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법칙-18]
수치 데이터를 통해 존재하는 게임 캐릭터
하나의 플레이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라고 한다면 역시 캐릭터일 것이다. 플레이어 자신이, 때로는 플레이어의 동료 혹은 적으로서 게임 속의 캐릭터는 이야기가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완성되는 게임의 형식상 가장 중요한 요소다.
소설이나 영화 등 단방향 서사를 다루는 다른 매체에서도 물론 캐릭터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준비된 이야기에 서 있는 이들과 게임처럼 무엇이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캐릭터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게임의 영역에 와서는 이야기가 없어도 캐릭터만 있으면 된다는 표현도 아주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수치 데이터를 통해 존재하는 게임 캐릭터
하나의 플레이를 구성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라고 한다면 역시 캐릭터일 것이다. 플레이어 자신이, 때로는 플레이어의 동료 혹은 적으로서 게임 속의 캐릭터는 이야기가 플레이어의 개입을 통해 완성되는 게임의 형식상 가장 중요한 요소다.
소설이나 영화 등 단방향 서사를 다루는 다른 매체에서도 물론 캐릭터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미 준비된 이야기에 서 있는 이들과 게임처럼 무엇이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캐릭터는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좀 더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게임의 영역에 와서는 이야기가 없어도 캐릭터만 있으면 된다는 표현도 아주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도가 높은 게임 속의 캐릭터는 단지 중요도의 차이 이상으로 타 매체 속의 캐릭터와 차별화되는 부분을 하나 더 가지고 있다. 이는 좀 더 존재론적 기반에 관한 이야기인데, 바로 게임 속 캐릭터의 존재는 수치 데이터로 구현된다는 점이다.
소설 등의 이야기 속에 머물던 캐릭터는 게임이라는 형식의 지반에 발을 디디기 위해 수치화를 필요로 한다. 소설 '삼국지' 속의 관우는 충의의 화신, 청룡언월도, 만인지적, 긴 수염과 붉은 얼굴 같은 콘셉트를 가지고 있는데 영상매체 등에서 이러한 생각 속의 개념들이 시각이미지로 구체화되고 서사를 통해 자리 잡았다면 게임 속에서는 '무력 97, 통솔 96, 지력 73'(삼국지 13 기준)이라는 수치화를 통해 캐릭터로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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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3"의 관우 캐릭터. 타 매체와 가장 크게 차이나는 게임 캐릭터의 특성은 수치화된 데이터로 캐릭터가 표현된다는 점이다. |
플레이는 이야기가 아니며,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캐릭터와 오브젝트들의 상호작용이 발생해야 한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을 만드는 기계인 컴퓨터는 이름 그대로 '계산기'의 원리로부터 시작되었고, 계산기를 통해 구체화되는 게임 속 캐릭터는 수치화라는 과정을 건너뛸 수 없다.
계산기계로서 컴퓨터의 원리는 수학적이며, 수치화된 데이터로부터 출발한다. 비교나 전투가 없는 어드벤처 게임 캐릭터들도 플레이 진행 상황, 과거 이벤트의 결과 여부, 캐릭터의 위치 등은 모두 수치화된 데이터로 표현된다. 진행 상태를 저장하는 '세이브' 기능이 현재 캐릭터의 상태를 수치 데이터로 저장한다는 사실은 게임 캐릭터의 존재가 수치를 근간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사례다.
그러나 캐릭터는 수치가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수치화된 게임 캐릭터라는 개념은 사실 존재의 양식 중 하나일 따름이다. 게임 캐릭터의 원형이 되는 개념으로서의 캐릭터는 그 이전에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삼국지의 관우를 다시 예로 들어 보자. 원형이 되는 역사 속 인물이 있었고, 그에 살을 덧붙인 이야기로 소설이 탄생했다. 문자 텍스트 속에서 관념으로 표현되던 아이콘들(충의, 청룡언월도, 적토마 등)은 영상매체에 이르러 시각이미지로 거듭났고, 게임에 와서는 수치화된 데이터로 타 오브젝트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형태를 갖추었다. 이 각각의 캐릭터 존재 양식들은 상호배타적이지 않으며, 후속 매체는 앞선 매체의 양식에 새 방식을 덧대어 만들어져 왔다.
따라서 게임 캐릭터의 존재 양식은 수치화된 데이터이지만, 그 데이터만이 특정 캐릭터의 전부는 아니다. 데이터라는 가상세계의 물리적(이라는 말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기반하에 형성된 게임 캐릭터는 플레이어가 가진 관념과 문화 체계 속에서 비로소 인식되며 캐릭터로 완성된다. 미토콘드리아 세포 호흡을 한다는 것이 인간의 기본 조건은 되지만 그것으로 인간을 호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중적으로 유행하는 게임 장르인 모바일 네트워크 롤플레잉 게임의 원형 격인 TRPG(테이블 롤 플레잉 게임. 컴퓨터 없이 카드와 주사위, 메모지 등으로 테이블에 모여 플레이하는 게임)를 돌이켜 보자. TRPG에서도 캐릭터는 수치로 구현된다. 각각의 캐릭터는 자신을 표현하는 레벨과 스탯 값을 가지며, 어디론가 떠난 모험에서 적과 조우하게 되면 바로 그 수치값과 주사위를 사용해 공식대로 전투를 벌이고 결과를 받는다. 그러나 TRPG에서 게임 캐릭터는 수치가 전부였는가?
TRPG는 대화가 중요한 게임이었다.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서 풀어가는 플레이어들의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가 형성되었다. 수치화된 스탯은 그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한 일종의 세계관적 보조재로 활용되었다. 이는 TRPG가 컴퓨터 게임 안으로 들어온 뒤에도 계속 이어져 온 부분이었다.
단지 전투 시스템과 상점, 마을 지도만 구현되었다고 해서 이를 롤플레잉 게임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네트워크 기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게임 프로그램 내에 설계된 NPC(non-player character, 플레이어가 조종하지 않는 게임 속의 캐릭터로 상점 주인, 적 몬스터, 동료 등을 가리킨다)를 통해 플레이를 만들어냈고, 이는 네트워크 시대에 접어들면서 게임에 참여한 각 플레이어들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플레이와 이야기가 만들어지면서 롤플레잉 게임이 되었다.
비수치적 속성이 사라진 캐릭터의 게임: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를 넘어서
그런데 모바일 네트워크 기반의 롤플레잉 게임들이 최근 여러 광고를 통해 강조하는 부분은 묘하게도 캐릭터의 근본적인 존재를 가리키기보다는 수치적 측면이다. "가입만 하면 5성 캐릭터 지급!" 이 특정 게임을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소구하는 맨 앞의 문구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그 게임의 이야기가 무엇을 다루는지, 그 게임의 캐릭터가 어떠한 맥락과 배경에서 상호작용을 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본의 비평가 아즈마 히로키는 저서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메타 서사의 소멸로 인해 해체된 세계에 남은 캐릭터성만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게임-라이트노벨-동인문화에 대해 분석하면서 이와 비슷한 논지를 펼친 적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자 하는 것은 아즈마 히로키가 이야기한 캐릭터성과는 다른 맥락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에서 캐릭터는 수치화하기 어려운 것들(성격, 말투, 취향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지금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의 캐릭터들은 아즈마 히로키가 말한 비수치화한 개념들마저 제거된, 수치화되어 전투 등의 계산된 결과에 사용될 수 있을 만한 데이터, 이를테면 공격력과 방어력, 레벨과 랭킹 등으로만 구성된 캐릭터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로 인해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에서 캐릭터는 동인물 등의 설정을 통해 콘텐츠 바깥의 세계로 넘어갈 수 있지만, 모바일 롤플레잉 캐릭터들은 게임, 조금 더 좁게 표현하면 게임 속 전투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 소멸하는 캐릭터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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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의 이벤트 화면. 어떤 캐릭터가 무엇을 하는지는 광고의 소구점이 아니며, 오직 캐릭터의 등급과 플레이어 레벨만이 게임 안의 화두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이미지는 본문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비수치적 속성들이 모두 제거된 캐릭터들만 남아 끝없이 전투를 벌이고 랭킹을 경합하는 것만이 남은 지금의 모바일 롤플레잉 게임은 언뜻 보기에 허술해 보일 수 있음에도 매출 랭킹의 상위를 휩쓸며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맥락 없는 무한한 전투가 현재 모바일 게임의 여러 장르에서도 대세를 이룰 수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글이 길어진 관계로 그 배경에 대한 논의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고자 한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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