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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두 미국… "트럼프는 강하고 솔직" 對 "내가 왜 투표하러 안갔는지"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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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선의 워싱턴 Live] 미국 대선 바닥 민심 취재기

흥미로운 트럼프 연설
선거 초반 반반씩 나눠 취재 일정 짜놨지만
거칠고 예측불허인 트럼프 유세로 쏠려

트럼프 지지자들의 '진심'
유세장 몰려드는 사람들 '팬心'인줄 알았지만
대부분이 '진지한 선택'

"기업인으로 성공했으니 대통령으로도 그럴 것"

선거후 거리엔 '트럼프 패션'
중년 남성 빨간 모자 쓰고 짙은 색 재킷 걸치고 다녀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한다면 거짓말이고, 당분간은 좋아하지 않을 작정이다. 미국 대선 취재하느라 지난 몇 달 동안 미국 곳곳을 헤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앨라배마주 마지막 감사 유세 취재를 끝내고 돌아오니 남은 건 피로와 거대한 영수증 무더기였다.

첫 출장 땐 숨막히는 한여름이었는데, 그사이 단풍 든 가을이 지나고 눈 내리는 겨울이 되었다. 낯선 도시에 도착해 자동차를 빌리고 내비게이션의 지시를 따라 달리고 달렸다. 출장 중엔 전문가나 교수를 거의 만나지 않았다. '민심'을 알려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든, 기차든, 유세장이든 옆에 앉은 보통 사람들이 취재원이었다. 다들 어찌나 말을 잘하는지 받아쓰면 기사였다.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지난 9일 열린 트럼프 당선 감사 유세장 모습. 겨울 한파에도 사람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 강인선 특파원·

미시간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지난 9일 열린 트럼프 당선 감사 유세장 모습. 겨울 한파에도 사람들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 강인선 특파원·


트럼프, 거칠어도 새로웠다

선거 초반에는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 유세를 반씩 나눠 일정을 짰다. 어느 순간부터 트럼프 쪽에 더 많이 가게 됐다. 트럼프가 이기리라 내다봤기 때문이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니고 새롭고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완성도가 높은 클린턴 유세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아 점점 발길이 멀어졌다. 반면 트럼프 유세는 거칠지만 예측 불허라 자꾸 가보고 싶었다.

트럼프 유세의 단골 바람잡이는 루디 줄리아니 전 뉴욕 시장이었다. "레이건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뉴욕타임스를 읽었다고요. 그러고는 딱 그 반대로 했더니 성공한 대통령이 됐다는 거 아닙니까. 우하하하…." 청중이 박장대소했다. 조금 있다 트럼프가 등장한다. 대통령이 되면 외국에 빼앗긴 일자리 돌아오게 해주겠다고, 미국을 군사적으로 더 강하게 만들겠다고 포효한다. 지지자들은 따지지 않는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으로 행복해한다.

"성공해봤으니 성공한 대통령 되겠지"

처음엔 트럼프 유세장에 몰려든 사람들이 '팬심'으로 구경 오는 줄 알았다. 오랜 TV 스타이자 유명 인사, 재벌에 공화당 대선 후보까지 됐으니 한번 보고 싶어할 만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워싱턴 사람들에게 트럼프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었지만 현장에서 만난 지지자들에겐 '진지한 선택'이었다. 정치를 통해 유명 인사가 돼 그 명성에 힘입어 돈 번 정치인보다, 차라리 돈 많은 유명 인사가 정치를 하는 쪽이 낫다고들 했다.

12월 플로리다주 올랜도 감사 유세에서 만난 제약 회사 30대 직원은 "트럼프가 기업인으로 성공했고, 대통령이 되는 데도 성공했으니, 대통령으로서도 성공할 것"이라고 했다. 미시간주 감사 유세에서 만난 60대 여성 제인은 트럼프가 좋아서가 아니라 클린턴이 싫어서 트럼프를 찍었다. 하지만 당선 이후 그의 행보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제인은 "정치인들은 선거 때는 울며 불며 매달리다가도 막상 당선되면 입 싹 씻고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은 잊어버리잖아. 백악관에 틀어박혀 우리 따위와는 상관없이 살지. 하지만 트럼프는 달라. 고맙다고 인사하러 온다잖아" 했다.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지난 16일 열린 트럼프 당선 감사 유세장에 트럼프로 분장한 아저씨가 나타났다(왼쪽 사진). 감사 유세장에선 정장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트럼프 패션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미 대선 전인 10월 뉴햄프셔주에서 본 트럼프 기념품 노점.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 모자가 인기다. / 강인선 특파원

플로리다주 올랜도에서 지난 16일 열린 트럼프 당선 감사 유세장에 트럼프로 분장한 아저씨가 나타났다(왼쪽 사진). 감사 유세장에선 정장 차림에 야구모자를 쓴 트럼프 패션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다. 오른쪽 사진은 미 대선 전인 10월 뉴햄프셔주에서 본 트럼프 기념품 노점. 공화당을 상징하는 빨간 모자가 인기다. / 강인선 특파원


"트럼프가 너무 너무 좋아"

미시간주에서 만난 재활 치료 전문가 미리엄은 "한국인들은 트럼프의 어떤 점에 관심을 갖느냐"고 물었다. 방위비 분담,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가능성을 얘기해줬다. 미리엄은 "나는 외교 정책이나 국제 문제는 잘 모르지만 한국, 일본, 이스라엘은 미국의 오랜 친구로, 우리가 늘 그들을 지켜줬다는 건 알고 있어"라고 했다. "내가 이런 말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 나는 트럼프가 그 약속을 바꾸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마음속으로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샤이(shy) 트럼프'가 아니었다. 아이오와주 디모인에서 만난 세 아이의 엄마 딜라일라는 "트럼프를 너무 너무 너무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말했다. "트럼프는 강하고 솔직하고 투명한 사람이야. 선거 때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하면 다들 비웃더라고. 그래서 남들에겐 말 안 했지. 선거는 말이 아니라 표로 결판나는 거잖아. 우리 집에선 TV도 안 봤어. 온통 트럼프 비판하는 뉴스가 넘쳐나니까 거기 영향받지 않으려고."

지지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지지자가 투표장에 가느냐가 중요하다. 대선 다음 날 워싱턴에서 우버 택시 합승을 했는데, 같이 탄 20대 흑인 여성이 "아이고, 내가 미쳤지, 왜 어제 투표하러 안 갔는지…" 하고 탄식했다. 흑인 남성 기사는 "너 같은 사람들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하며 한숨을 쉬었다.


두 나라 이야기

여론이 민주·공화로 팽팽하게 갈라진 상황에선 어떤 선거 결과가 나와도 미국인들의 반은 분노한 채로 4년을 지내야 한다. 트럼프 지지자들 세계로 들어가보면 희망과 의욕에 넘쳐 매일이 잔칫집 같지만, 미국 인구의 반은 캐나다 이민을 생각하며 비탄에 빠져 있다.

대선 이후 저녁 모임에 가보면 정치 성향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불편한 대화가 오가기도 한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후 식욕을 잃고 밤잠을 잃어 몸무게도 잃고 삶의 의욕도 잃었다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아직도 믿을 수 없다"고 되뇌며 비통한 식사를 하는 도중 침묵을 지키던 한 명이 먼저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마자 다들 "어쩐지 트럼프 지지자 같더라"며 수군댔다.

며칠 전엔 워싱턴포스트 기자와 점심식사를 했는데, 그는 "트럼프가 내놓는 정책과 장관 지명자들은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뒤죽박죽"이라며, "새 행정부는 조만간 대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내가 선거 며칠 전 이메일을 보내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물었을 때 "너 혹시 미국 선거인단 제도를 잘 모르는 것 아니냐. 아무리 계산해도 트럼프가 이길 방법이 없다"며 면박을 줬던 인물이다.


좋았던 옛 시절로 돌아가고픈 미국인들

오하이오주는 이번 대선 취재 지역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지난 8월 말 오하이오주 공화당의 주요 인사 대여섯 명이 그룹 인터뷰에 참여해주었다. 외국 기자 온다고 한여름에 양복 차려입고 나온 사람들이 "미국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면서도 늘 불평불만만 많은 것 같아 부끄럽다"고 쑥쓰러워했다. 한때는 번영했으나 이젠 쇠락한 지역을 돌아보고 나니 "좋았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이해가 됐다.

뉴햄프셔주 워런의 노천 극장에서 열린 버니 샌더스 전 상원의원의 클린턴 지원 유세도 잊을 수 없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샌더스를 위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상위 1%가 아닌 모두를 위한 미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샌더스는 젊은 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지만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진 못했다. 지지자들은 애정 담뿍 담긴 눈길로 샌더스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애정이 클린턴의 표로 변신했는지는 모르겠다.

선거가 끝나고 난 후

결과를 알고 나면 이전에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선거가 한창일 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끝나고 나니 "나는 원래 트럼프가 이길 줄 알았다"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지, '신은 늘 강한 군대 편에 선다'는 말이 절로 생각난다. 거리에 '트럼프 패션'이 등장했다. 중년 남자들이 빨간 모자를 쓰고 짙은 색 재킷을 걸치고 돌아다닌다.

농담 같은 얘기인데, 지난봄에 워싱턴에 오래 산 친구가 "미국 대선 별거 없어. 더 매력 있고 키 큰 사람이 이겨"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새롭고 재미있는 쪽이 이기게 돼 있지"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맞는 얘기였다. 한마디 더하자면 '민심 흐름을 정확하게 읽는 아웃사이더'가 늘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선택이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Why?' 조선일보 土日 섹션 보기

[강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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