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는 미사일을 막을 수 있을까?
미사일 방어체계의 역사와 의미
최근에 사드(THAAD) 도입을 두고 시끄럽다. 적 미사일을 종말단계의 중고도에서 요격하는 THAAD를 놓고 군사적인 효용성이 과연 있느냐에서부터 전자파나 소음의 유해논란까지 뜨겁다. 핵무기의 시대, 특히 ICBM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사일 방어는 중요해졌다. 미사일 한 발에 자기 나라가 송두리째 사라질 수 있다는 위협을 묵과할 만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미사일 방어체계의 역사와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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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미사일 방어의 필요성을 느낀 건 2차대전부터였다. 세계 최초의 지대지 탄도미사일인 나치 독일의 V-2 로켓이 영국을 초토화시키자 연합군은 대응방법에 고심했다. 영국군은 V-2 한 발당 1만2000발의 대공포사격으로 요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약 450m/s 속도로 18km 상공까지 도달하는 미사일로 V-2를 요격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개발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특히 미국은 나이키 프로젝트를 통해 대공미사일들을 개발했지만, 당시 기술로서는 아직 미사일로 미사일을 잡는 건 어려웠다. 게다가 2차대전이 끝나자 더 이상 탄도미사일을 잡을 필요가 없어졌다. 미사일 방어는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다.
그러나 1950년대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에서 핵폭격기 전력에 뒤지던 소련은 장거리 미사일로 미국을 견제(라고 쓰고 공격이라고 읽는다)하겠다면서 본격적인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 나선다. 소련에서 미국 본토까지 핵을 미사일에 실어 공격하겠단 얘기였다. 그리하여 1957년 R-7 '시묘르카'라는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만들어냈다. R-7은 34m 짜리의 거대한 미사일로 3메가톤급 수소탄을 최대 8,800km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특히 소련은 R-7을 우주로켓으로도 개조하여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닉을 쏘아올렸다. 이렇게 소련은 ICBM 능력을 매우 '평화적'으로 입증했고, 미국은 충격에 빠졌다. 엄청난 위협이 눈앞에 다가오자 미국은 다시 미사일 방어에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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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방어체계의 첫등장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LIM-49 나이키-제우스 미사일이었다. 이 미사일은 다소 과격한 요격방식을 채택했다. 즉 핵탄두를 장착하여 공중에서 핵미사일을 무력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나이키-제우스는 최대고도 280km까지 요격이 가능했다. 핵폭발이 일어나더라도 배척고도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안전하다는 논리였다. 기존에 배치한 나이키-허큘리스 미사일을 바탕으로 1957년 2월 개발을 시작하여 1961년에는 어느 정도 모양새가 갖춰지게 되었다. 그리고 1962년 7월 나이키 제우스는 드디어 ICBM 탄두를 요격하는데 성공했다.
나이키-제우스에게는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있었다. 바로 존 F 케네디 대통령이었다. 그 덕분에 미 육군은 애초에 나이키-제우스 미사일 7000발과 포대 70개를 갖추겠다는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마침 쿠바 미사일위기까지 발생하면서 미사일 방어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그리하여 워싱턴, 뉴욕, LA 등 12개 주요도시를 지키겠다는 계획으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런 케네디의 계획에 제동을 건 인물이 있었으니, 당시 국방장관인 맥나마라였다.
나이키-제우스는 아직 기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비용 효율성이 너무도 떨어진다는 이유로 케네디를 설득하여 1963년에 배치를 취소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미사일 방어를 포기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맥나마라는 나이키-제우스를 대신하여 나이키-X 개발을 진행하도록 했다. 나이키-X 사업의 결과, 기존의 나이키 제우스 미사일을 개량한 LIM-49 스파르탄 미사일이 개발되었다. 스파르탄은 사거리 720km에 최대고도 560km에 이르며, 장착되는 핵탄두는 무려 5메가톤 급에 이르렀다. 이 정도면 5km 인근에서 터져도 날아오는 ICBM을 요격할 수 있었다. 한편 사거리 40km에 고도 30km에서 강한 방사선으로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스프린트도 함께 개발되었다. 이 두가지 시스템이 합쳐져 나이키-X 사업은 1967년에 이르러서는 센티넬 미사일방어시스템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린든 존슨 행정부는 센티넬의 실전배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한편 미사일방어에 있어 앞서 있던 것은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미 시스템A라는 탄도미사일 방어체계를 1956년부터 시작하여 R-12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요격함으로써 개발에 성공했다. 소련은 더욱 발빠르게 움직여 시스템A를 바탕으로 A-35라는 미사일 방어체계를 이미 1965년부터 모스크바 인근에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소련이 미사일방어체계에서도 앞서나가자 미국은 다급했다. 특히 1968년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소간 군축회담이 시작되었는데, 당연히 손쉽게 합의에 이를 리 없었다. 결국 미소 양측은 서로 비용부담으로 골머리를 앓던 미사일 방어시스템을 서로 2개소에만 건설하기로 한 제안에 합의하면서 ABM(Anti Ballistic Missile) 협정이 1972년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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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프가드에서 스타워즈까지
ABM협정으로 약간의 여유를 확보한 미국은 1972년 센티넬 시스템을 처음으로 가동했다. 그러나 1974년 미소가 각각 1개의 미사일방어체계만을 갖기로 ABM협약이 다시 개정되자, 센티넬 계획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센티넬을 그대로 이어받되 규모를 줄인 세이프가드 시스템이 1975년부터 실전배치됐다. 그러나 미국은 세이프가드 시스템을 소련에 대한 협상카드 정도로 생각했고, 1976년에는 시설가동을 중지했다.
이후 1976년부터 미국은 핵탄두를 사용하지 않는 요격미사일의 개발에 집중했다. 과거 핵폭발을 이용한 요격에 대한 비판을 의식한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초에 이르러서는 미사일로 미사일에 직접 충돌하여 요격할 수 있는 센서와 유도기술이 모두 확보되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충돌방식(Hit-to-Kill) 요격인 호밍오버레이 실험(Homing Overlay Experiment; HOE)이 1983년부터 실시되었다. 미뉴트맨 미사일을 HOE 발사체가 요격하는 이 실험은 3차례 실패 이후 1984년 6월 10일 마지막 시험발사에서 드디어 성공했다.
바로 이 시기를 즈음하여 미국은 자신의 핵능력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소련이 핵 선제타격능력을 급격히 증강시키는데 비하여 자국의 공격과 방어능력이 미약하다는 우려가 높아졌다. 당시 레이건 대통령이 1983년 3월 23일 '스타워즈' 연설을 통하여 전략방위구상(Strategic Defense Initiative, SDI)을 밝히면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방어능력을 갖출 것을 약속했다. 레이건의 SDI 구상은 이듬해부터 실현가능한지 개념연구를 마쳤다. 그리고 1986년부터는 실현이 가능하다면서 개발을 시작했다.
SDI 구상은 소련이 발사한 ICBM을 미국 땅에 떨어지기 전에 요격하겠다는 계획이다. 무려 2000발까지 말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결국 요격무기체계가 우주공간에 배치되어 있어야만 했다. 우주의 조기경보위성으로 ICBM 발사를 탐지하면, 지상의 X레이 레이저발사기지에서 발사한 빔을 반사 위성이 조향하여 공격하고, 남은 미사일은 지상의 요격미사일이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1987년 SDI의 첫 운용개념인 전략방어체계 제1단계 구상안이 추진되었다. SDI는 지상요격미사일과 궤도요격인공위성, 그리고 조기경보인공위성까지 포함하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당시의 과학기술로서는 커다란 한계에 부딪혀 무려 700억 달러를 투입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고 폐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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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I의 실체를 모르던 소련의 지도부는 전반적인 두려움으로 인하여 무리한 군비팽창을 시도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결국 경제파탄을 가져와 소련을 붕괴시켰고, 결과적으로 SDI는 냉전을 붕괴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SDI로 인하여 시작된 ERINT나 ERIS 같은 미사일 개발사업은 이후 패트리어트 PAC-3나 THAAD로 이어지면서 현재 미사일방어의 얼개를 만들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이제 미사일방어가 나설 자리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1991년 걸프전이 발발하면서 새로운 위협이 가시화되었다. 이미 이란-이라크 전에서 단거리 탄도미사일로 재미를 보았던 이라크는 걸프전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로 스커드 미사일을 날리면서 미군과 다국적군을 괴롭혔다. 당시 패트리어트 PAC-2가 현장에 투입되어 스커드 요격에 나섰는데, 사우디에서 79%, 이스라엘에서 40%의 요격률을 기록했다. 물론 반론도 있다. 미국의 정부회계국에서는 PAC-2의 요격률을 9%로 평가한 바 있고, 이스라엘은 PAC-2의 요격률이 2%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 PAC-2는 직접충돌요격 방식이 아니었기에, 실제 스커드의 인근에서 폭발하여 요격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스커드는 여전히 비행하여 피해를 입힌 경우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걸프전 이후 미국은 미사일 방어계획에 다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클린턴 행정부에 들어서도 육,해,공군의 다양한 미사일방어체계들이 꾸준히 개발되어, PAC-3, THAAD, SM-3 미사일 등이 개발되었다. 심지어는 2001년 취임한 죠지 W 부시 대통령은 미사일 방어체계를 주요국방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2002년 미국은 ABM 조약에서 일방적으로 탈퇴하였으며, 미사일방어청(Missile Defense Agency)을 설치하여 각종 시스템들을 실전배치 했다.
현재 미국이 실전배치한 미사일방어체계는 ICBM에 대해서는 GBI와 SM-3, 중거리 탄도미사일까지는 패트리어트 PAC-3와 THAAD가 담당한다. 이중에서 실전을 거친 것은 PAC-3 뿐이다. PAC-3는 2003년 이라크전에 투입되어 쿠웨이트로 발사된 미사일 6발 가운데 4발을 요격했다. 최근에는 예멘 내전에서 후티반군의 단거리 지대지미사일 공격에 대항하여 사우디아라비아군이 PAC-3로 요격하고 있는데 향상된 성능으로 믿을 만한 성과를 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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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일 방어의 의미
한편 한국에 배치될 고고도미사일지역방어체계인 THAAD는 실제로는 중고도 종말단계의 요격을 담당한다. 즉 미사일이 날아와서 떨어지는 종말단계에서 40~150km의 고도에서 요격을 담당하므로 중고도 요격시스템에 해당한다. 1999년 최초의 요격실험에 성공한 이후에 여태까지 13번의 실험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또한 비슷한 고도에서 요격이 가능한 이스라엘의 애로우2, 러시아의 S-400 그리고 중국의 HQ-16에 비하면 기술적으로도 성숙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실전 데이터도 축적되어 있어, 현존하는 가장 성숙한 중고도 요격체계로 평가할 수 있다.
보통 THAAD 1개 포대는 TPY-2 레이더 1개, M1120 8연장 미사일 발사차량 6대(또는 9대), 지휘통제소 2개, 기타 전력공급차량 등으로 구성된다. 2015년까지 미국은 6개의 THAAD 포대를 배치할 계획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여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에는 하와이에,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인 4월에는 괌에 THAAD를 배치한 바 있다.
THAAD가 한반도에 도입되더라도 이는 주한미군에 의해 운용되는 것으로 1개 포대가 배치될 예정이다. 그러나 요격반경이 200km인 THAAD 포대가 경상북도 성주에 배치됨으로써 수도권이나 미군의 중심인 평택기지가 방어권에서 벗어나게 되어 미사일방어가 효율적이지 않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THAAD만으로 북한의 모든 미사일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기존에 우리군의 PAC-2와 미군의 PAC-3만으로 방어하던 느슨한 미사일방어망이, 사정거리가 넓은 THAAD의 도입으로 더욱 넓어지게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한마디로 미사일방어 능력을 갖추기 위한 첫걸음을 시작했을 뿐이다.
THAAD와 같은 미사일 방어체계가 갖는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도 억제능력에 있다. 비록 100%의 요격능력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95%, 아니 50%의 요격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방은 공격을 주저하게 된다. 즉 미사일이 요격당했을 때 이어질 반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적 억제능력은 미사일방어체계 뿐만 아니라 적국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반격능력을 전제로 한다. 방어만이 능사가 아니라 공격을 전제로 한 방어가 더욱 의미를 갖게 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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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조선 양욱 한국국방안보포럼 수석연구위원



































































