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궁금할 것이다. 미국에서 지난 4월 출간되자마자 석 달 만에 2100만 부가 팔렸고, 미국 독서 인구의 25%가 읽었다니…. 대체 무슨 책이기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을까.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섹스 판타지’다. 먼저, 소설을 조금 들여다보자.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좌절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여주인공 아나스타냐 스틸(아나)은 이렇듯 스스로도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대학졸업반 학생이다. 학보 편집장인 룸메이트가 갑자기 아픈 바람에 대신 인터뷰를 떠맡게 된다. 인터뷰 상대는 그레이 엔터프라이즈 홀딩스 CEO 크리스천 그레이라는 청년 부호다. 이 크리스천이란 남자, 돈만 많은 게 아니다. 훤칠한 키에 운동으로 잘 다져진 몸매. 들어가는 식당마다 여종원들도 그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다. 여자들의 혼을 쏙 빼놓게 할 정도로 미남이다. 이런 남자가 시골뜨기 여대생에게 데이트를 요청한다.
이 청년 부호는 대학 졸업파티 때 득달 같이 달려와 만취해서 토하는 아나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낡은 (폭스바겐) 비틀이 위험하다며 아우디를 사주며, 아나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찰리탱고(헬기)를 몰고 오고, 어머니 만나러 간다는 그녀의 비행기표를 1등석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준다(게다가 옆좌석까지 비워놓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한국 드라마 같지 않은가.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구혜선)에 빠진 구준표(이민호)라든가, 길라임(하지원)과 줄다리기를 하는 김주원(현빈)? 맞다. 여기까지는 딱 할리퀸 로맨스다. 판타지다. 그런데 그냥 판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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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E L James, left, signs copies of her new erotic fiction “Fifty Shades of Grey” during a book signing in Coral Gables, Fla., Sunday, April 29, 2012. (AP Photo/Jeffrey M. Boan) |
이 청년 부호는 대학 졸업파티 때 득달 같이 달려와 만취해서 토하는 아나의 등을 토닥거려주고, 낡은 (폭스바겐) 비틀이 위험하다며 아우디를 사주며, 아나를 만나기 위해 자신이 직접 찰리탱고(헬기)를 몰고 오고, 어머니 만나러 간다는 그녀의 비행기표를 1등석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준다(게다가 옆좌석까지 비워놓는다.)
어디선가 많이 본 한국 드라마 같지 않은가. <꽃보다 남자>의 금잔디(구혜선)에 빠진 구준표(이민호)라든가, 길라임(하지원)과 줄다리기를 하는 김주원(현빈)? 맞다. 여기까지는 딱 할리퀸 로맨스다. 판타지다. 그런데 그냥 판타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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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E L 제임스 시공사 제공 |
크리스천은 아나에게 계약서를 내민다.
‘서브미시브(하인)는 도미넌트(주인)가 내린 지시에 망설이거나 주저하지 않고 즉시 신속하게 복종한다.’ 그가 섹스를 나누기 원하는 빨간 방에는 눈가리개, 사슬, 수갑과 족쇄가 있다.
아나의 잠재의식은 늘 그녀에게 “말도 안된다”고 고개를 가로저으라고 하지만 아나는 그 앞에만 서면 태양으로 날아간 이카로스처럼 녹는다. 그를 만나면 심장이 갈비뼈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혈관 속에 피가 솟구친다. 그녀의 신경은 마디마디 살아난다. 과거 성경험 한 번 없던 아나는 그를 만날 때마다 온 몸에 네온사인이 켜진다. 얼굴이 붉어지고, 숨은 가빠진다.
‘내 몸의 아주 작은 부분만 만졌을 뿐인데도 호르몬이 날아올랐다.’
‘그는 내 몸의 피를 질주하게 하는 유일한 남자였다.’
크리스천, 그는 섹스의 신이다. 사랑 대신 섹스만 원한다. 중세 교회음악을 틀어놓고 섹스를 한다. 기독교적인 이름(크리스천)과 어울리지 않게 그는 이브를 유혹하는 뱀이다. 악마의 신 루시퍼다. 아나는 그레이를 50 빛깔을 가진 사내로 보지만, 그레이란 성(姓)이 암시하듯 남자는 50가지 어두운 그림자를 지니고 있다. 사랑과 욕정 사이의 간극에서 여자는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시애틀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크리스천의 고층 빌딩에서 격정적인 섹스를 나눠도 아나는 늘 사랑에 목마르다. 아나는 말한다. “나는 감각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다.”
차마 지면에 옮기지 못할 강렬한 묘사가 담겨있는 이 책은 아마존닷컴 사상 최초로 100만 부 판매기록을 세웠다. 영국에서도 출간 11주만에 100만 부가 나갔다. <해리포터>를 능가한 속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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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3편 해방은 다음달 중순 출간된다. 시공사 제공 |
로맨스 소설 성공의 규칙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여기서 잠깐, 섹슈얼러티를 연구해온 진화생물학자 도널드 시먼스의 글을 짚고 넘어가자. 그는 <다윈의 대답 - 낭만전사>에서 “잘 팔리는 로맨스는 거의 대부분 자상하고 감수성 있는 영웅을 그리지 않는데 왜냐하면 여성 독자들은 결국 여자주인공이 사랑에 의해서만 길들여지고 강하고 뻔뻔한 남자에 대한 판타지를 선호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결국 스칼렛(비비언 리)이 매달리는 사람은 애슐리(레슬리 하워드)가 아닌 레드 버틀러(클라크 게이블)였다. <50가지 그림자>가 딱 그렇다.
로맨스 소설은 여자의 시각으로 남자를 보고 판단하고, 재며, 설득한다. 책은 일관되게 아나의 시각, 아나의 눈, 아나의 감정으로 크리스천을 바라본다. 착한 여자가 나쁜 남자의 마음을 천천히 열어가는 빤한 할리퀸 로맨스의 구조도 답습하고 있다. 물론 표현은 감각적이다. 시각이 아니라 촉각으로 읽히며, 지성이 아니라 욕망을 건드린다. 솜털마저 일으켜 세운다.
외신은 뉴욕의 여성들이 남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고 전철에서도 꺼내놓고 이 책을 탐독했다고 보도했다. 나는 버스 안 성경책을 꺼내든 70대 노인 옆에서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 읽었다. 섹스 이야기는 모래수렁처럼 발목을 빼기 힘들 때가 있다.
그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여자들은 포르노를 싫어하고, 남자는 집착한다’는 사회·심리학자들의 진단은 틀렸는가? 젠더의 법칙을 넘어선 상위의 법칙이 작동할 수 있다. 남녀에 따라 각기 달리 작동하는 것이 젠더의 법칙이라면, 그보다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체의 법칙, 본능이 있다. 이것을 그냥 섹스의 법칙이라고 해두자. 아래의 글이 궁금증에 대한 답이 될 지 모르겠다.
‘섹스가 가장 먼저이며 손, 눈, 입, 두뇌가 뒤따른다. 배와 넓적다리 한 가운데로부터 자아에 대한 지식, 종교, 그리고 불멸성이 발산되어 나온다.’(앤소니 기든스 <현대 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1권 415쪽, 2권은 363쪽. 각 1만2000원. 후속 편 ‘심연’ 2권까지 나왔다. 마지막 ‘해방’도 곧 출간된다.
<최병준 기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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