비치에 내려준 뒤 투투알라로 돌아갔다. 일부러 나를 태워주기 위해 온 거였다.

▷참 고마운 인연이다.

인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발루비치에 도착하자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곳의 하나뿐인 호텔은 문이 닫혀 있었다. 인적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사막 같았다. 한 시간 정도 해변을 걷다 다시 호텔로 향했는데, 그때 바다에서 돌아오는 배 한 척을 발견했다. 5명의 어부를 보자 이제야 사람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낯선 외국인이 그들에게도 신기하고 반가운 모양이었다. 흔쾌히 그들은 자신의 저녁식사에 초대해줬고, 그들의 침실 한 켠을 내어주기까지 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밤은 없었다.

▷자코섬의 첫인상은 어땠나?

‘더 없는 행복’이 그 섬에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맑고 투명한 바다만으로 자코섬의 가치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나는 완벽히 혼자였고 고립된 존재였다.

▷섬에서 뭘 했나?

야생동물과 열대과일을 찾아 나섰고, 크리스털 바닷물을 가로질러 수영을 즐겼다. 백사장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땅을 판 뒤 보물을 그 안에 묻었다. 누군가 내 보물을 찾는다면 좋겠다. 섬의 낮과 밤 모두 경험하고 싶었으나 동티모르에서 신성시 여기는 섬이다 보니 야영과 취사가 금지되어 있어 한나절 여행으로 만족해야 했다.

▷아쉬움이 컸겠다.

‘얼마만큼 여행을 하느냐’가 중요하진 않다. 자코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오길 잘했다, 긴 시간 걸려 온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얘기인데, 섬에 있는 동안 오감으로 전해지는 공기가 확실히 달랐다. 공기 안에 신성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느낌만으로 충분하다.

[글과 사진 추효정(프리랜서 여행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613호 (18.01.23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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