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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막걸리'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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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주세법 개정 후 직접 만드는 막걸리점 속속 문열어… 전통주 인기 다시 되살아날 듯
옛날엔 구석진 촌마을에도 주막이 하나씩은 있었다. 주막에서는 시큼 달큼한 냄새가 풍기게 마련. 쉬어가는 길손의 허기와 갈증을 달래줄 술 익는 냄새였다. 대개는 주모가 직접 빚은 ‘하우스 막걸리’였다. 마을마다 서로 다른 맛과 개성을 지닌 술이 익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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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전통 주막인 삼강주막. 경북 민속자료로 지정된 예천 삼강주막에서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실 수 없으나, 허락을 받아 촬영했다.


주막이 부활하고 있다. 지난 2월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대형 양조장이 아닌 음식점에서도 직접 담근 막걸리·청주·약주를 팔 수 있게 됐다. ‘맥주는 소규모 제조 판매를 허용하면서 정작 우리 술과 음식은 한곳에서 팔지 못하느냐’는 전통주 업계의 불만이 받아들여진 것. 업계에서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드는 ‘크래프트 막걸리’ 또는 ‘하우스 막걸리’가 전통주의 인기를 되살리길 기대한다.

‘크래프트 막걸리법’이 통과한 지 8개월. 직접 담근 막걸리를 파는 곳들이 전국에 속속 문을 열고 있다. 옛 주막과 지금 주막은 어떻게 같고 다를까. 조선 시대 마지막 주막으로 알려진 경북 예천 ‘삼강주막’과 서울 도심 등에 새로 등장한 ‘모던 주막’을 다녀왔다.

◇마지막 전통 주막, 삼강주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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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에서는 배추전, 도토리묵처럼 소박한 안주가 딸려 나온다.


"사람들이 전부 여기서 건너가. 소도 건너갔지. 소마다 짚신을 한 짐씩 짊어지고 강을 건넜어. 소장수들이 소한테 짚신 갈아 신겨 가면서 서울까지 가는 거요. 과거 보는 선비들도 여기로 다니고. 주막도 손님이 그렇게 많았지."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 사람들은 과거 삼강나루가 번성하던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 등 세 강이 만나는 삼강리에 나루터가 있었다. 물자와 사람이 분주하게 오가던 교통 요지였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경상도 선비들은 "추풍령으로 가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하고, 죽령으로 가면 시험에 죽 쑤고, 조령(문경새재)으로 가면 새처럼 훨훨 날 수 있다"고 하여 일부러 문경새재를 넘으려고 삼강나루에서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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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곰막걸리&양조장은 흰살 생선 같은 고급 안주를 낸다.


삼강주막(三江酒幕)은 1900년쯤 삼강나루터 거대한 회나무 아래 자리 잡았다. 보부상과 나들이객, 과거 응시자, 뱃사공이 주막에서 허기를 채우고 밤이슬을 피해 잤다.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주막을 꾸린 건 1930년대부터. 주민들은 유 할머니가 "글도 숫자도 몰랐지만 머리가 비상했다"고 했다. "외상을 주면 부엌 흙벽에 칼로 금을 그었어요. 세로 짧은 금은 '막걸리 한 잔', 긴 금은 '막걸리 한 되'란 뜻이에요. 다 갚으면 가로로 긴 금을 그었지요."

삼강 나루터와 주막은 1970년대부터 쇠락했다. 나루터 아래 다리가 놓였고, 제방이 생기면서 인적이 끊겼다. 강물이 줄어든 데다 강 바닥에서 건설 골재를 파내면서 물이 더 말랐다. 손님도 말랐다. 유 할머니는 주막을 유지하며 홀로 세월을 보내다 2005년 세상을 떠났다.

주모가 사라지자 주막도 허물어져 갔다. 주민들은 "마지막 남은 주막을 살리자"며 나섰다. 주막을 보수하되 원형을 가능한 한 지켰다. 유 할머니가 부엌 흙벽에 그어놓은 '외상 장부'도 고스란히 보존됐다. 2005년 12월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주막이 문화재 지정을 받은 건 부엌 덕분이다. 일반 가정집 부엌과 달리 문이 넷이나 있다. 손님이 어디서 부르건 바로 나갈 수 있는 구조. 주막은 대개 부엌이 주모가 앉아있는 방이나 마루에 붙어 있어서 방이나 마루에 앉아서도 바로 술이나 국을 뜰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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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 부엌 흙벽에는 마지막 주모 유옥연 할머니가 그어놓은 ‘외상장부’가 고스란히 보존돼 있다. 유리판으로 덮인 부분이다.


마지막 주막이 복원됐다는 소문이 돌자 관광객이 몰려들었다. 예천군은 2008년부터 삼강나루 추억과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대홍수로 유실된 보부상과 사공들이 묵던 대여섯 채의 초가집을 복원해 주막촌을 만들었다. '주모' 역할은 삼강마을 부인회에서 맡았다. 모두부, 배추전, 도토리묵 따위 과거 유 할머니가 팔던 안주를 낸다. 꾸밈없이 투박한 그야말로 '경상도스러운' 맛이다. 막걸리는 '삼강주막주'라는 양조장을 차려 직접 생산한다. 삼강나루는 주말 2000~3000명, 평일 500~600명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하우스 막걸리법과 함께 등장한 ‘모던 주막’

지난 2월 주세법이 개정되면서 막걸리나 청주, 약주 등 전통주를 빚는 작은 양조장을 만들 수 있게 됐다. 이 제도를 ‘현대판 주막’ ‘도심형 양조장’ ‘하우스 막걸리’라 부른다. 지금까지 전통주는 대형 양조장에서만 생산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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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솔마당에서는 전통주 핵심 재료인 누룩을 직접 만들어 쓴다.


정부는 16년 전인 지난 2000년 맥주에 한해 소규모 제조·판매를 허용해 왔다. 도심 어디서든 일정 시설만 갖추면 직접 만든 맥주를 안주와 함께 팔 수 있었다. 덕분에 서울 경리단길과 상수동, 성수동에 작은 하우스 맥줏집들이 잇달아 문 열면서 독특하고 맛있는 수제 크래프트 맥주를 쏟아냈고, 애주가들은 다양한 맥주를 즐길 수 있었다.

전통주 업계에서는 이게 불만이었다. 한국가양주연구소 류인수 소장은 “왜 ‘하우스 맥주’는 되면서 정작 우리 술은 안 되는지를 두고 한숨이 깊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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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솔마당 누룩 발효실. 김주평 대표는 “쌀누룩은 솔가지와 함께 두면 더 잘 된다”고 했다.


지난 2월 주세법 개정으로 맥주뿐 아니라 전통주도 소규모 제조가 가능하게 됐다. 그동안 막걸리와 약주는 5000L 이상, 청주는 1만2200L 이상의 담금·저장용기를 보유한 제조장만 주류 제조 면허를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월 공포·시행된 시행령은 1000L 이상의 저장용기를 보유하기만 하면 주류 제조가 가능하도록 자격 요건을 크게 완화했다. 면허를 받은 식당이 자신만의 차별화된 술을 빚어 식당을 찾는 손님은 물론 다른 식당에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류 소장은 “이러한 형태는 과거 주막 풍경과 비슷하다”고 했다. 이른바 ‘모던 주막’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테이크아웃 막걸리’도 되는 모던 주막

연말까지 20여 개 업체가 하우스 막걸리 허가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1호 하우스 막걸리 면허는 수원 ‘솔마당’에서 받았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늑한 정원 같은 부지에 반듯하게 들어선 양옥 건물 2층이 하우스 막걸리 제조장이다. 여기에 85L짜리 항아리 10개와 120L들이 스테인리스 들통 2개가 놓여 있다.

솔마당에서는 하우스 막걸리 허가를 받기 한참 전 전통주를 생산할 수 있는 대형 양조시설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 김주평 솔마당 대표는 “하우스 막걸리 허가를 받으면 막걸리를 병에 담지 않아도 판매할 수 있어 비용이 줄어든다”며 “하지만 그보단 ‘대한민국 1호 하우스 막걸리’라는 점이 마케팅에 도움 될 것 같아 주세법 개정안 소식을 듣자마자 서둘러 허가를 받았다”고 했다.

주모가 오랜 경험에서 얻은 감으로 술을 빚던 과거 주막과 달리, ‘모던 주막’은 막걸리를 과학적으로 연구·생산한다. 김 대표는 “누룩실을 따로 가지고 있다는 걸 자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누룩실을 따로 마련하고 여기서 막걸리와 나머지 전통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누룩을 직접 띄운다. 웬만큼 큰 규모를 자랑하는 양조장에서도 직접 누룩을 만들어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10평 규모의 누룩실은 발효 과정에 따라 주발효·후발효·건조숙성실로, 또 누룩 재료에 따라 쌀누룩 발효실과 밀누룩 발효실로 나눠져 있다. 김 대표는 “누룩마다 곰팡이가 달라서 온도와 습도를 따로따로 해야 누룩이 잘 나온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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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남동 느린마을양조장&펍 매장 한가운데에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1평 남짓 규모의 양조장이 들어서있다. 손님들은 여기서 매일 만드는 하우스 막걸리를 치즈주꾸미볶음 같은 퓨전 안주와 함께 즐긴다.


하우스 막걸리 허가를 두 번째로 받은 곳은 서울 연남동 ‘느린마을양조장&펍’이다. 전통주 기업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는 직영점이다. 하우스 막걸리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배상면주가 장윤석 팀장은 “올해 말까지 15개 가맹점을 오픈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20여 평 작은 매장 한복판에 투명한 유리로 사방이 둘러싸인 정사각형 공간 안에 각종 양조시설이 갖춰져 있다. 배상면주가에서는 이 한 평 남짓한 규모의 양조시설을 ‘세계에서 가장 작은 양조장’으로 기네스 공인을 받으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박진국 점장과 직원들은 매일 영업이 끝나면 막걸리를 만든다. 박 점장은 “손님들이 볼 수 있고 술냄새도 맡을 수 있어 좋아한다”고 했다.

느린마을양조장&펍에서 가장 인기있는 안주는 ‘치즈 주꾸미 볶음’이다. 매콤한 양념에 볶은 주꾸미를 모차렐라 치즈와 함께 뜨거운 철판에 낸다. 주꾸미를 치즈에 찍어 먹으면 매운맛이 한결 완화되면서 한층 풍요로운 맛을 낸다. 삼강주막의 배추전이나 모두부 같은 전통적인 안주와는 완전히 다른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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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모던 주막’ 백곰막걸리&양조장. 1~2층에서는 막걸리를 비롯한 170여 가지 전통주를 팔고, 지하에서는 막걸리를 만든다.


‘과일 막걸리’도 있다. 과일즙과 막걸리를 섞은 일종의 칵테일이다. 모던 주막에서는 ‘막걸리 테이크아웃’도 가능하다. 투명 플라스틱 컵에 막걸리를 담고 입구를 비닐로 밀봉해 새거나 흘릴 염려도 없다. 박 점장은 “주말이면 과일 막걸리를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서 공원에 들고 가 마시는 젊은 손님들이 많다”고 했다.

모던 주막을 하는 이들 중에는 우리 술을 더 널리 알려 사랑받게 하겠다는 ‘신념’으로 접근하는 이들도 있다. 서울 신사동 ‘백곰막걸리&양조장’은 전통주 전시장 같은 모던 주막이다. 막걸리 40종을 비롯해 약주, 소주 등 170가지가 넘는 전통주를 갖추고 있다. 이렇게 많은 막걸리를 갖췄다고 하면 좀 안다는 이들은 “왜 그런 무모하고 힘든 일을…” 하며 의아해한다. 막걸리는 전국 구석구석에 있는 작은 양조장으로부터 배달 받기도 어려운 데다, 유통기한이 짧아 이를 확인하고 관리하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이곳 대표인 이승훈씨는 “힘들지만 가능한 한 많은 전통주를 손님들에게 맛보이고 싶다”며 “앞으로 전통주 리스트를 200종까지 확대할 계획”이라고 했다.

류인수 소장은 “하우스 막걸리가 활성화되면 ‘강남 막걸리’ ‘청담동 막걸리’ ‘구기동 막걸리’ 등 서울에서만도 서로 다른 맛과 개성을 지닌 막걸리가 나오고, 막걸리는 물론 전통주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나중에는 ‘강남 지역 막걸리는 이런 맛이 나더라’ ‘서교동 모던 주막들의 막걸리는 저런 공통점이 있더라’는 식으로 지역별 특성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요.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 어떠니, 부르고뉴 와인이 어쩌니 하듯이요.” 막걸리도 와인처럼 테루아(terroir)를 따져가며 마시고 품평한다니,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진다.

[예천·수원·서울=글·김성윤 음식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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