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경제 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0월. 서울 갈월동 숙대입구역 길가에 말쑥하게 양복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남성이 '호떡 리어카'를 끌고 나타났다. 정장 구두에 흰색 조리모를 쓴 이 남성은 흥겨운 댄스음악을 커다랗게 틀어놓고 호떡을 굽기 시작했다. 예사롭지 않은 호떡 장수의 옷차림에 호기심을 느낀 여대생과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이 '양복 입은 호떡 장수'는 지금 가맹점 1600여개에 1년 매출 2000억원대인 죽 전문점 '본죽'의 대표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김철호(54) 본죽 대표는 충남대를 졸업하고 나이 서른이던 1993년 '겁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짜먹는 인삼'을 만들어 팔다가 1995년 유럽제 고급 목욕용품을 수입·판매해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나 TV 광고에 '거품 목욕'이 자주 등장한 덕을 봤다. 김 대표는 "제품이 부족할 정도로 밀려드는 주문에 하루하루가 정말 꿈같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그 꿈은 2년 만에 산산조각 났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했어요. 그다음 날부터 매출이 반 토막, 자고 일어나면 반의 반 토막, 또 반의 반 토막. 속수무책이었죠."
이 '양복 입은 호떡 장수'는 지금 가맹점 1600여개에 1년 매출 2000억원대인 죽 전문점 '본죽'의 대표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김철호(54) 본죽 대표는 충남대를 졸업하고 나이 서른이던 1993년 '겁 없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짜먹는 인삼'을 만들어 팔다가 1995년 유럽제 고급 목욕용품을 수입·판매해 대박을 터뜨렸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나 TV 광고에 '거품 목욕'이 자주 등장한 덕을 봤다. 김 대표는 "제품이 부족할 정도로 밀려드는 주문에 하루하루가 정말 꿈같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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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호 본죽 대표가 9일 서울 광화문 부근‘본죽&비빔밥’매장에서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이고 있다. 김 대표는 IMF 때 사업에 실패했지만, 리어카 호떡 장수 등을 거쳐 연 매출 2000억원대 기업의 대표로 재기했다. /이태경 기자 |
그 꿈은 2년 만에 산산조각 났다. "아직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1997년 11월 21일. 임창열 경제부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고 발표했어요. 그다음 날부터 매출이 반 토막, 자고 일어나면 반의 반 토막, 또 반의 반 토막. 속수무책이었죠."
환율은 두 배로 치솟았고,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다. 국산품 애용 운동이 퍼져 비싼 수입 용품이 설 자리를 잃었다. 잘나가던 회사가 IMF 석 달 만에 부도를 냈다.
1998년 9월까지 파산 절차를 밟았다. 서울 방배동의 번듯한 집도, 차도 다 팔았다. 홀어머니가 살던 충남 서천의 고향집을 팔아 겨우 방 2개짜리 반지하 집을 구해 아내와 어린 딸 셋까지 식구 6명이 살았다. 그래도 세금 5000만원을 못 내 신용불량자가 됐다. 생활비가 없어 예순 넘은 노모와 초등학교도 못간 일곱 살 둘째 딸이 새벽마다 폐지를 주우러 나섰다.
무조건 '작은 식당'을 열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갈월동 한 요리학원에 총무로 취직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1시 반까지 무급(無給)으로 재료 준비와 뒷정리를 돕는 대신, 공짜로 수업을 듣고 밥도 얻어먹었다. 하지만 당장 생활비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시작한 게 리어카 호떡 장사였다. 종로5가 세운상가 앞에서 20년간 호떡을 판 상인에게 빌고 또 빌어 반죽하는 노하우를 배웠다. 친구에게 75만원을 빌려 리어카와 호떡 조리 기구를 샀다.
첫날엔 수도 없이 그만두려고 했다. '사장님' 소리를 듣던 시절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창피해서 죽어도 못 하겠더라고요. 누가 '왜 여기서 호떡 팔고 있냐' 알아볼까봐 걱정도 되고…." 너무 긴장해서 첫날엔 호떡을 몇 개나 팔았는지 기억도 못 했다. 집에 돌아오니 호떡을 굽다 데어 손가락 끝마다 물집이 잡혔다.
호떡이 잘 팔리자 '한 수 가르쳐달라'며 양복 입은 40대 남성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IMF로 일자리를 잃은 회사원들이었다. 이들에게 돈을 받고 호떡 장사 '컨설팅'을 해줬다. 이때 '식당 창업 컨설팅도 돈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떡 장사 1년간 번 돈을 탈탈 털어 창업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을 찾아온 '예비 사장님'들에게 김 대표는 죽 장사를 권했다. "소화가 쉽고 영양도 풍부하지만, 현대화가 덜 돼 인기를 못 끈 '블루오션'"이라고 말해도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본인이 먼저 2002년 9월 서울대병원 근처 건물 2층에 죽집을 차렸다. 첫날 10그릇을 팔았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배 부르다"며 입맛을 다시는 손님 얼굴을 보고 성공을 직감했다고 한다. 두 달 만에 하루 100그릇을 팔겠다는 목표를 이뤘다. 2년 만에 세금 5000만원을 갚고 신용불량자 딱지도 뗐다.
'죽집이 성공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개점 몇 달 만에 "가맹점을 하게 해달라"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내는 "또 사업을 벌이는 건 싫다. 안정적으로 살자"며 반대했지만, 김 대표는 가맹점주를 받아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국내 최초의 죽 전문점 업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죽 쒀서' 성공한 김 대표의 목표는 '망하지 않는 것'이다. IMF 때 한 번 망해본 경험 때문이다. 그는 "사장뿐 아니라 직원들의 삶까지 불행하게 만드는 그런 실패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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